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초콜릿의 씁쓸한 역사

주영하

  불행한 전쟁인 1950년 6·25 때의 일이다. 한국을 돕기 위해 왔던 유엔군을 보면 어린아이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기브미 초콜릿”을 외쳤다. 지금이야 돈만 있으면 쉽게 살 수 있는 초콜릿이지만, 당시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초콜릿은 선진국을 상징하는 식품이었다.

어린아이가 “기브미 초콜릿”을 외치는 모습을 담은 영화  스틸컷. ⓒCJ ENM
어린아이가 “기브미 초콜릿”을 외치는 모습을 담은 영화 <국제시장> 스틸컷. ⓒCJ ENM

아메리카 열대 지역의 보물, 카카오
  초콜릿은 카카오(Cacao) 열매를 볶은 가루와 밀크·버터·설탕·향료 등이 있어야 만들 수 있다. 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재료인 카카오 열매는 아메리카 열대 지역이 원산지다. 모양은 긴 타원형이고, 길이는 약 10cm다. 열매가 노란색을 띠면 익은 것인데, 딱딱한 결을 따라 자르면 카카오 콩(Cacao Bean)이 나온다. 이것을 나무로 만든 통에 넣고 며칠 동안 발효시키면, 붉은빛을 띤 갈색으로 변하면서 향기가 난다. 이때 물에 씻어서 말린 후 볶아서 분쇄하면, 초콜릿의 주재료인 카카오 가루가 완성된다.
  카카오는 기원전 2000년경부터 중앙아메리카와 멕시코 남부 지역에서 재배되었다. 당시 이 일대에는 ‘미스테카(Mixteca)’라는 왕국이 번성해 있었다. 13세기에 들어서 멕시코 북부로부터 이동해 온 아즈텍족(Aztecan)이 아즈텍 문명을 건설하였는데, 이들은 옥수수를 주식으로 하면서 카카오 가루에 옥수숫가루나 고춧가루를 물에 녹여 음료로 만들어 약처럼 마셨다. 카카오 음료를 ‘카카우아 아틀(Cacaua Atl)’이라고 불렀다. 왕이나 귀족 등 지배층이 점유하거나 종교 사제가 의례에서 사용했다. 당시 카카오 열매는 ‘투와(Tuwa)’라고 불렸는데, 다른 뜻으로 ‘돈(Money)’이었다. 그만큼 카카오 열매는 교환이 가능한 가치재(Valuables)였다.
  16세기 초 멕시코 남부로 들어온 유럽인은 카카우아 아틀을 ‘초콜릿’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쓴맛 때문에 마실 엄두를 내지 못했다. 16세기 중반에 니카라과에서 초콜릿 음료를 처음 마셔본 이탈리아인 탐험가 지롤라모 벤조니(Girolamo Benzoni, 1519∼1572?)는 그의 여행기 《신세계의 역사》(La Historia del Mondo Nuovo)에 “초콜릿은 인간이 마실 음료라기보다 돼지에게 더 적합한 것 같다”라면서 “이곳에 1년 넘게 있었지만 그걸 마시고 싶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라고 적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가톨릭 선교사들이 현지인과 교류하면서 초콜릿 음료에 설탕을 넣었고, 유럽인 중에는 이 음료에 중독된 사람들이 생겨났다.
  16세기 후반 무렵, 메소아메리카에 있던 수도원 수사들과 상인들이 스페인으로 귀국하면서 카카오 열매를 들고 갔다. 유럽에 처음 들어온 초콜릿 음료에는 ‘카카우아 아틀’처럼 꿀과 고춧가루가 들어갔다. 하지만 17세기에 스페인에서 이탈리아까지 초콜릿 음료가 퍼지면서 꿀 대신에 설탕이, 고춧가루 대신에 후추나 계핏가루가 들어갔다. 이로써 메소포타미아의 초콜릿 음료가 유럽화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지배층에서 인기 있는 음료로 자리 잡았다.

초콜릿의 주재료, 카카오 열매. 노랗게 익었을 때 딱딱한 결을 따라 자르면 카카오 콩이 나온다
초콜릿의 주재료, 카카오 열매. 노랗게 익었을 때 딱딱한 결을 따라 자르면 카카오 콩이 나온다.

지금의 초콜릿이 발명되기까지
  당시 스페인에서는 카카오 가루에 우유를 붓고 아몬드나 달걀을 넣는 요리법이 성행했는데, 스페인 공주들도 이 음료에 푹 빠졌다. 안 도트리슈(Anne d’Autriche, 1601~1666)는 1615년 루이 13세(Louis XIII, 1601~1643)와 혼인할 때 파리로 초콜릿 음료를 가지고 갔다. 마리아 테레사(Marie Thérèse d’Autriche, 1638~1683)는 1660년 루이 14세(Louis XIV, 1638~1715)와 결혼할 때 초콜릿 음료를 만드는 도구와 마시는 잔, 그리고 요리사까지 대동하여 파리로 갔다.
  프랑스의 왕족과 귀족, 특히 여성들이 초콜릿 음료에 중독되었고, 점차 서유럽의 귀족까지 즐겨 마시는 음료로 자리 잡았다. 그즈음 서유럽 사람들은 초콜릿 음료를 ‘초콜릿 수프(Chocolate Soup)’라고 불렀다. 1657년 영국 런던에서는 초콜릿 수프를 전문으로 판매하는 ‘초콜릿 하우스(Chocolate House)’가 문을 열었다. 이제 초콜릿 수프는 더 이상 아즈텍인의 음료가 아니었다.
초콜릿 하우스의 등장으로 초콜릿 수프가 여성들의 전유물에서 남성들도 즐기는 음료로 바뀌었다. 초콜릿 하우스는 귀족이나 지식인, 중산층 남성들에게 정치와 문화의 토론장이었다. 초콜릿 수프의 대중화는 새로운 형태의 초콜릿이 만들어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689년, 의사이자 영국 박물관(British Museum) 설립자로 알려진 한스 슬론(Hans Sloane, 1660~1753)은 영국의 식민지였던 자메이카에서 현지인들이 카카오 가루에 물을 부어 마시는 것을 보고 새로운 요리법을 개발했다. 바로 우유를 넣어 만든 밀크초콜릿 음료다. 밀크초콜릿 음료는 초콜릿 수프에 비해서 매우 깔끔한 맛을 냈다.
  산업혁명과 과학의 진전은 초콜릿을 음료에서 고형으로 바꾸었다. 1828년 네덜란드 화학자 반 호텐(Van Houten, 1801~1887)은 카카오 콩에서 카카오 가루와 카카오 버터를 분리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초콜릿 수프가 쓴맛을 내면서 우유와 같은 액체를 넣어야만 마실 수 있었다면, 반 호텐이 발명한 초콜릿은 고형이면서 알칼리성 소금을 넣어서 쓴맛이 제거된 상태였다. 코코아 가루 100%로 만들어진 고형 초콜릿이 바로 네덜란드식 초콜릿(Dutch Chocolate)이다.

산업혁명과 과학의 진전은 초콜릿을 음료에서 고형으로 바꾸었다
산업혁명과 과학의 진전은 초콜릿을 음료에서 고형으로 바꾸었다.

전 세계에 퍼진 초콜릿
  반 호텐이 1828년에 이미 네덜란드식 초콜릿을 발명했지만, 그것을 상품화한 사람은 영국에 있었다. 1847년, 영국인 조셉 프라이(Joseph Storrs Fry, 1795~1879)는 잉글랜드 브리스틀(Bristol)에 있는 자신의 공장에서 고형 초콜릿을 만들어 판매하기 시작했다.
  1876년에는 스위스의 양초 장인이었던 다니엘 피터(M. Daniel Peter, 1836~1919)는 하인리히 네슬레(Heinrich Nestle, 1814~1890)가 개발한 분유를 초콜릿에 덮은 밀크초콜릿을 발명했다. 이때부터 초콜릿은 누구나 먹고 싶어 하는 과자가 되었다.
  산업화가 늦었던 이탈리아에서는 주로 레스토랑에서 식사한 후에 내놓는 디저트의 하나로 초콜릿이 소비되었다. 에스프레소 커피·초콜릿·크림 등을 같은 비율로 섞어서 만든 비체린(Bicerin), 음료와 함께 아몬드·헤이즐넛·호두가 섞인 부드러운 맛의 초콜릿 잔두야(Gianduja) 등이 이탈리아에서 개발된 초콜릿 음료다.
  밀크초콜릿은 미국에서 대량 생산의 길을 걸었다. 1893년 시카고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서 초콜릿 제조 기계를 구매한 밀튼 S. 허쉬(Milton S. Hershey, 1857~1945)는 초콜릿 바와 코코아를 생산하여 미국 시장을 석권했다. 허쉬의 대량 생산은 초콜릿을 대중화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래서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군들의 배낭에는 허쉬 초콜릿이 항상 가득했고, 그것으로 현지인들의 환심을 샀다.

유럽인에게 달콤한 맛을 제공했던 초콜릿에는 흑인 노예의 비인간적 노동이 녹아 있었다.
유럽인에게 달콤한 맛을 제공했던 초콜릿에는 흑인 노예의 비인간적 노동이 녹아 있었다.

가나 초콜릿에 녹아 있는 땀과 눈물
  17세기 이후 서유럽에서 초콜릿이 인기를 끌면서 동시에 카카오 열매의 수요가 증가했다. 스페인 상인들은 카카오를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농장을 아메리카 카리브해 연안에 만들려고 했다. 마침 한 곳이 주목받았는데, 마치 베네치아를 닮았다고 하여 이름이 붙여진 베네수엘라다. 하지만 원주민들은 스페인 군대에 의해서 대부분 피살되었기 때문에, 급기야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를 들여왔다.
  흑인 노예의 값싼 노동력으로 카카오 플랜테이션(Plantation)이 만들어졌다. 플랜테이션이란 서유럽의 자본가들이 돈과 기술을 제공하고, 열대 기후 아래에서 힘든 노동에 견딜 수 있는 원주민과 흑인 노예를 값싸게 이용해서 한 가지 작물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기업적인 농업경영 방식을 가리킨다. 1684년에는 베네수엘라에 37만 그루의 카카오 나무가 재배되었다. 그런데 1744년에 500만 그루로 증가했다. 18세기가 되면서 20만 명의 흑인 노예가 카카오 플랜테이션에서 착취당했다. 유럽인에게 달콤한 맛을 제공했던 초콜릿에는 흑인 노예의 비인간적 노동이 녹아 있었다.
  1861년 미국에서는 노예제도 찬반과 지역 갈등이 원인이 되어 남북전쟁(American Civil War)이 일어났다. 이때 일부 카카오 무역업자들은 아프리카의 열대 지역에서 카카오를 생산할 방법을 찾았다. 카카오 나무는 적절한 위도와 온도에만 자라는 까다로운 식물이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적합한 카카오 재배지는 서부 기미만의 가나 아크라 근처인 아크와핀이었다. 이곳에서 서유럽 자본가들과 현지 권력층이 손을 잡고 카카오 재배에 성공했다. 1891년부터 카카오 수출이 이루어진 가나는 1901년 이후 세계 최대의 카카오 생산지가 되었다. 1914년 전 세계에서 유통된 카카오 열매의 반 가까이가 ‘가나산’이었다.
  그런데 서부 아프리카는 풍토병이 심해서 서유럽인이 거주하기에 알맞지 않았다. 서유럽인, 특히 영국인 무역상들은 현지인이 카카오 농장을 직접 운영하도록 하고, 헐값에 카카오 열매를 구매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오로지 카카오만을 생산할 줄 알았지, 판매 방법을 알지 못했던 가나의 농장주들은 영국 무역상들의 무리한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불평등에 항의하여 영국으로부터 독립운동을 펼친 결과, 가나는 1957년 3월 6일 독립 국가가 되었다. 하지만 최근까지도 카카오 농장에서는 25만 명에 이르는 어린아이들이 노예처럼 착취당하면서 카카오 열매를 생산하고 있다.

윤리적 초콜릿 소비 운동
  초콜릿은 태생적으로 어두운 ‘그림자’를 가지고 있었다. 카카오 농장에서 벌어지는 아동 노동은 착취였다. 2000년대 들어와서도 카카오 생산지 중의 한 곳인 아프리카 가나의 농장에서 끊임없이 아동 착취가 자행되고 있다. 심지어 카카오와 초콜릿의 수입 대부분은 다국적 기업의 주머니를 가득 채운다. 그럼에도 생산자 대부분은 자신이 기른 카카오의 가치와 최종 목적지가 어딘지 모른 채 열악한 생산 환경과 값싼 노동력에 신음한다.
  1990년대 중반부터 북미와 서유럽의 일부 소비자 단체는 카카오 농장에서의 착취 노동과 다국적 기업의 수익 탈취를 거부하는 ‘공정무역 카카오(Fair Trade Cocoa)’ 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국내에서도 생활협동조합이 연대한 생협연대가 2008년 2월 밸런타인데이를 앞두고 시작한 ‘윤리적 초콜릿 소비 운동’을 지금도 계속 펼치고 있다.
  초콜릿의 맛은 분명 달콤하다. 하지만 초콜릿의 역사는 여전히 씁쓸하다. “기브미 초콜릿”을 외쳤던 시대는 이미 과거가 되었지만, ‘공정무역 초콜릿’은 생산자의 지속 가능한 소득을 창출하는 통로다. ‘윤리적 초콜릿 소비 운동’은 카카오와 초콜릿을 둘러싸고 있는 비인간적인 생산·유통 구조를 없애는 데 목표를 둔 소비자 운동이다. 이제부터 초콜릿을 구매하기 전에 생산자가 누구이며, 어떤 경로를 거쳐서 내 앞에 왔는지를 확인하자.

주영하필자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민속학 전공 교수
1987년 이후 역사학·문화인류학·민속학의 시선으로 동아시아 음식의 역사와 문화를 문헌조사와 현지조사를 겸해서 연구하고 여러 책을 출판했다. 최근 음식의 사회운동을 주제로 현장의 여러 사람을 만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