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나 오늘날이나

고영

“어느새 몇 오라기 수염은 더 돋았지만(忽然添得數莖鬚)/여섯 자 키는 도무지 더 자라지 않는군(全不加長六尺軀)/거울 속 얼굴은 해마다 달라져도(鏡裡容顔隨歲異)/철부지 같은 마음속은 지난해의 나 그대로(穉心猶自去年吾)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이 스무 살 새해 아침에 써 남긴 시 <원조대경(元朝對鏡, 설날 아침에 거울 앞에서)>을 새삼 들여다본다. 새해를 바라보며 굳이 내 가슴을 내가 콕 찌르자고 읽는다. 사람에게 꼭 필요한 겸손한 한 해 반성을 일깨운다고 하면 이만한 문학 작품도 다시없을 테다. 한편으로는 그때나 지금이나 한가지인, 분주한 데다 사람 한숨 나오게 하는 연말연시의 풍경 또한 돌아보게 된다.

“누가 알랴, 알알이 피땀 어린 곡식임을(誰知粒粒辛苦穀)/꿀벌처럼 모았지만 가는 데는 따로 있지(如蜂釀蜜還屬彼)/몇 섬은 세금 내고 몇 섬은 환곡1) 갚고(幾石供稅幾石糴)/몇 섬은 소작료에 씨나락이 겨우 남고(幾石賭地與籽子)/품삯 주고 빚 갚고 있는데(傭價給來當債報)/공과금에 이자 재촉이라니(庫契場出俱收殺)

  김형수(金逈洙, 19세기)가 <농가십이월속시農家十二月俗詩>에서 읊은 조선 후기 동짓달의 한 풍경이 이렇다. 쓰게 웃는다. 조선 후기 농민도 그랬다. 낼 것, 줄 것 빠져나가고 한 해 회계 마무리는 섣달 안에 마쳐야 한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마음을 놓고 새해를 맞을 수 있다. 온갖 지출과 할부금과 세금과 연말정산 앞에서 가슴 졸이기는 그때나 오늘날이나 한가지다. 사람은 잠깐 체면을 차리다가도 얇아진 지갑을 떠올리는 순간 상욕을 내뱉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내일을 향한 적절한 계획도 세워야 하고, 사람으로서 해 마땅한 걱정 또한 꼭 한 번은 해야 한다. 이때 그래도 연말연시의 시절음식이 있어 오로지 점잖지만도 않고, 오로지 짜증투성이만도 아닌 생활인을 위로한다. 한반도의 역사, 그 공동체의 문화 속에 이어온 음식을 차려 내가 나를 먹이고, 벗과 함께하고, 이웃과 나누며 세밑에서 새해로 건너간다.

1) 환곡: 국가가 보릿고개나 흉년에 사람들에게 곡식을 빌려주었다가, 추수 때나 풍년에 돌려받는 제도.

그믐의 앞뒤, 설과 대보름까지는 소 도축을 엄격히 제한하는 우금령牛禁令을 풀었다.
그믐의 앞뒤, 설과 대보름까지는 소 도축을 엄격히 제한하는 우금령牛禁令을 풀었다.

우금령도 풀리고
  국가도 이때만큼은 태도를 바꾸었다. 그믐의 앞뒤, 설과 대보름까지는 소 도축을 엄격히 제한하는 우금령牛禁令을 풀었다. 한반도 전근대의 소는 다른 무엇보다 농업에 쓰는 일소였다. 먹자고 키워 잡는 고기소가 아니었다. 평소의 도축은 늙은 소, 다쳐 축력을 낼 수 없는 소에 한했다. 하지만 연말연시에는 달랐다. 우금령이 풀리면서 시장에 나온 소고기를 가지고 마음껏 소고기 음식을 해 먹고 소고기 장국 바탕의 떡국도 끓였다. 서울 세시풍속 기록을 많이 남긴 홍석모(洪錫謨, 1781∼1857)는 섣달그믐의 우금령 완화를 ‘서울 사람들이 정초에 고기를 실컷 요리해 먹도록 한’ 조치로 설명했다. 아울러 자신이 쓴 <도하세시기속시都下歲時紀俗詩>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도축해 나온 소고기 시장에 즐비하니(屠漢宰牛爛市場)/설날 전후해 나라가 우금령을 거두어서지(元朝前後禁牌藏)/한번 배불리들 먹어보라고 내린 나라의 은택 덕분에(都民一飽由恩澤)/푸성귀로 곯은 배에 원기가 넘치네(歲肉淋漓療菜腸).” 조선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일가붙이로, 못 먹어본 음식이 없던 홍석모 또한 연말연시에는 다른 무엇보다 소고기가 흥성해서 좋았다, 소고기가 준비됐으면 떡국이다, 라고 말했다. 홍석모는 다시 노래했다. “새해 아침에는 떡국과 강정이 최고(湯餠繭糕擅歲朝).” 박지원과 교유한 서울 출신 문인 유만공(柳晩恭, 1793∼1869) 또한 서울 연말연시의 풍경을 이렇게 노래했다. “소고기 저며 놓고 흰떡도 쌓였으니(黃牛肉割白餈椎)/섣달그믐께 이 한때가 제일 풍성한 한때(歲訖繁華是一時).”

밥과는 전혀 다른 질감이 깃든 국수
밥과는 전혀 다른 질감이 깃든 국수.

전원에서는 전원의 방식으로
  농촌이라고 다르랴. 말이 그렇지 농민이라고 씨나락만을 남기지는 않았다. 그렇게 살 수는 없었다. 천하가 없어도 떡을 안치거나 칠 만큼의 쌀, 차례와 손님맞이를 위해 술 빚을 만큼의 쌀은 결코 양보하지 않았다. 소담한 밥상 치레의 화룡점정이 될 과실과 과자 또한 양보할 수 없었다. 정약용의 둘째 아들 정학유(丁學游, 1786~1855)가 남긴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에 따르면, 농민은 두부 쑬 콩, 국수나 만두 빚는 데 쓸 메밀 등을 섣달부터 찬찬히 준비했다. 소고기 장만이 어렵다면 장에 가 북어라도 사 왔다. 또는 닭고기라도 마련했다. 덫을 놓아 꿩을 잡아 ‘닭 대신 꿩’의 묘를 살리기도 했다. 아이들은 새그물을 쳐 참새를 잡기도 했다. 고기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농민의 멧돼지 사냥은 겨울 농한기에 마침맞다. 한겨울, 눈밭에서 기동성이 떨어진 네발짐승을 노린 사냥은 전근대 온 지구 농촌의 공통이다. 잘하면 안전하게 횡재할 수도 있다. 몰이꾼과 포수의 인기척 또는 화약 냄새 또는 총소리에 놀란 큰 멧돼지는 새끼를 두고 잠깐 숨기도 한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새끼를 줍는 것도 한 방법이다. 새끼돼지고기라면 도축과 발골은 훨씬 손쉽고, 맛과 육질은 훨씬 좋게 마련이다. 이 모든 것이 농민이 논밭을 벗어난 때에 가능한 노릇이다.
  농한기 별미로 국수를 빼놓을 수 없다. 메밀이 있다고 해도 언제 빻아, 반죽해, 내린단 말인가. 반죽할 만큼 가루를 내고, 반죽하고, 분틀에 내리는 모든 과정을 오로지 인력에 의지해 해내던 시절이었다. 그때는 분틀에서 사리 내리는 모습만 보아도 그저 한없이 흐뭇했다. 밥과는 전혀 다른 질감이 깃든 국수는 누구에게나 최고의 별미였다. 이즈음 겨울 짠지, 백김치, 물김치, 갓물김치, 산갓물김치, 동치미 따위에 맛이 든다. 닭고기든 꿩고기든 돼지고기든 육수감, 고명감도 따라온다. 곁에서 메밀 반죽을 밀어 만두를 빚어도 좋다. 마침 두부까지 쑬 만하니 말이다. 이 경험이 오늘날까지 면면한 한국 막국수, 냉면 문화의 한 기원이다. 냉동·냉장 장치가 없던 옛날, 겨울 두부야말로 한 보름, 안심하고 먹을 수 있었다. 너무 바빠도, 너무 더워도 쑤어 보존하기 힘든 두부는, 국수만큼이나 온 가족과 이웃이 힘을 합해야 맛볼 수 있는 먹을거리였다. 게다가 두부는 얼려도 맛있다. 얼면 언 대로 독특한 질감이 깃든다. 예전에는 한겨울 바람 좋은 지붕에 두부를 올려놓고 얼릴 줄을 알았다. 물기가 날아가고 조직이 단단해진 두부는 또 다른 맛의 세계를 연다. 보존 기간도 늘어난다. 그믐과 설 즈음해 쑤어만 두면, 두부는 대보름까지 끄떡없이 차례와 손님맞이와 내 가족 일상의 밥상을 풍성하게 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때를 한결 윤기 있게 보내자고 농민들은 섣달부터 깨강정·콩강정·곶감·대추·밤 따위를 정성스레 준비하곤 했다. 다시 김형수의 <농가십이월속시>를 편다. 정학유와 동시대를 산 김형수도 섣달 즈음 농민의 일상을 이렇게 읊었다.

“먹을거리 이것저것 진작에 준비해야 하느니(飮食諸品須預備)/쌀 몇 말은 떡이요 몇 말은 술이라(餈餻餌酒米幾斗)/콩 삶아 두부요 메밀로는 만두 해야지(煮菽爲乳蕎饅頭)/장에 가 명태 사고 계2) 부어 고기 장만(明魚場買肉契取)/깨강정·콩강정·곶감·대추·밤(荏豆羌飣柿棗栗)/유밀과에 초간장까지 없는 게 없구나(油蜜醬醋靡不有)

  꿀벌처럼 모은 곡식이 내 곳간을 스치고만 지나간다 해도, 농민은 또 서민대중은 내 일상을 이만큼 지키고 가꾸려 애썼다. 사치와 낭비와 과시가 아니라, 나와 내 식구와 내 집 온 손님과 이웃에게 정성을 다하자고 최선을 다했다. 모든 자원이 귀한 시절, 밥 한 사발로 그치지 않는 시절음식은 공동체의 의례와 도리에 잇닿은 사물이었다. 이 시절에 어렵게 마련한 떡·과실·강정·유밀과 등은 양보할 수 없는 일상의 격조와 품위에 잇닿은 먹을거리였다. 아무리 어려워도, 상하귀천이라는 관념이 온 나라를 지배했어도, 사람들은 여기에서 양보가 없었다. 일상에서 차릴 만한 내 체면을 차릴 줄 아는 사람들은 한편으로는 농한기에 교양·교육·문학예술·지식을 향해 달려갔다.

“어린이는 글 읽고 어린아이는 말 배우고(長兒讀書幼學語)/집안 가득한 다듬이소리·글 읽는 소리·갓난아이 우는 소리 듣기 좋구나(三聲室家宜所聽)/어느 마을에 글방 선생이 와 있는가(何村冬烘先生在)/어떤 이는 이야기책을 베껴 쓰고 어떤 이는 농업기술서적을 읽는다(或抄兎冊看牛經)
_김형수, <농가십이월속시>, ‘11월’에서

2) 계: 경제적인 부조, 공동구매, 친목 등을 위해 알음알이를 따라 모여 만드는 조직.

흰떡과 떡국이 새해 첫 아침 상차림의 시작이다.
흰떡과 떡국이 새해 첫 아침 상차림의 시작이다.

그 조촐함 그 깨끗함
  그 한가운데에 흰떡이 있다. 섣달과 정월 사이에 이런저런 먹을거리가 마련되지만 그 누구도 흰떡을 빠뜨리지 않았다. 흰떡과 떡국이 새해 첫 아침 상차림의 시작이다. 박지원과 동시대를 살다 간 문인 이덕무(李德懋, 1741~1793)는 설날의 흰떡에 이런 말을 부쳤다.

“새해의 시작에 흰떡을 쳐 만들어 썰어 떡국을 끓인다. 겨울에 추웠다 따듯했다 하는 날씨 변덕에도 상하지 않고 오래갈 뿐 아니라 그 조촐함과 깨끗함이 더욱 좋다[取其凈潔].”3)

  조촐함, 깨끗함. 연말연시의 마음가짐, 몸가짐에도 어울리는 감각이다. 이 감각과 새해 상차림이 서로 손잡는다. 예전에는 멥쌀 반죽을 떡메로 쳐 물성을 잡고, 손으로 비벼 떡을 늘이는 수고를 거쳐 떡가래를 냈다. 살짝 굳으면 어슷하게 또는 원으로도 썰었다. 짧게 끊어 조랭이, 방울, 도토리 모양을 내는 수도 있다. 쳐서 떡을 만들지 않고 쌀가루를 바로 뭉친 ‘생떡’ 방식도 있다. 조랭이 등 짧고 동그란 흰떡은 생떡으로 빚기도 한다. 떡국감이 마련되면 떡국을 끓였다. 김매순(金邁淳, 1776~1840)은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에서 “먼저 장국을 끓이다가 국물이 펄펄 끓을 때 떡을 동전처럼 얇게 썰어 장국에 집어넣는다. 떡이 끈적이지도 않고 부서지지도 않으면 잘 된 것이다”라고 했다. 다시 위 책에 따르면 돼지고기·소고기·꿩고기·닭고기 등 다양한 고기가 육수의 바탕이 되었다. 하긴 책만 들여다볼 노릇이 아니다. 서울 기록이야 떡국 하면 소고기 장국을 으뜸으로 치지만, 지역마다 미역·굴·매생이·모자반·바지락·다슬기·북어·표고·잡버섯·새우젓국 등 그 바탕도 다양했고 오늘날에도 그렇다. 소고기를 쓸 때에도 집집마다 양지·사태·우족·갈비·꼬리·사골 등 그 집 입맛에 따라 부위를 다채롭게 썼다. 이러나저러나 흰떡이 떡국의 중심을 잡는다. 이윽고 떡국상이 새해 상차림의 중심을 잡는다. 이 떡국상에 다시 장삼이사가 나라에도 양보하지 않고 마련한 술·떡·과실·강정·유밀과가 함께였다. 이 상을 먹을 만큼 조촐하고 깨끗하게 차려 모두와 나누었다. 흰떡은 이렇게 연말연시에 생활인을 위로하고 공동체를 위로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식민지시기 타국을 떠돌던 시인 또한 정월 떡국 생각에 울컥했다. 흰떡, 떡국 한 그릇 올린 상에 깃든 정서가 이만하다. 돌아볼수록 뭉클하다.

“오늘 고향의 내 집에 있는다면
새옷을입고 새신도 신고 떡과 고기도 억병 먹고
일가친척들과 서로 뫃여 즐거이 웃음으로 지날것이였만
나는 오늘 때묻은 입든옷에 마른물고기 한 토막으로
혼자 외로이 앉어 이것저것 쓸쓸한 생각을하는것이다
녯날 그 杜甫나 李白같은 이나라의 詩人도
이날 이렇게 마른물고기 한 토막으로 외로이 쓸쓸한 생각을 한적도 있었을것이다
나는 이제 어늬 먼 외진 거리에 한고향 사람의조그마한 가업집이 있는 것을 생각하고
이집에가서 그 맛스러운 떡국이라도 한그릇 사먹으리라한다”
_백석(白石, 1912~1996), <杜甫나 李白같이> 부분4)

3) 자신의 시 <첨세병(添歲餠, 나이 먹게 하는 흰떡)>에 부친 말이다.
4) 1941년 발표 당시의 표기, 띄어쓰기대로 옮겨 적었다.

고영필자 고영: 계원예대 강사
대학에서 고전문학을 공부했다. 옛 문헌을 번역하다 최근 한 세기의 식생활에 파고들게 되었다. 지금은 전근대와 현대를 아우른 음식문헌을 공부하고 있다. 저서로 《카스테라와 카스텔라 사이》(2019) 등이 있다. 경향신문에 <고영의 문헌 속 밥상>을 연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