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협치’가 이뤄지려면

김훈규

거버넌스란 무엇인가?
  “Government is not the omnipotent one but an open problem-solving platform.(정부는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라 공개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플랫폼이다.)
  2024년 1월,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주최로 ‘불확실성 시대의 농업·농촌, 도전과 미래’를 주제로 하는 ‘농업전망 2024’가 열렸다. 이 행사에서 공통주제 발표자로 나선 농림축산식품부 기획조정실장은 ‘불확실성의 시대 정책과제와 거버넌스의 방향’이라는 발표 자료의 마지막 장에 위 문장을 올렸다. ‘거버넌스’라는 단어가 지금껏 다양한 농업·농촌 관련 발표 주제에 직접적인 제목으로 제시된 적이 별로 없기에 반가웠고, 농정당국의 대표 자격으로 참석한 고위 공무원이 다양한 사례와 접목해서 풀어내는 내용이 제법 흥미로웠다.
  농정에서도 거버넌스를 정부와 민간농민조직 간의 관계로 이해하고 협소하게 정의하는 것이 보편적인데, 정부를 대표한 발표자는 “거버넌스란 정책을 만들고, 집행하고, 현장에 적용되는 전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농업·농촌의 문제는 발전 과정에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일시적 문제 해결보다는 농업 시스템의 문제 해결력과 회복력을 강화시키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며 지금의 불안하고 불확실한 시대가 이어질수록 거버넌스의 방향과 형태는 창발성과 함께 자율적으로 조직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거기에 미래의 대응력이 있다는 긍정적인 메시지로 들렸다.
  얼마 전 카카오 그룹의 외부 감시기구가 설정한 주요 의제에 책임 경영과 윤리적 리더십, 사회적 신뢰 회복 등을 위한 ‘그룹 거버넌스 체계 개선’을 위한 책임을 다할 것을 권고한다는 내용이 언론에 나오기도 했고, 지구환경, 탈탄소 분야의 거버넌스뿐만 아니라 ‘데이터 거버넌스’, ‘AI 거버넌스’ 등에도 광범위하게 쓰이는 것으로 보아, 거버넌스라는 용어는 단순히 정부의 개입을 기본으로 한 통치와 협치 등 사전적 개념으로만 이해할 수 없는, 집단적 의사결정 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또 다른 사회적 상호작용과 미래지향적 소통의 범주가 있을 것이다. 진화하는 시대에 맞게 용어의 개념 정립은 필요하리라고 본다.

거버넌스의 방향과 형태는 창발성과 함께 자율적으로 조직되어야 한다.
거버넌스의 방향과 형태는 창발성과 함께 자율적으로 조직되어야 한다.

지역농정이 자립할 근거와 동력이 불투명한 이유
  농정당국이 사회의 발전 과정에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농업·농촌의 문제’ 정도로 표현하는 것을 농촌 현장에서는 ‘농정의 실패’라는 표현으로 강경하게 목소리를 높일 때가 있다. ‘문제’든 ‘실패’든 간에 그것은 결과면서 또 다른 원인이다. 조건이 만만찮은 현재를 살아가며 예측 불가능한 미래에 대응할 농촌지역이 안고 가야 할 총체적 어려움의 원인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도시에 반해 극명하게 드러나는 농촌의 인구감소나 소득격차가 ‘실패한 농정, 문제 많은 농정’이 남긴 결과물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정부나 지자체는 ‘떠나지 않는 농촌’이 아닌 ‘돌아오는 농촌’을 농정목표로 내세운다.
  정부 주도 농정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분권과 지방자치제도의 시행은 농촌에 많은 기회를 제공했다. 그러나 지역농정의 자립을 도모하고 실현할 수 있을 만한 근거와 동력은 여전히 빈약하고 불안하다. 주요 정책을 결정하는 구조도 여전히 중앙에 머물러 있고,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전문가도 부족하니, 결국 계획과 실행의 모든 역할이 전문 용역회사에 집중되어 그 이익이 고스란히 외부로 빠져나가는 사례가 많다. 지역은 자체적으로 농정을 추진할 수 있는 인력과 여력이 심각하게 부족하다. 바람직한 지역농정 거버넌스는 농정철학이 뚜렷한 행정력과 민간(농업인)의 다양한 참여를 바탕으로 주체 간의 협력적 관계를 선명히 하는 것이 관건이다. 각 주체가 합의 가능한 농정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제도나 정책, 참여하는 활동의 구조를 공동학습과 실천을 통해서 끊임없이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전문가는 이를 지역실정에 맞게 돕는 역할이다.
  전문가와 용역회사의 구분도 없지만 현장에서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은 갈등이 아니라 오히려 ‘무료함’이다. 역동성이 부족한 지역농정의 원인은 변화와 창의성을 민과 관이 서로 거부한 탓도 있다. 함께하는 사람이 없다는 이유, 협력보다는 오히려 저항하는 민원이 더 많다는 이유를 내세우기도 한다. 배제의 탓을 하기도 한다. 협치(거버넌스)는 나란히 앉는 것인데 마주 보며 겨루고 있는 형국이 다반사라 안타깝다. 지자체는 온 행정력을 동원하여 공모하고 용역의 결과에 따라 규격화한 제도와 시스템을 옮겨왔지만, 이상하게 지역 실정에 맞지 않다. 심지어 실행 이후에는 평가도 없이 지나가는 일이 다반사다. 누구를 탓하랴.

온 들녘에 거름 냄새가 퍼질 즈음, 새 출발을 하는 각종 기관·단체의 다짐과  사업 안내, 공모 신청 등을 알리는 현수막이 곳곳에 나부낀다.
온 들녘에 거름 냄새가 퍼질 즈음, 새 출발을 하는 각종 기관·단체의 다짐과 사업 안내, 공모 신청 등을 알리는 현수막이 곳곳에 나부낀다.

‘주민자치’라는 이름의 아쉬움
  온 들녘에 거름 냄새가 퍼질 즈음, 새 출발을 하는 각종 기관·단체의 다짐과 사업 안내, 공모 신청 등을 알리는 현수막이 곳곳에 나부낀다. 간혹 그중에 각종 농업·농촌 관련 단체장, 협회장의 선출을 알리는 현수막도 있는데, 가까운 지역을 벗어나서 광역이나 전국의 대표라도 선출되면 축하 현수막도 덧붙여진다. 지역농정을 대표하는 면면을 그렇게 자부하고 또 서로 알아차리게 하는 흔한 홍보 방법이다. 그들은 어딘가에 모여 잦은 모임과 회의를 하겠지만 지역 실정에 맞게 형식이 창의적이거나 시대의 흐름에 따라 의제가 재빨리 따라가지도 못한다. 각 지자체의 농정에서 자랑하는 대표성과 실천사례는 있으나 그럴듯한 모범을 찾기 어렵고, 현장의 각종 민관농정협의체나 추진기구가 역동적으로 운영되는 사례는 흔치 않다. 한때 운이 좋아 잘 만들어뒀던 법적 구조나 조직이 있더라도 지자체마다 등장한 새로운 리더의 ‘지시’와 일사불란한 행정의 움직임으로 인해 순식간에 무력화되는 것을 종종 확인한다. 특정지역을 집어서 이야기할 것도 없거니와 전국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으니 민관농정협치의 왜곡은 심각하다.
  지자체장을 선출하는 선거와 공청회 및 각종 위원회에 민간전문가가 참여하는 것을 흔히 주민자치 기능이 보장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선거는 아주 짧은 기간에만 주민을 주인으로 대접할 뿐, 그 이후에는 지역의 행정 및 정치에서 소외시킨다. 법적·제도적 조건의 완비 속에서 변화를 꾀하려 애쓰는 농촌지역의 ‘주민자치센터’가 면사무소를 대신해 이름을 달고, ‘주민자치회’가 민관협력 모델의 구축을 통한 주민자치를 표방하고는 있으나, 이 또한 행정의 연장선상에서 계획되고 실행되고 있는 경우가 많아 주민자치의 의미를 살리는 데에는 한계가 많다.
  농업·농촌 및 농민의 권익 관련 각종 위원회에 농민단체를 대표해서 소수의 농업인이 참여하는 것 역시 농민들의 직접적 농정 참여라 하기엔 온당치 않은 실정이다. 지역에 수요가 있는 정책과 사업을 예산으로 반영하고, 농업·농촌 및 식품산업 발전계획, 푸드플랜, 농촌협약 등 각종 지자체 단위 상위계획에 주체로서 참여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 있지만, 행정에서 일시적으로 소집하는 단편적인 회의구조로 돌아간 곳이 많다. 부족한 농촌인력 문제 해결을 위한 자구책의 하나로 민관협력사업의 요구가 높고, 지역소멸 대응에 따른 기금 확보와 사용에 대한 협치조직과 실행조직의 필요성 제기, 귀농·귀촌 정책의 확장에 따른 갈등 확산과 신속한 민관의 공동 대응력 요구, 기후위기에 따른 농업과 농촌 의제의 등장과 새로운 가치 충돌이 이어지고 있지만, 이를 위해 민관이 일상적으로 기획하고 조직하여 논의하는 협치구조의 모범사례를 도대체 어느 지역에서 찾아야 할지 막막하다. 농정을 포함하는 ‘민관협치’ 전 분야에서 찾아봐야 할 정도로 지역에서의 그럴듯한 협치사례가 희미해졌다.
  제도와 시스템의 ‘무용론’과 함께 위축되는 농정예산도 안타까우며, 전국 곳곳의 ‘○○군 농업발전위원회’, ‘△△도 농업특별위원회’의 본질과 기능도 너무 잘 알고 있다. 십여 년이 지난 전국의 농업회의소도 시범사업에만 머물고 있으며, 그 성과와 한계에 대해서 진지하게 논의하는 자리가 없는 것도 아쉽다. 충청남도의 ‘3농’과 전라북도의 ‘3락농정’도 왜 이렇게 아득하게 느껴지는 단어가 됐는지도 모르겠다.
  협치농정을 꾸준히 주장하는 어느 전문가는 가장 중요한 점으로 “행정과 민간 간 생산적인 논의, 기획, 의제 발굴, 정책화 등의 ‘공식경로’를 진행해야 한다”고 했는데, 강원도의 평창군농업회의소가 행정의 적극적 협력 속에 그런 사례를 안착하고 십수 년째 끊임없이 실천하고 있다. 얼마 전 충청남도의 민관협치 우수사례를 평가한 자리에서는 부여군농업회의소의 협치농정사례와 함께 청양군의 ‘전국 최초 통합형 중간지원조직 청양군지역활성화재단’을 통해 민·관 거버넌스의 모범을 창출했다며 몇몇 지자체가 선도사례로 눈여겨보는 것 같다.

거창군농업회의소는 매년 ‘주민참여농정예산’ 사업을 통해 농민이 직접 사업을 제안하고, 농민들이 평가하여 예산 배정을 결정하며, 행정은  지원만 하는 사례를 만들었다.
거창군농업회의소는 매년 ‘주민참여농정예산’ 사업을 통해 농민이 직접 사업을 제안하고, 농민들이 평가하여 예산 배정을 결정하며, 행정은 지원만 하는 사례를 만들었다.

협치구조의 진화를 꿈꾼다
  현장의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농정의제가 새롭게 공론이 되도록 하고 정책과 사업으로 묶어내는 것, 그것을 도모할 민관의 동료를 새롭게 조직해야 한다. 유례없는 위기에 대응할 수 있는 연대와 협력은 이전과 전혀 다른 모색이어야 하지 않을까. 여기에 지역 실정에 맞는 제도와 틀을 짜야 하니 새로운 ‘성공사례’를 창출하기란 만만치 않을 것이다. ‘현장에 답이 있다’고 하는데 각자가 품고 있는 다양한 답(또는 문제의식)을 보다 창발적이며, 심지어 역발상으로 접근하며 찾아내는 협치구조의 진화를 이제는 꿈꿔야 하지 않을까.
  개별 지자체에 얽매이지 않고 왜소한 인근 지자체 간에라도 협력하여 ‘농촌소멸위험지역(명칭은 ‘새로운 기회지역’으로 하면 더 좋겠다) 연계형 민관거버넌스’를 만들면 어떨까. 지자체의 벽은 높겠지만 농촌의 한정된 인적자원의 활동영역을 넓히는 방안은 되지 않을까. 또 사회가 진화되어 갈수록 그 역할과 비중이 변화되는 농촌사회의 다양한 조직의 기능과 역할을 새롭게 정립해서 그것의 거버넌스(공동체)를 구현하는 것도 제안해본다. 민간영역에서도 위원회의 ‘자리다툼’이 아닌, 농민이 제안한 농정의제 하나를 가지고도 합의에 이르게 하는 민주적인 ‘의사결정 과정’을 제도화하고,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권한과 예산을 공동체에 주는 방법도 있다. 이건 용역을 줄 일도 아니며 퍼실리테이터(Facilitator)를 동원해서 포스트잇을 붙여가며 결정하는 방식을 꼭 추구할 필요도 없다. 그러한 기능과 역할이 가능한 공동체(또는 법인)가 창의적이고 다채롭게 모이면 협치구조로 발전될 수 있다. 행정은 그것 또한 농정의 파트너로 인정하면 좋겠다.
  거창군농업회의소는 매년 ‘주민참여농정예산’ 사업을 통해 농민이 직접 사업을 제안하고, 농민들이 평가하여 예산 배정을 결정하며, 행정은 지원만 하는 사례를 만들었다. 매년 예산을 높여가고자 계획하고 있으며, 여기에 사업의 실행과 평가 등 사후관리까지 농민조직과 행정이 같이할 수 있도록 구상 중이다. 농정의 제안자가 책임을 가지고 실행하고 평가를 받는 등 일련의 과정을 구축하는 것이다.
  나아가 단체나 조직의 대표자를 중심으로 협치조직이 구성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지역의 다양한 사람과 그들이 가진 능력과 정보, 네트워크를 공유하는 거버넌스의 등장도 기대한다. 흔히 ‘플랫폼’이라고 표현한다. 농촌에 필요한 능력을 가진 사람과 조직을 찾고 이어주는 일이다. 행정이 조직하고 민간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과 통합적으로 기획, 관리하는 역할이 관건이다. 법적 근거를 가지고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한두 번 회의를 통해 심의와 결의를 해줄 각종 회의구조가 필수지만, 기획과 실행의 책임을 위임받고 농촌과 농민 사이를 종횡무진 누빌 민관협력형 실행조직(추진체계)이 농촌에서는 항상 절실하다. 김해시가 농촌활성화, 도시재생, 문화관광 분야를 망라하기 위해 행정 6개과 6개 팀, 4개 중간지원조직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지역활성화 원팀’을 운영해서 정보 교류 및 공유, 지속적인 회의 개최 등을 통해 수평적인 파트너십을 형성한 사례가 있다. 최근 영월군도 9개 부서의 행정지원협의체와 8개 중간지원조직이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의성군은 기존에 개별적으로 운영되던 △이웃사촌 △마을자치 △미래교육 △이웃사촌복지 분야를 기능통합, 공간통합 했다. 농촌의 청년·사회적경제 기능을 강화하여 조직 간 상호협력체계를 통해 종합적이고 효율적인 정책과 활동을 수행하도록 ‘행복의성지원센터’로 통합 출범한 것이다. 여기에는 파견된 공무원이 같이 일을 한다.  ‘농정’의 영역은 제한할수록 좁아지겠지만 그 너머엔 더 큰 공간이 있다.

  과반의 출석을 위해 바쁜 농사일을 제쳐두고 부랴부랴 달려와 관공서 회의실 한쪽에 앉아, 담당 공무원이 거의 결론을 내놓은 심의자료를 뒤적이며 다가오는 점심시간만 무료하게 기다리는, 여느 지자체마다 흔한 심의위원도 민관협치의 중요한 주체이다. 주민참여예산 공모 시기마다 사업을 제안하거나 각종 공청회와 설명회마다 찾아다니며 민원을 제기하는 소위 ‘고춧가루’와 같은 귀촌인도 지역농정 거버넌스의 역량이다. 농촌이라는 말보다는 ‘로컬’이라는 단어가 더 입에 붙고 SNS의 바다를 누비며 ‘크리에이터’들의 협업과 반란을 꿈꾸는 정체불명(?)의 청년들도 농정의 핵심이 됐다. 주체와 역량을 찾고 다시 조직하는 것이 응당 숙제다.

필자 사진필자 김훈규: 거창군 마을만들기지원센터 센터장
2002년 거창으로 귀농하여 10년간 농사와 농촌 활동을 했다. 거창군농업회의소 사무국장, 청와대 행정관을 거쳐 현재 농어업회의소를 기반으로 하는 협치농정, 마을공동체 회복, 유휴공간 재생, 도시와 농촌의 연계, 재미있는 농촌 플랫폼 등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