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의 주인은 누구인가

독일 바이에른주에 있는 후글핑 마을은 천 년이 넘는 역사와 전통, 주민들의 공동체 의식이 살아있는 곳이다. ⓒ진정은

글·사진 진정은

  제주에서 살아가며 ‘마을에서 함께 산다는 것’에 대한 생각을 자주 했다.
  하루하루 자연과 가까이 지내다 보면, 혼자가 아닌 함께 살아간다는 감각이 더 자주 찾아온다. 그럴 때면 문득, 진짜 공동체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안에서 나는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를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그래서였을까. 독일의 후글핑 마을(Gemeinde Huglfing)에서 만난, 주민들이 스스로 만들어가는 풍경은 내게 더 깊이 다가왔다. 살아 있는 유기적인 관계, 조용하지만 단단한 에너지. 그 고요한 힘을 사진에 고스란히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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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 놀이터’는 아이들을 위한 공간이자, 후글핑이라는 마을의 철학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소다. ⓒ진정은

  후글핑에는 특별한 놀이터가 있다. ‘모험 놀이터’라 불리는 이곳은 마을 사람들이 직접 설계했다. 아이들이 어떤 공간에서 뛰놀고 싶은지 먼저 묻고, 매주 주말이면 손에 연장을 들고 모여들었다. 누군가는 땅을 파고, 누군가는 나무에 사포질하고, 누군가는 금이 간 그네의 줄을 다시 매달았다. 그렇게 함께 보낸 시간이 어느덧 2000시간을 넘어섰다. 모험 놀이터는 아이들을 위한 공간이자, 후글핑이라는 마을의 철학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소가 되었다.
  2006년, 마을의 소유가 된 기차역사는 카페와 예술가의 작업실, 난민 가족의 주거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이 건물을 그냥 버려둘 순 없지 않을까?”라는 누군가의 말이 씨앗이 되었고, 주민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몫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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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글핑 마을을 가로지르며 맑은 물이 흐르는 개울. ⓒ진정은

  후글핑에서 우리는 마커스 후버(Markus Huber) 시장1)과 함께 나란히, 그리고 천천히 마을을 걸었다. 아이들이 뛰노는 놀이터의 집라인을 타고, 지은 지 100년이 넘은 집들을 따라 골목을 돌다가, 마을을 가로지르며 맑은 물이 흐르는 개울 앞에서는 이곳에서 열린 오리 대회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마을 사람들이 고무 오리를 하나씩 띄우고 함께 웃고 있는 사진을 보며, 나는 이 마을이 얼마나 유쾌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느꼈다.
  후버 시장은 오래된 흑백 사진 여러 장을 들고 와, 지금의 풍경과 과거의 풍경을 동시에 보여주었다. 이 마을이 미래만을 향해 달리는 공동체가 아니라, 과거의 역사도 함께 껴안고 살아간다는 것을 사진들이 말해주고 있었다.

1) 후글핑 마을은 독일 바이에른주의 기초지방자치단체인 게마인데(Gemeinde)에 해당한다. 독일에서는 게마인데의 수장을 ‘시장(Bürgermeister)’이라고 부른다. [편집자 주]

마을 사람들이 고무로 만든 오리 인형을 개울에 띄우며 즐거워하는 사진을 설명하는 마커스 후버 시장.
마을 사람들이 고무로 만든 오리 인형을 개울에 띄우며 즐거워하는 사진을 설명하는 마커스 후버 시장. ⓒ진정은

  후글핑 사람들은 ‘마을을 만드는 일’이 행정이나 리더십의 영역에만 머물러선 안 된다고 말한다. 각자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도 조금씩 시간을 내어 참여할 수 있어야 지속가능한 구조, ‘마을의 주인’이 되기 때문이다.
  이들은 ‘새로 짓는 것’보다 ‘이미 있는 것을 다시 쓰는 방식’으로 도시를 만든다. 그 선택은 환경적이면서도 참으로 경제적이다. 후글핑의 놀이터도, 복합 공간도, 그리고 작은 도서관도 그렇게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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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글핑은 그저 아름다운 마을이 아니라, 어떻게 함께 살아갈 수 있는지를 증명한 마을이다. ⓒ진정은

  2023년, 후글핑은 독일 연방식품농업부가 주관하는 ‘우리 마을에는 미래가 있습니다’ 경연대회에서 금상을 받았다. 이 상은 공동체의 지속가능성과 관계, 참여, 포용력 등을 평가하는 상이다. 후글핑은 그저 아름다운 마을이 아니라, 어떻게 함께 살아갈 수 있는지를 증명한 마을이다.
  나는 제주 세화마을 리(里) 사무소에 워케이션을 위한 공유오피스를 제안한 적이 있다. 그저 비어 있던 공간이,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자리가 되어주었다. 후글핑의 방식은 내가 제주에서 마을과 관계 맺어온 방식과 많이 닮았다. 시스템보다 중요한 건 관계였고, 정책보다 더 깊은 힘은 시간의 축적이라는 걸, 나는 그곳에서 다시 확인했다.

커뮤니티 시설에서 만난 마을 사람들의 얼굴이 편안해 보였다. ⓒ진정은

  그날 나는 후글핑의 마을 도서관에 제주 해녀 책 한 권을 기증했다. 잠시 발을 디딘 이방인으로서, 연결의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돌아오는 길, 나는 잠시 제주의 세화를 떠올렸다. 내가 사랑하는 이 마을, 내가 조용히 손을 보태온 그 공간들.
  그렇게 대산농업연수는 내게 ‘어떻게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를 묻는 시간이 되었다. 후글핑처럼 모든 걸 당장 바꿀 수는 없겠지만, 우리도 천천히, 함께 ‘2000시간’을 쌓아갈 수는 있지 않을까.
  다정한 시간, 느슨하지만 단단한 연대. 마을이란, 어쩌면 그런 시간을 함께 살아내는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7필자 진정은: 제주로부터 대표
IT 업계에서 10년간 개발과 기획 업무를 하다 퇴사 후 제주에서의 한 달 살이를 했다. 이를 계기로 농촌과 지역 먹거리 유통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로컬푸드 온라인 플랫폼 ‘제주로부터’를 설립했다. 현재는 ‘남해로부터’를 함께 운영하며, 로컬 식재료의 유통뿐 아니라 팜 투 테이블(Farm to Table), 온라인 마케팅 교육, 마을 공동체 자문 활동 등을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