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대 전 한겨레신문사 대표이사
유난히 따뜻했던 12월 초, 제주는 감귤 천지였다.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헐렁한 플리스Fleece 점퍼를 걸치고 챙이 있는 모자를 눌러쓴 김현대 씨를 만났다. 전지가위를 들고 동네 밭 이곳저곳을 다니며 감귤을 따서 맛을 보여주었다. 남의 밭인데, 이래도 되냐고 물었더니, “다 내 작업장”이라며 사람 좋게 웃었다.
2023년 2월, 한겨레신문사 대표이사직을 내려놓은 바로 다음 날, 그는 이곳으로 왔다. 한겨레신문 창간 전인 1987년 입사해 기자로 살았던 36년 시간에 마침표를 찍고, 가시리 주민으로 인생 제2막을 연 것이다.
봄에서 여름, 가을, 지금 겨울까지 마을의 여러 귤밭에서 농사일을 거들고 배웠다. 시커먼 피부에 흙먼지 묻은 옷차림이니, 처음 보는 사람은 그가 오래된 농사꾼인 줄 안다. 밀감을 딸 때가 되자 귤을 보낼 사람을 떠올리고 노트북에 정리했다. 150여 개가 금방 차고, 귤 받은 이들이 추가 주문을 보내오면서 300개를 훌쩍 넘어섰다.
“살면서 고마웠던 사람들 이름을 하나하나 적었더니 그렇게 되던데요. 초보 농부 첫해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어요. 제가 일했던 밭에서는 일당 안 받은 대신 마음껏 감귤 따고 있고요, 이웃 할머니 밭 무농약 감귤을 주로 택배로 보내는 데는 약간의 값을 치르고 있죠.”
경사진 돌밭에서의 일 년이 고스란히 담긴 귤은 전국으로, 소식을 달고 퍼졌다.
협동조합으로 탄생한 오시리가름 주택협동조합
김현대 씨는 협동조합으로 지은 공동주택단지에 산다. 약 7300㎡ 규모 16가구가 사는 열여섯 채의 아담한 가정집들이 길을 사이에 두고 가지런히 모여 있고, 입주민이 함께 회의도 하고 손님도 맞이하는 커뮤니티센터와 16가구가 각각 100권 이상 기증해 모아놓은 도서관도 있다.
2014년 대학동아리 사람들 몇 명이 의기투합했고 그 인연으로 하나둘 늘어 열여섯 명이 되었다. 1년여의 준비 끝에 2015년부터 집을 짓기 시작해 2016년 ‘제주 오시리가름 협동조합주택’으로 완성됐다.
“사람들을 모을 때, 그때가 가장 즐거웠어요. 매주 토요일 오후 5시에 모였는데 거의 100% 출석이고, 회의하고 저녁 먹고 맥주 한잔 기울이면 10시, 11시가 훌쩍 갔어요. 꿈을 꿀 때 가장 좋았고, 살면서는 미운 정 고운 정 들고….(웃음)”
‘무한 긍정’ 가시리 주민이 되다
점심 먹으러 들른 식당 주인은 다가와 반갑게 인사하고 안부를 묻는다. 이동 중에 밭에, 길가에 사람이 보이면 차를 멈추고 인사하고 참견도 한다. 아주 괜찮은 주치의 선생을 사귀어놓았다는 자랑이 늘어지기도 한다.
“우리 가시리, 우리 가시리 그렇게 말버릇이 들었어요. 내 삶터가 내 고향이다, 생각하죠. 마을도 사람도 본마음으로 대할 수 있어서 참 좋아요.”
그는 도시에서 살다가 시골 마을에 안착하기 위해서는 다름을 인정하고, 지역 안으로 나를 더 적극적으로 들여놓는 것이라고 본다.
“어떻게 보면 전혀 다른 세상에 온 거예요. 이민 온 것처럼, 그럼 내가 맞춰야지. 내가 있던 곳과 비교하면 불편하고 안 좋은 것도 있겠죠. 그런데 재미있게 보면 또 참 재미있어요.”
그런 마음으로 주민에게 먼저 다가가고 거칠고 힘든 일을 적극적으로 거들고, 마을 일을 살피며 빠르게 지역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중이라 했다.
“시골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해요. 가족처럼 친한 이웃이 여럿 생겼고 서울보다 술도 더 마시는데 건강은 훨씬 좋아졌어요. 올 한 해 부지런히 감귤 농사‘맛’을 봤죠. 이 집 저 집, 일손 필요하다고 하면 곧바로 달려갔죠. 가장 힘들다는 한여름 땡볕에 농약도 쳐보고, 밀감 딸 때는 20kg 컨테이너 상자 나르는 일도 했어요. 이제는 일당 15만 원 일꾼으로 거뜬히 인정받아요. 평생 머리와 입으로 살다가 몸으로 일을 하니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어요.”
넘치는 친화력 덕분인지, 원주민이 아니면 잘 안 끼워준다는 탁구동아리에 들어 매일 저녁때면 회원들과 탁구를 한다. 목공동아리 고수에게 배워 수납함도 직접 만들었다.
“무한 긍정의 마음으로 살고 있어요. 제주라는 특수성이 있지만, 직접 살면서 일해보니까 농촌에 희망이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어렵고 힘들다는 생각은 접어두고, 한 발짝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찾으려고 해요. 어떻게 작은 돌 하나 더 놓을 수 있을까 생각하고, 거기서 재미와 보람을 느껴요. 가시리 농부로 생계를 꾸리면서 10년, 20년 죽 살아갈 수 있겠다는 자신이 조금은 든다고 할까요. 그럴 때 마음이 아주 편안해져요.”
일간지 최초 농업전문기자에서 농부로
김현대 씨는 2010년부터 농업전문기자로 활동했다. 당시 일간지로서는 ‘농업 전문’이라는 타이틀을 지닌 기자는 흔치 않았다. 그는 마을과 농업, 사회적 경제, 협동조합 영역을 연계하고 확장하면서 ‘생산성’을 만들며 활발하게 활동했다. 2011년 농업, 농촌을 취재하는 후배 기자들과 함께 ‘농업기자포럼’을 만들기도 했다.
“농업에서 출발해서 농업 문제를 꾸준히 취재하는 기자들의 비빌 언덕이 돼 보자고 했던 거지요. 농업을 전문적으로 취재하는 선배가 없으니, 젊은 기자들이 ‘농업 기자’에 도전해볼 마음조차 내보지 못하는 게 현실이었죠. 1년에 1명씩, 5년간 농업 기자 5명을 만들면 대한민국 농업정책을 바꿀 수 있다는 당찬 목표를 내걸었어요. 잘되지는 않았죠.”
그래도 최근 ‘농업전문기자’ 명함을 내미는 기자들이 늘었다. 이러한 언론인들이 현장 깊숙이 들어가 농민의 목소리를 ‘사실대로’ 전하고, 농업정책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고 믿는다. 김현대 씨가 자신의 인생 제2막에 ‘농’을 담은 이유이기도 하다.
“농업전문기자로서 농에 대해 말할 때 잘 몰라서 조심스러운 부분도 있었어요. 농사짓자, 생각했던 것도 출발점은 그런 것이죠. 제대로 알고 이야기를 해야겠다. 작은 거라도 진짜 농민들한테 보탬이 되는 일을 해야겠다는 마음이에요.”
“작은 염원을 모아 나가면 때가 온다”
우리 시대 언론은 어때야 할까, 질문하자 그의 표정에 복잡함이 스쳤다.
“정답은 쉽고 간단해요. 신뢰의 문제지요. 진보냐 보수냐 같은 단순 이분법으로 세상을 갈라치기하는 데서 어느 언론도 자유롭지 못하고 오히려 그런 병폐가 더 깊어지고 있어요.”
그는 “저널리즘의 기본원칙을 제대로 실천하는 것이 지금 언론의 역할이자 책임”이라고 강조했다.
“염원을 모아라, 예전에 정태기 전 한겨레신문 사장님이 하신 말씀인데, 이 말이 바르다고 봐요, 1980~1990년대에는 어떤 권력에도 굴하지 않는 정직하고 용감한 언론을 갈구했고, 그 염원이 모여 한겨레신문이 창간됐죠. 지금 사람들은 나와 생각이 달라도 신뢰할 수 있는 언론의 탄생을 간절히 바라고 있어요. 시간이 걸리고 목소리 큰 독자들에게 욕을 먹더라도, 오로지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을 보고 염원을 모아 나갔으면 합니다.”
이 밭 저 밭을 오고 가던 중에 그가 기다리던 소식이 들렸다. 올해 농사를 도왔던 밀감밭 800평을 내년에 임차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연임대료가 60만 원이란다. 걱정도 있지만 기대가 더 크다.
“마을 농민과 도와가며 농사짓고, 판매를 의논하고. 그러다가 사람을 더 모아서 브랜드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혼자서 막연한 궁리도 해보는데요, 이런 것이 협동조합의 출발점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는 거죠.”
차근차근 모으는 작은 염원에 하나가 더 붙었다. 그 ‘때’가 한걸음쯤 더 다가온 듯하다.
글·사진 신수경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