김첨지의 설렁탕에는 국수가 있었을까

아름다운 황금들녘이 쓸쓸한 벌판으로 변하는 시절이다. 이맘때면 따뜻한 음식이 생각난다. 광화문 교보빌딩에서 8년 있다가 신설동으로 사무실을 이전하고 화려한 도심에서 비켜난 서운함, 허전함이 있었지만, 오래된 골목 쌓아온 세월만큼이나 든든하고 정겨운 노포를 찾아다니는 소소한 즐거움을 느끼기도 했다.
  동네를 잘 아는 지인에게 ‘맛집’ 세 곳을 소개받았다. 깔끔한 국물과 직접 반죽해 손으로 썰어 고르지 않고 쫄깃한 면발이 일품인 칼국수와 동치미국물에 숙성시킨 오이소박이부터 피가 두터운 찐만두, 동그랑땡, 순대에 조랭이떡국까지 한 상 푸짐하게 나오는 개성요리, 그리고 깊은 맛의 국물을 제대로 토렴한 깔끔한 설렁탕까지. 특히 설렁탕은 줄 서서 기다리지 않고 먹으면 ‘운수 좋은 날’이었다. 설렁탕 나오기를 기다리며 작은 밥공기에 담긴 국수 위에 깍두기 국물을 부어 후루룩 먹고 나서 국수를 추가 주문하여 설렁탕에 말아 먹는 것이 일종의 ‘정석’인데, 국수를 무한정으로 주는 후한 인심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독한 감기로 며칠을 앓고 난 후 이곳에 간 적이 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설렁탕에 파를 듬뿍 넣고, 뜨끈한 국물을 입안으로 밀어 넣자 따뜻한 기운이 목을 타고 온몸에 퍼졌다. 한 그릇을 다 먹고 거짓말처럼 감기가 나았다. 그때 설렁탕은 나에게 묘약이었고 또 위로였다.

설렁탕에 ‘국수’가 들어간 건 언제부터였을까.
설렁탕에 ‘국수’가 들어간 건 언제부터였을까.

운수 좋은 날과 설렁탕
인력거꾼 김첨지는 아파 누워있는 아내를 위해 그녀가 소원하던 설렁탕을 사서 집으로 온다. ‘오늘은 나가지 말라’는 아내의 청을 뿌리치고 기어이 나간 오늘, 유난히 운수가 좋은 날이었던 덕분이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온 그는, 아내가 이미 숨을 거두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설렁탕을 사다 놓았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왜 먹지를 못하니…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

  1920년대 척박한 민중의 삶을 현실적으로 그린 소설,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의 마지막 문장은 영화 <말모이>(2018)에서 한글을 막 뗀 주인공이 눈물 콧물을 쏟아내며 소리 내어 읽는 장면에 소환됐다. 그 장면을 보면서 문득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김첨지가 사 온 설렁탕에도 국수가 들어있었나?

탕에 들어간 국수의 ‘사연’
설렁탕에 소면이, 육개장과 갈비탕에는 당면이 들어간다. 처음부터 국수가 이들과 함께 세팅되었을까. 설렁탕에 대한 역사적 문헌에서 국수를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보아, 처음부터는 아니고 과거의 어느 순간부터였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우연히 쌀의 사회사에 관한 책을 읽다가 1960년대 박정희 체제의 혼분식 장려정책에서 그 맥락을 찾을 수 있었다.
  식량이 턱없이 부족했던 시절, 식량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책은 주식인 쌀의 생산을 늘리는 증산정책과 쌀의 소비를 줄이는 ‘혼분식 장려정책’, 두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1962년 신문 보도를 보면, 국가가 개인의 일상생활을 이렇게까지 ‘체계적’으로 규제하다니, 하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면, 일반 가정에서는 이틀에 한 번은 밀가루 음식을 먹고, 음식점에서는 2할 이상의 잡곡을 섞게 했다.(1962. 12. 29. 조선일보) 이후 1966년에는 쌀로 술을 빚는 것을 전면금지했고, 1969년에는 매주 수요일, 토요일을 ‘무미일無米日’로 지정해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 쌀로 만든 음식을 팔지 못하게 했다.(김태호, 근현대 한국 쌀의 사회사, 들녘, 2017)
  설렁탕과 ‘국수’의 만남도 이 과정에서 생겨났다. 1964년 8월부터 음식점에서 파는 육개장, 설렁탕 등에 쌀을 절반으로 줄이고 나머지 절반을 잡곡, 국수를 혼합 조리하도록 한 것이다. 쌀 자급이 달성되고 규제가 풀린지 한참 지난 지금, 설렁탕에서 잡곡밥은 사라졌고 국수는 남았다. ‘밀’의 변화무쌍한 경쟁력과 친화력 때문이 아니었을까.

2019년 우리나라 식량자급률은 45.8%로, 10년 전보다 10% 이상 하락했다.
2019년 우리나라 식량자급률은 45.8%로, 10년 전보다 10% 이상 하락했다.

식량자급, 이루었는가
세상이 변했다. 지금은 쌀이 ‘남아돈다’. 정부는 논 면적을 줄이고 쌀 소비를 촉진하기 위해 다양한 가공품을 만들어내라고 농민들을 독려한다. 학교에서 도시락 혼식 검사를 받았던 기억이 있는 나조차도, 쌀을 적게 먹기 위해 과거 국가가 펼쳤던 정책은 ‘설마 그랬을까’라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현실감이 없다.
  1970년에 86%에 육박하던 우리나라 식량자급률은 45.8%(2019년, 사료 제외). 지난 10년 새 10% 이상 하락했지만 쌀이 남아도는 이유는 수입 밀의 영향이 크다. 과거 국가의 ‘근대화 프로젝트’ 속에서 ‘선진국’의 이미지를 지닌 서구적 삶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한 밀은 국수나 빵, 과자 등 다양한 형태로 소비되면서 보리를 제치고 제2의 주곡 자리를 차지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국산 밀 자급률은 1%가 채 되지 않는다. 1955년 밀 자급률은 70%에 달했지만, 식량 원조로 시작된 미국산 밀의 대규모 수입으로 국내 밀 생산 기반이 무너졌다.

식량 원조로 시작된 미국산 밀의 대규모 수입으로 국내 밀 생산 기반이 무너졌다. 사진은 전남 구례군 최성호 씨의 밀밭.
식량 원조로 시작된 미국산 밀의 대규모 수입으로 국내 밀 생산 기반이 무너졌다. 사진은 전남 구례군 최성호 씨의 밀밭.

  전남 구례군에서 우리밀 살리기 운동을 추진했던 최성호 씨는 2011년 인터뷰에서 우리밀이 사라지는 과정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1984년 정부 밀수매가 중단되면서 밀을 포기하는 농가가 더욱 많았죠. 국산 밀가루 값의 6분의 1도 안되는 수입 밀가루가 해마다 수백만 톤씩 밀어닥치니까 7년 후엔 농민들이 파종조차 하지 못했어요.”
  국산 밀 자급률 1%는 소멸 직전의 흔적이 아니라, 1990년대 우리밀 살리기 운동을 펼쳐 만들어낸 기적이었던 것. 밀 자급률을 끌어올리기 위해 생산뿐 아니라 품종이며 제분, 가공 등 다각적인 노력의 결과였다. 그가 “농업의 목표는 자급이며, 수입 농산물을 들여오면 당장 저렴한 가격에 먹거리를 얻을 수 있지만 우리의 식량주권은 위협받을 것”이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그 후 9년이 지났지만 국산 밀 자급률은 2019년 기준 0.7%다.

농민과 소비자가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연대하는 새로운 식량 자급 운동이 필요하다. 사진은 언니네텃밭 경북 상주 봉강공동체 꾸러미 작업.
농민과 소비자가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연대하는 새로운 식량 자급 운동이 필요하다. 사진은 언니네텃밭 경북 상주 봉강공동체 꾸러미 작업.

새로운 시대, 식량자급과 식량주권
하늘길이 닫히고 나라마다 빗장을 걸어 잠그는 시대에 식량자급률 50% 미만, 사료를 포함한 곡물 자급률 21%, 밀 자급률 0.7%라는 형편없는 성적표를 받아든 우리가 할 일은 국가의 규제가 아닌, 농민과 소비자가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연대하는 새로운 식량 자급 운동이다.
  소농과 가족농을 위한 국제농민연대조직 비아캄페시나 조정위원 김정열 씨는 말한다.
  “전 세계 사람이 먹는 먹거리의 70%를 소농이 생산해요. 초국적 기업들은 30%를 생산하면서 전체 에너지의 70%를 소비하고 또 먹거리를 독점합니다. 기후위기, 생태위기에서 소농의 생산 방식은 우리의 식량주권을 지키는 중요한 일입니다.”
  국가를 넘어 거대한 초국적 기업이 전 세계의 먹거리를 점령하고 있는 상황에 닥친 코로나19 시대는 새로운 ‘전환’을 생각하게 한다. 이는, 과학기술 접목으로 쉽고 편하게 농업소득을 올려준다는 ‘스마트팜’에 대한 선망과 전폭적 지원이 아니라, 봄 냉해와 여름 장마, 가을 태풍을 다 겪고 기어이, 건강한 먹거리를 생산하고 농촌 공동체를 지켜낸, 소농에 대한 경의와 존중이다.

신수경 편집장

※ 참고문헌: 김철규, 2018, 『사회학의 눈으로 본 먹거리』, 따비
김태호, 2017, 『근현대 한국 쌀의 사회사』, 들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