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대형
가을에 들어서면 한 해 농사의 결실을 기대하게 된다. 직접 농사를 짓지 않는 사람이라도 황금 들판과 나무에 매달린 탐스러운 과일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풍요로움과 행복함을 느낄 것이다. 어쩌면 우리의 DNA 속 어딘가에 농경 시대의 경험이 남아 있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많은 농작물 중에서도 우리에게 쌀이 가지는 의미는 남다르다. 쌀은 농업의 근간이며 ‘식食’에서는 주식으로 여겨지기에 애착과 상징성이 다른 농산물보다 크다. 가난하던 시절에는 쌀을 배불리 먹어보는 게 소원이었지만 먹을 게 풍족해진 지금은 쌀 소비 감소가 큰 문제가 되고 있다. 쌀 소비 활성화를 위한 대안으로 쌀 가공품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먹거리가 풍부한 지금은 이마저도 쉽지는 않다. 하지만 과거부터 쌀 소비에 있어 큰 영향을 준 가공품 중 하나로 ‘술’을 이야기할 수 있다.
조선 시대 사람들의 술 사랑과 쌀 소비
한양은 많은 사람이 살아가는 조선 시대의 수도였다. 인구가 증가하면서 한강 변의 마포·서강 등지는 상업 중심지로 다양한 술집이 번창했다. 당시 술집에 대한 기록을 보면 정조 시대 후반에 형조판서 등을 역임한 이면승(李勉昇, 1766~1835)은 술 제조의 금지에 관한 글인 <금양의禁釀議>에서 한양 도성 전체 인구의 10~20%가 술집에 종사하거나 연관되어 있다고 했다. 또한 당시의 한양 술집은 주등酒燈을 걸어 술 파는 곳임을 표시했다. 18세기 한양은 대궐 안 높은 곳에 올라가 바라보면 술집 주등이 많이 보이는 술의 도시였다. 조선 후기 실학자인 성호星湖 이익李瀷 역시 《성호사설》(1760년 편찬)에서 한양 큰 거리의 상점 가운데 절반이 술집임을 지적하였으며 술집은 한양 어디를 가든 마주치게 되는 풍경의 하나였다고 했다.
결국 술의 과잉 소비로 인해 쌀이 너무 많이 소진되어 쌀값이 뛰고 덩달아 물가도 올랐다. 술로 인해 쌀 소비가 크게 늘어서 문제가 된 적도 많았다.
“한양에 들어오는 쌀이 죄다 ‘삼해주三亥酒’ 만드는 데 쏠려 들어가니 이를 금함이 옳습니다.”
조선 영조 때 형조판서 김동필이 올린 상소문의 내용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고종 2년에도 대왕대비가 쌀이 많이 들어가는 삼해주 빚기를 금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처럼 술이 쌀 소비에 미치는 영향은 컸었다.
현대에 와서도 쌀 소비를 많이 하는 가공품으로 떡과 함께 빠지지 않는 것이 술이다. 2022년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56.7㎏으로 30년 전인 1992년 112.9㎏의 절반 수준으로 감소했다. 하지만 가공품에 있어 2022년 쌀 소비량은 지난해보다 1만 1235t 증가한 69만 1422t을 기록했고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다. 집에서 밥으로 먹는 쌀의 양은 줄었지만 가공제품으로 소비되는 쌀의 양은 늘어난 것이다. 이러한 쌀 가공제품에 있어 수입쌀 사용은 항상 동전의 양면과 같은 어려운 문제이다. 수입쌀의 가격이 국산쌀보다 싸다 보니, 많은 가공업체에서는 가격 경쟁을 위해 수입쌀을 사용하기에 실제 가격이 높은 국산쌀의 소비량은 크게 증가하지 않는다.
일례로 쌀값이 떨어진다고 한숨을 짓는 농민들이 일하는 중간 휴식 시간에 수입쌀로 만든 막걸리 제품을 마시게 되는 아이러니한 장면을 볼 때가 많다. 막걸리 생산 양조장에서는 단가 문제 등으로 수입쌀을 사용하거나 몇 년 묵은 정부미(나라미)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일어나는 일이다. 한동안 매해 국정감사에서 막걸리를 생산하는 대형 업체에서 수입쌀을 이용해서 만든 막걸리가 많다는 기사가 나왔다. 농림축산식품부가 발표한 2021년 주류산업정보 실태조사에 따르면 막걸리 전체 원료에서 쌀과 밀이 차지하는 비율이 각각 79.7%, 14.2%이다. 이중에서 쌀은 국산이 36.5%이고 외국산이 63.5%이기에 ‘무늬만 우리 술’이란 말이 나올 정도다.
‘무늬만 우리 술’이 되지 않으려면
일본 사케의 경우 자국에서 생산되는 양조용 쌀을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한, 다양한 양조 전용 쌀을 이용한 술이 많기에 쌀 품종의 중요성을 높게 평가한다. 반면, 우리나라는 술을 만들기 위한 양조 전용 쌀 품종에 대한 내용이 아직 정립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구한말에 양조에 적합한 쌀 품종을 연구하고 그 쌀을 이용해 술을 만들었다는 자료가 많다.
먼저 구한말 우리나라 쌀 품종에 대한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의 벼 재래종 수집·조사서인 《조선도품종일람》(1911~1913, 1922~1923)에는 1899가지 품종이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 재래 품종들은 재배나 밥맛에 있어 일본이 원하는 품종이 아니었다. 결국 1903년부터 일본 쌀 품종의 보급과 농법 개량이 시도되었다. 일본 개량 품종의 보급률을 보면 1912년 5%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후 크게 증가하여 1920년에는 65%, 1936년에는 86%에 달해 재배 품종의 주종을 이루게 된다. 품종을 개량한 쌀들이 늘어나면서 일본은 밥쌀 외에 양조에 적합한 쌀을 찾기 시작했다.
양조 쌀과 관련된 《조선주조사》나 《국세청기술연구소백년사》 등의 자료에서는 탁주나 약주의 쌀 품종에 대한 이야기가 없고 멥쌀과 찹쌀을 사용했다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반면 당시 청주(사케)에 사용된 쌀 품종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나온다. 양조 쌀로서 곡양도穀良都, 웅정雄町, 다마금多摩錦, 금錦, 금방주錦坊主, 다하금多賀錦, 백옥白玉, 복방주福坊主, 육우陸羽 132호 등이 사용되었다. 이러한 품종들이 청주 원료로 쓰였기에 일부는 탁약주에도 사용되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위에 명시한 양조 쌀 등은 일본 쌀 품종을 조선에 심고 키운 것으로 국내 고유 품종들은 아니다. 해방 이후부터 최근까지 우리는 고시히카리, 아키바레 등 먹는 밥쌀용뿐만 아니라 술을 만드는 쌀도 일본 품종이거나 일본 품종의 영향을 받은 것들을 이용해 왔다.이러한 일본 품종의 쌀 대신에 국내에서 육종한 국산 품종이나 토종쌀을 이용해 술을 만들고자 하는 노력도 최근 생겨나고 있다. 경기도에서는 참드림이나 가와지1호라는 국내 육종 품종을 개발하여 밥쌀용과 함께 양조용 쌀로 사용할 수 있게 하고 있다. 또한, 다양한 토종쌀을 복원하려하는 모임에서 흰베, 아롱벼, 자광도, 북흑조, 한양조, 귀도, 천주도, 녹두도, 보리벼 등 15종의 토종쌀을 이용한 막걸리를 만드는 행사를 진행하기도 했다. 물론 토종쌀을 이용한 술이 전통주 산업의 중심이 되기에는 여러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토종쌀을 이용한 전통주가 우리 술의 다양성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정부에서도 전통주를 술이라는 공산품으로 보지 말고 농업적인 측면에서 쌀의 소비를 증가시킬 수 있는 하나의 도구로 인식하고 지원이 이루어졌으면 한다.
‘정종’은 우리 술이 아니다
쌀은 우리 농경 역사나 세시풍속과도 많은 관련이 있다. 세시풍속으로 쌀 하면 생각나는 명절이 하나 있는데, 바로 추석秋夕이다. 추석은 여름 동안 가꾼 곡식과 과일을 수확해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고 산소에 성묘를 하는 명절이다. 과거 추석은 조상에게 농사를 잘 짓게 해준 것에 대한 감사의 의미였다. 그래서 수확이 넉넉한 만큼 다양한 먹거리가 상에 올랐다. 홍석모가 1849년에 쓴 《동국세시기》에는 8월 한가위의 세시풍속으로 “술집에서는 햅쌀로 술을 빚어 팔며 떡집에서는 햅쌀 송편과 무와 호박을 넣은 시루떡을 만든다”고 했다. 이때 햅쌀로 빚은 술을 신도주新稻酒라 불렀다. 이제 집에서 햅쌀을 이용해 신도주를 만들어 차례에 사용하는 사람은 드물다. 대부분 대량 생산된 술을 구입해서 차례에 사용한다.
시중에서 많이 팔린 술 중에 ‘정종正宗’이라 불리는 청주가 있다. 주세법상 청주는 일본식 사케를 이야기한다. 정종은 1840년 일본의 한 양조장에 의해 처음 만들어진 술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883년, 부산에 있던 이마니시 양조장이 조선 최초의 일본식 청주 공장을 세우고 정종이란 청주를 생산하여 큰 인기를 끌었다.
정종이라는 이름을 상표명으로 사용하는 곳이 많다 보니 보통명사화되어 어느 양조장에서나 사용이 가능했다. 결국 ‘정종’이라는 브랜드를 앞세운 술들이 지역마다 등장했다. 서울 만리동의 미모토정종三巴正宗, 마산의 대전정종大典正宗과 정통평정종井筒平正宗, 부산의 히시정종菱正宗과 벤쿄정종勉强正宗, 대구의 와카마즈정종ワヵマツ正宗, 인천의 표정종瓢正宗 등 외에도 많은 양조장에서 정종을 생산했다. 해방 후에도 청주 제조장이 적산敵産으로 넘어오면서 일본 청주는 지속적으로 생산되었다. 자연스럽게 정종 하면 좋은 술을 뜻하는 단어로 사람들의 머릿속에 자리 잡았고 고급술로 인식되었다. 명절에 좋은 술을 올린다는 생각에 일본식 정종을 사용하게 된 것이다.
다양한 우리 술을 즐기는 문화
정종은 우리 술 제조 방법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차례주’라 해서 누룩을 사용하고 전통 제조법으로 만든 술의 사용 비율이 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가정에서 ‘정종’을 제사에 사용한다. 최근 여자는 제사 음식만 만들고 남자는 제사만 지내는 이분법적 형태의 과거 잘못된 제사 문화를 바로 잡으려는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는 것처럼, 술 역시 일본식 술인 ‘청주=정종’을 사용하지 않고, 우리 전통주를 사용하는 문화를 만들었으면 한다.
차례에 어떤 전통주를 사용할지 어떤 지역 술을 사용해야 할지 고민할 필요는 없다. 과거 차례상에 과일 놓는 순서로 알려진, 홍동백서(紅東白西·동쪽에는 붉은 과일, 서쪽에는 흰 과일을 올린다), 조율이시(棗栗梨柹·좌측부터 대추, 밤, 배, 감 순으로 올린다)도 근거가 없는 후대에 만들어진 절차라 이야기한다. 이처럼 차례상에 올리는 음식에 대한 정확한 규정이 없기에, 술도 정성이 들어간 것이면 되는 것이다. 가끔은 우스갯소리로 맥주든 와인이든 돌아가신 분이 살아생전 좋아하는 술을 올리는 것이 맞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조선 시대 왕실의 으뜸가는 행사 중 하나였던 종묘제례에서도 탁한 술(막걸리)과 맑은 술(약주)을 올렸다. 종묘제례에서는 모두 세 차례 술을 올리는데, 첫 번째 ‘예제’는 단술(감주)이며, 두 번째 ‘앙제’는 술을 여과하지 않고 만든 탁한 술이다. 마지막으로 맑은 술을 올렸다.
이번 추석에는 지역 술을 차례에 사용하는 것은 어떨까 한다. 전국에는 지역 전통주 또는 우리 술(막걸리, 약주, 소주 등)이 많이 있다. 현재 양조장의 개수만 800개 정도가 된다고 하니, 각 도에 적어도 100개 이상의 크고 작은 양조장들이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만들어지는 술은 다양한 원료와 제조 방법으로 그 종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지역 술은 대량으로 생산되어 획일화된 맛이 아닌 지역의 맛을 느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또한, 지역 유통을 위해 지역 사람들의 입맛에 맞춰 만든 술들이 많다. 차례 음식도 지역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자연스럽게 차례 음식과 지역 술은 좋은 페어링이 가능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대부분의 전통주는 지역의 쌀을 소비한다. 막걸리든 약주든 전통주의 소비가 많아지면 그 지역의 쌀 소비가 늘어나게 되는 것이다.
전통주는 우리 쌀과 농산물이 들어간 제품이다. 국산 쌀 소비 증진 대책에 전통주 소비 확대만 한 게 없는 이유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전통주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다. 막걸리를 마시면 머리가 아프다거나, 약주는 한약재 향이 강하다고 말하는 경우다. 하지만 최근 전통주는 그러한 과거의 편견과는 거리가 있다. 쌀과 누룩을 이용해 다양한 향과 맛을 만드는 전통주뿐만 아니라 다양한 부원료를 이용해 MZ세대의 입맛을 사로잡는 전통주도 많다. 이번 추석에는 다양한 우리 전통주를 이용해서 제사도 지내고 맛을 보는 경험(음복)을 해보았으면 한다. 전통주의 소비는 지역을 기반으로 한 양조장과 함께 우리 농업을 살리는 일이 될 것이다.
필자 이대형: 경기도농업기술원 농업연구사
전통주 연구로 2015년 미래창조과학부 과학기술 진흥 대통령상 및 2016년 행정자치부 ‘전통주의 달인’을 수상했다. 대한민국 우리술 품평회 산양삼 막걸리(대통령상), 허니와인(대상) 등을 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