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월급제 또는 농민 기본소득제 이야기가 제법 무성하다. 이런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것뿐이 아니라 얘기의 갈래가 다양해지고 쟁점들이 더욱 선명하게 간추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기본소득제’라는 주제로 계간지 <진보평론>과 격 월간지 <녹색평론>에서 거론하였는 데 4~5년 사이에 몇몇 연구소에서 이를 토론 주제로 삼기도 하고 농업 매체의 칼럼난에 등장하기도 했다. 이것이 초기에는 가물에 콩 나듯 했는데 이제는 농업 관련 매체에 외국 사례까지 언급되더니 <귀농통문>이라는 전국귀농운동본부가 발행하는 잡지에서는 상당한 지면을 할애해 특집으로 다루기도 했다.
비록 원외 소수 정당이긴 해도 녹색당의 기본소득제 논의는 참 끈덕지다. 작년에는 아예 기본소득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올 대의원대회에서 기본소득제를 당론으로 확정했다. 이런 추세라면 큰 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에서 거론할 날도 머지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사회 의제들은 이런 과정을 거쳐 입법화되어 왔다. 생협 관련법이 그랬고 유기농 관련법도 그랬다. 최근의 협동조합 기본법은 물론이고 귀농 관련법도 다 그랬다. 시민사회에서 먼저 문제를 제기하고 크고 작은 실천들이 이루어지면서 점차 사회화되어 끝내 입법으로까지 연결되었다.
왜 농민에게 조건 없이 월급을 주자고 하는가?
이는 기본소득제의 여러 쟁점 중에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아무 조건 없이 모든 농민에게 일괄적 으로 생활이 가능한 수준의 월급을 지급하자는 주장에 대해서는 논자들 사이에는 이론이 없어 보인다. 그 주장을 하나하나 소개 할 수도 있지만, 곁가지들을 쳐내고 한 마디로 간추리자면 이렇게 설명할 수 있겠다.
우리나라의 곡물 자급도가 겨우 23% 안팎인데 이게 어느 정도냐 하면 인민들이 굶주린다는 북한의 곡물 생산 총량보다도 적은 수량이다. 2012년 기준으로 남한은 456만 톤을 생산한 데 반해 북한의 곡물 생산량은 467만 톤이다. 남한보다 11만 톤을 더 생산했다. 작년의 경우 그 격차가 더 벌어졌을 것으로 추산된다. 유엔 식량 기구와 유엔 세계식량계획에서 밝힌 통계수치다.
만약에 농사를 포기하고 467만 톤의 곡물을 사들인다면 어떻게 되나. 국제 시세에 따라 계산해보면 2조 원이 채 안 된다. 2조 원만 있으면 농사 안 지어도 될까? 농 사를 돈벌이 산업으로 바라보면 이런 계산놀음을 할 수 있겠으나 이는 현실을 모 르고 하는 소리다. 이른바 농업의 다원적 가치에 무지할 때 하는 소리다.
이런 현실의 저변에는 경쟁력이 없는 농업을 포기하고 부가가치가 높은 다른 산업에 집중하는 대신 식량은 수입해 먹는다는 남한 정부의 계산이 깔려있다. 역설적으로, 농민 기본소득제의 근거는 이 부분에 뿌리를 둔다.
만약에 농사를 포기하고 467만 톤의 곡물을 사들인다면 어떻게 되겠냐는 것이다. 국제 시세에 따라 계산해보면 2조 원이 채 안 된다. 2조 원만 있으면 농사 안 지어도 될까? 전혀 그렇지 않다. 농사를 돈벌이 산업으로 바라보면 이런 계산놀음을 할 수 있겠으나 이는 현실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이른바 농업의 다원적 가치에 무지할 때 하는 소리다. 농사지어 얻는 수자원 보존 효과라든가 가뭄이나 장마 피해 방지 효과, 토양유실 방지 또는 자연경관 조성 효과 등이 수십조 원이 되는 것으로 추산한다. 우리나라가 식량을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농사를 멈추는 순간 큰 재앙을 맞게 된다.
농업 자체는 재벌기업들이 벌이는 사회 공익사업들보다 훨씬 가치가 높은데도 그동안 농민의 희생을 강요해 온 우리 사회가 ‘사회배당’ 차원에서 농민월급제를 실시하자는 것이 첫 번째 근거라면 두번째, 세 번째 근거는 농업과 농촌을 살리면서 농촌인구를 늘리는 동시에 도시 과밀 인구 분산효과라든가 식량자급률의 상승기대 등이다.
농민 기본소득제를 기회로 정의롭지 못하고 초과 약탈이 보장되던 금융소득 세제도 뜯어고치고 불로소득에 대한 정당한 과세를 강화하자는 것도 농민 기본소득제의 정당성을 구성하는 주장들이다.
농민월급제가 시행되면
농민들에게 아무 조건 없이 1인당 월 150만 원을 지급한다고 해 보자. 우리 사회에 아주 혁명적인 변화가 올 것이다. 이런 상상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상상 자체가 불가능할 수도 있다. 모든 현실은 상상에서 시작된다. 꿈같은 상상이 현실화되어 온 것이 문명의 역사다. 논리적 타당함과 역사적 정당성이 있으면 상상은 시작할 수 있다. 여기에 세계사적 보편성까지 있다면 말이다. 유럽은 물론이고 미국이나 인도, 브라질, 필리핀도 농민 기본소득 개념의 제도를 시범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 시행하고 있다니 우리의 상상이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다.
가장 큰 변화는 농업의 다원적 기능이 발휘되는 방식의 농법 즉, 유기재배로 대대적인 인구이동이 생겨날 것이다. 농지제도도 바뀌어야 할 것이고 자경농 비율도 높여야 할 것이다. 도시의 반 실업 상태 청년들이 농촌으로 시선을 돌릴 것이다. 전체 인구의 7% 남짓한 우리 농업인구가 점차 늘 것은 자명한 이치다. 수도권 중심성이 약해지고 지역의 중요도가 높아질 것이다.
농민들이 농업법인을 만들려고 컨설팅 업체에 쓸데없이 정부지원금을 갖다 바치는 일도 사라질 것이다. 갈수록 사막화되던 토양도 회복되기 시작할 것이고 농업관료들의 상전 노릇도 끝난다. 선거 때만 주권자고 4년 내내 귀찮은 민원인 내지는 청구서를든 ‘을’의 지위를 면치 못하던 농민들이 소신껏 농사를 지을 수 있지 않겠는가.
실제 농민들 사이에서는 아직 농민월급제 논의가 활발하지 않다. 농민 단체들조차 자유무역협정 피해보전이나 기초농산물 국가수매제, 식량자급률 목표제는 내세우면서도 농민 기본소득제를 아직 요구하고 있지 못한 실정이다. 그런데도 이 논의가 탄력을 받아 더 확산하리라 예상하는 것은 이 길 외에 다른 선택이 없다고 보여서다. 이 길 외에 다른 선택이 없다고 하니 억지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필자의 일방적 주장이 아니다.
새로운 경제사회 시스템은 필연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흐름의 논의는 역사가 깊다. 18세기부터 있었다. 이른바 노동과 소득의 분리 사상이다. 노동한 만큼 소득을 보장하는 것은 매우 야만적인 신자유주의 흐름에 불과하고 보다 인본적인 철학사상가들은 소득의 보장은 노동의 질이나 양과 무관하게 설정하였었다.
컬럼비아대학교 객원교수였던 칼 폴라니를 필두로 『21세기 자본』의 토마스 피케티를 비롯하여 최근 『신성한 경제학의 시대』를 쓴 아이젠스타인 등의 경제·문명 이론가들이 이구동성으로 실물경제에 기생하는 금융자본 중심의 신자유주의 경제는 양극화의 심화와 거품경제의 증폭으로 폭발점을 향해 가고 있다면서 새로운 시스템을 시급히 구축해야 한다고 경고하고 있다. 한창 진행 중인 그리스의 위기가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상호 착취는 물론이고 급기야는 자기착취를 강화하는 이 체제를 넘어서고자 하는 것이 기본소득제의 취지다. 공짜로 돈을 받아 편하게 사는 제도로 농민 기본 소득제를 이해한다면 이 제도는 실패할 것이다. 인간의 존엄을 높이고 협동과 봉사, 헌신과 나눔, 자급과 자립, 순환의 공동체 등 새로운 문명가치를 일구어 가는 과정에 기본소득제가 있음으로써 자발적인 노동, 창조적인 삶이 전일화하는 사회 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한살림’에서 출간된 『자본주의를 넘어』(2014)의 저자는 ‘프라우트 경제체제’를 제시하면서 지금의 주류 경제 시스템은 2008년의 경제위기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라서 필연적으로 굉음을 내며 무너질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했다고 진단한다. 또한 농업 분야에 종사하는 인구비율이 20% 이상을 유지해야 할 필요성을 여러모로 분석하고 있다. 농업인구 20% 이상이라면 거대한 혁명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에도 ‘기본소득 지구 네트워크’ 한국 지부 형태의 ‘기본소득 한국 네트워크’가 세계에서 17번째로 설립되었고 농민과 학자, 중간지원조직이 모여 연구와 논의의 수준을 높여가면서 기본소득의제를 사회화하고 있다. 민주노총 산하의 정책연구원은 한국형 기본소득 모델을 2009년에 완성하기도 했다.
기본소득론자들의 한결같은 주장은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소득편차가 이토록 극단화된 상태는 결코 바람직하지도 않으며 지속 가능하지도 않다고 본다. 그래서 대안적 방안의 하나로 기본소득제를 주창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농민 기본소득제는 단순한 농민 복지 논의가 아니라 현대 문명의 위기를 극복하는 거대 담론의 주요 부분이다.
‘돈 벌이 노동 사회’에서 ‘필요노동 사회’로
지난 6월 19일 서강대에서 열린 <2015년 기본소득 국제학술대회>에서 이재명 성남시장은 ‘청년 배당’ 개념을 도입하여 청년을 대상으로 기본소득제를 제한적으로나마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현금보다는 현물이나 지역화폐(상품권)를 제공하여 지역상권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겠다고 덧붙였다. 성남시는 우리나라 최초의 기본소득 도입 지방정부가 되는 셈이다. 앞으로 대상 청년의 규모나 지급 수준은 물론 전달 방식과 평가 기준 등이 주목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농민 기본소득제도 농촌 지역 지자체에서 제한적인 대상을 시한을 정해 시범적으로 시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을연구소 정기석 소장은 ‘청년 공익 영농 요원제’를 주장했다. 청년 농부에게 월 150만 원씩 지급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일본에서 2년 전부터 총 130억 엔(약 1,186억 원)의 예산을 투입하여 매년 1만 명 수준인 신규 취농자수를 2만 명 수준으로 늘리며, 예산도 점차 확대해 나가려는 것과 같다. 45세 미만인 사람이 귀농하면 웬만한 도시 근로자 연봉과 맞먹는 연간 150만 엔(약 1,375만 원)씩 7년간 모두 1050만 엔(약 9,586만 원)을 지급하는 방식이다. 정기석 소장은 하위30%의 영세농에게 ‘영세농 기초생활보장제’와 함께 고령농에게 ‘고령농 기초생활보장제’를 실시하자는 주장도 한다. 시범사업에서는 정밀한 분석수단을 갖추고 모든 농민에게 일괄적으로 조건 없이 기본소득을 지급해 간다는 방침을 유지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농민 기본소득제를 하는 것이 우리가 어떤 사회에 사는 인간형이고자 하는 가를 바로 아는 것이라 하겠다. 상호 착취는 물론이고 급기야는 자기착취를 강화하는 이 체제를 넘어서고자 하는 것이 기본소득제의 취지다. 공짜로 돈을 받아 편하게 사는 제도로 농민 기본소득제를 이해한다면 이 제도는 실패할 것이다.
인간의 존엄을 높이고 협동과 봉사, 헌신과 나눔, 자급과 자립, 순환의 공동체 등 새로운 문명가치를 일구어 가는 과정에 기본소득제가 있음으로써 자발적인 노동, 창조적인 삶이 전일화하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아무리 제도가 좋아도 그 제도의 운영주체이자 향유자인 사람의 의식과 도덕적 수준이 따르지 못하면 어느 한쪽이 붕괴하는 사례는 역사에 무수하다. 농민 기본소득제 논의 과정에서 돈의 가치보다 삶의 가치가 존중되는 농민집단이 등장해야 할 것이다. 농민 기본소득제 논의를 주도하고 실현해 내는 주체가 농민이어야 한다. 뒷전에 앉아서 불로소득처럼 기본소득을 챙기는 농민이어서는 이 제도의 취지와 부합하지 않는다. 위대한 자연의 상속자로서 농민은 건강한 밥상을 차리는 담당자여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기본소득 농민 네트워크’를 만들어 대응하는 것이 바람직하겠다. 이 기본소득제 운동은 한국사회 내부에 계급 간, 계층 간, 세대 간, 지역 간, 성별 간에 견고하게 형성되어 있는 다양한 층위의 내부 식민지를 해방하는 투쟁이기 때문이다. 기본소득 도입은 ‘돈벌이 노동 사회’ 를 ‘필요노동 사회’로 바꾸어 가는 지렛대가 될 것이다.
※필자 전희식: 농부. 귀농하여 자연 재배 농사를 짓고 있다. 전국귀농운동본부와 정농회에서 활동했다. 저서에 『똥꽃』(2008, 그물코), 『땅살림 시골살이』(2011, 삶이보이는창), 『시골집 고쳐살기』(2011, 들녘), 『아름다운 후퇴』 (2012, 자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