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농촌을 위한 새로운 농정

2015년 마지막 남은 쌀 시장이 관세화를 통해 개방됨으로써 우리의 농산물 시장은 완전 개방이 됐다. 이는 한국 농민들이 품목별로 전 세계에서 가장 경쟁력이 높은 농민들과 경쟁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1995년 WTO 체제 출범 이후 역대 정권은 우리 농업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러나 설계주의에 의한 숫자 채우기식의 농업정책은 실패했고, 농업의 미래는 암울하다. 특히 박근혜 정부의 지난 4년은 우리 농업에 있어 최악의 시기였다. 무성의하고 초라했던 대통령 후보 공약처럼 농업에 대한 애정이나 관심은 찾아볼 수 없었다. 농업예산은 축소되고, 6차산업화와 창조농업 등 거창한 구호는 속 빈 강정에 지나지 않았다. 농정의 결과는 농가소득으로 나타난다. 우리 농민들은 아무리 열심히 농사지어도 월평균 90만 원에도 미치지 못하는 농업소득에 좌절하고 있다. 도시근로자 가계소득의 60%에도 미치지 못하는 농가소득이 2025년 40% 수준으로 하락할 것이라고 농촌경제연구원은 예측하고 있다. 

시장개방과 농업예산 감축은 한국 농업의 무장해제를 의미한다. 물론 가장 효율적인 소수의 대규모 농가는 살아남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절대 바람직한 농업상이 될 수 없다. 농업을 보호하고 유지하는 것은 농업이 생산하는, 그러나 시장에서 보상받지 못하는 다원적 기능을 지속적으로 제공받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식량안보와 지역의 균형적 발전, 도시민들을 위한 휴식 공간 제공 등이 그것이다. 이와 함께 농촌과 농업은 경기침체기에 고용을 제공하고 갈등을 흡수하는 국민경제의 완충지대가 된다. 오늘날 각국의 주요 수출상품인 전통문화는 활기차고 생명력이 넘치는 농촌이 있어야 가능하다. 이러한 다원적 기능은 소수의 대규모 농가로 구성된 농촌이 아니라, 다수의 다양한 형태와 규모의 농가로 구성된 건강한 농촌으로부터 가능하다. 농업은 이러한 농촌을 위한 기반산업으로서 기능해야 한다.

농업정책과 농업보조는 선심성의 시혜가 아니라 농업이 생산하는 다원적 기능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며, 경제적 불안정과 사회적 갈등에 대한 안전망을 제공하는 국가존립의 기반이라는 인식 하에서 접근해야 한다. 세계에서 가장 빨리 고령화가 진행되는 한국 농업은 머지않아 저절로 구조조정이 이루어질 것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구조조정을 밀어붙일 것이 아니라, 오히려 농업이 연착륙하고 농촌이 지속적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농정을 디자인해야 한다.

이제 얼마 후면 새로운 정권이 들어선다. 농업을 회생시키기 위한 새 정부의 과제는 매우 막중하고도 지난해 보인다.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는 농업, 농촌을 위한 새로운 농정의 틀을 마련하는 것이다. 50년, 100년 후 통일 한국의 식량문제와 지속 가능한 농업의 미래를 위한 중장기 마스터플랜이 필요하다. 오늘날의 농정은 과거 20년간 WTO나 FTA 시장개방을 할 때마다 땜질식, 임시방편 식으로 덧칠하고 꿰매 합리성과 일관성이 부족하다. 이런 농정으로는 벼랑 끝에 놓인 우리 농업, 농촌을 회생시킬 수 없다. 이를 위해 최근 논의되고 있는 헌법 개정에 농업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지속 가능한 농업을 위한 국가적 노력을 명시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독일이나 스위스 등 선진국은 농업이 국가경영의 기초라는 철학을 헌법에 명문화하고 있다. 한국이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농업과 농촌이라는 기초자산을 잘 유지해야 함을 헌법정신에 담아야 한다.

농정의 마스터플랜은 농업의 다원적 기능을 최대화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이를 위해 농촌정책이 농정의 최상위에 위치해야 할 것이다. 농정은 궁극적으로 농촌을 어떻게 유지, 발전시킬 것인가에 맞춰야 하고, 소득정책이나 농업정책은 이를 위한 실천 정책이 돼야 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사람이 사는 농촌이라는 인식이 국정기조에 반영되는 것이 필요하다.

 

45-2※필자 양승룡: 고려대학교 식품자원경제학과 교수. 농산물 유통 및 가격분석, 쌀 산업과 식량안보, 농산물 무역 등 농업·농촌 발전을 위한 주요 현안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양승룡 교수의 희망농업 콘서트」(2016, 책넝쿨)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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