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채롭게, 한마음으로

글·사진 신수경 편집장

  “세상의 농민은 모두 비슷하게 힘들지만, 저마다 (살아갈) 방법을 찾고 있다.”
  2024년 4월,  16일간 독일, 스위스, 오스트리아, 프랑스의 ‘미래가 있는 농촌, 지속 가능한 농업’ 현장을 돌아본 소회를 한마디로 말하라면, 이렇게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들이 보여준 ‘저마다의 방법’은 다양하면서도 묵직했다.

바덴농업협회 건물. 90%가 반경 60km 이내에 있는 나무로 지어졌다.
바덴농업협회 건물. 90%가 반경 60km 이내에 있는 나무로 지어졌다.

농민의 목소리를 하나로, 더 크게
바덴농업협회
  버스가 멈춰 서자, 웅장하고 특이한 건물이 눈앞에 들어왔다. 통유리로 둘러싸인 목재 건물은 탄성이 절로 나올 정도로 아름다웠다. 주차장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파드레이그 엘스너(Padraig Elsner) 씨는 간단한 인사 후 바닥을 가리켰다. ‘녹색은 남아 있어야 한다’라는 문구와 협회의 로고가 보였다. 눈을 들어 보니 옆 담장에는 ‘우리의 밭은 당신의 음식입니다’라는 현수막도 걸려 있었다. 홍보담당자인 엘스너 씨는 일반인에게 농업이 하는 일을 알리는 것이라 말했다.
  “농민은 농사를 짓는 것만으로도 힘이 들어요. 농민의 목소리를 모아 확성기 역할을 해줄 누군가가 필요합니다.”

바덴농업협회 건물 앞 바닥에는 ‘녹색은 남아 있어야 한다’는 문구가 적혀 있다.
바덴농업협회 건물 앞 바닥에는 ‘녹색은 남아 있어야 한다’는 문구가 적혀 있다.
‘우리의 밭은 당신의 음식이다’라고 적힌 홍보물.
담벼락에는 ‘우리의 밭은 당신의 음식이다 -당신의 바덴 농부들’이라는 글귀가 쓰인 현수막이 걸려있다.

  엘스너 씨는 건물 안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2014년에 지은 4층 건물은 90%를 지역의 나무로 만들었고, 가운데 화재를 방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시멘트 공간을 두고 있다. 패시브하우스(Passive House, 에너지 절약형 주택)로 용도 변경이 쉽게 건축하고, 각각의 사무실은 투명유리로 구분되어 있는데 구석 일부분이 다른 사무실과 일렬로 뚫려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업무의 투명성을 나타내는 장치라고 했다. 건물 건축비용은 회비와 협회 산하 4개의 회사에서 상담, 서비스 수익으로 충당했다. 현재 여성농업인협회, 농가에서 휴가협회 등 다양한 단체와 회사가 함께 있고, 100여 명이 근무한다.

유리로 개방되어 이어진 사무공간.
협회 사무실의 일부분은 유리로 개방되어 있는데, 협회의 일이 투명하게 이루어짐을 의미한다.

  바덴농업협회의 저력은 197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프라이부르크시의 작은 마을 뷜(Wyhl)에 핵발전소 설립이 추진되자, 회원 농민 400명이 트랙터를 몰고 시위를 주도했고, 이것이 독일 반핵 운동의 시작이었다.
  농민 5명이 주도해 1946년 설립한 협회에는 현재 1만 6000명 회원이 있다. 협회는 농업 활동과 관련한 안내문이나 슬로건을 만들어 시민에게 알리고, 농업인들의 목소리를 대변해 법률과 정책 개선에 영향을 미치도록 한다. 또한, 농업인에게 새로운 농업기술과 지식을 제공하고, 재정 지원, 자금 조달 자문, 법률 상담, 농민 간 교류 등 광범위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지역마다 사무소가 있습니다. 지역 농업의 문제를 사무소에서 취합해 이곳에서 정기적으로 모여 회의합니다. 농민들의 요구사항을 놓고 환경단체 등과도 같이 연합해 협의하고, 한목소리로 정치권에 요구하는 거지요.”
  정치권에 닿기 어려운 소농과 조건불리지역에 보조금이 더 가도록 정책의 방향을 바꾸는 것도 협회의 역할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독일에서 60ha, 바덴뷔르템베르크주에서만 5ha의 농지가 매일 사라지고 있어요. 더는 농지가 사라지지 않도록 정치권에 요구하고 있습니다. 초지가 사라지면 소뿐 아니라 초지에서 사는 다양한 생명도 함께 사라진다고 계속 압박하고 있어요.”

홍보담당자 엘스너씨는 ‘농업은 다채롭다’는 표어로 협회의 정체성을 말하고 있다.
홍보담당자 엘스너씨는 ‘농업은 다채롭다’는 표어로 협회의 정체성을 말하고 있다.

  정작 협회는 정치적 색깔을 띠지 않는다. ‘농업은 다채롭다(Landwirtschaft ist bunt)’라고 쓰인 홍보물이 그것을 설명해준다. 정치든 품목이든 어느 한쪽에 치우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농민들의 포괄적인 이익을 위해 활동한다는 뜻이다.
  산과 초지와 나무, 농가와 소들이 어우러진 사진을 보여주며 엘스너 씨가 말했다.
  “만약 농민이 없다면 이 풍경은 어떻게 변할까요? 아마 보기 싫은 덤불로 변할 겁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문화경관을 유지하는 것이 농민의 역할이고, 열악한 환경에서도 농민이 농사를 계속 짓도록 유럽연합(EU)과 정부가 지원하는 것입니다.”

독일 남부 바이에른주 후글핑 마을.
독일 남부 바이에른주 후글핑 마을은 3천명이 되지 않는 작은 농촌이다.

마을의 가치를 미래에 두다
후글핑 마을
  독일 남부 바이에른주 후글핑 마을. 약 2850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작은 농촌이다.  마커스 후버(Markus Huber) 시장의 안내를 받아 시청 앞에 있는 복합문화공간으로 이동했다. 옛날 마구간을 개조했다는데 그 안에서 마을 어린이들의 서커스 연습이 한창이었다. 60명이 참가하는 서커스에는 그보다 더 많은 마을 청년과 어른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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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마구간을 개조해 주민들이 문화와 예술을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마구간을 개조한 복합문화공간에서 마을 어린이들이 서커스 연습을 하고 있다.
서커스 연습을 하는 마을 어린이와 봉사자들.

  서커스 천막을 지나 교회와 작은 정원, 표지 등을 지나쳐 갔다. 마을 복판을 가로지르는 개울물이 무척 맑았는데, 한쪽에 있는 거대한 펌프로 후버 시장이 직접 펌프질을 하는 시범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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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은 후글핑 마을의 중요한 자원이다.
마커스 후버 시장이 마을 사람들이 이용하는 공동 펌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마커스 후버 시장이 마을 사람들이 이용하는 공동 펌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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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년 역사를 자랑한다는 의용소방대. 소방물품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다.

  “마을 주민이 이렇게 물을 길어 필요한 곳에 씁니다. 우리에게 물은 아주 중요한 자원이죠.”
  150년 역사를 자랑한다는 의용소방대도 들렀다. 최신형 소방차 2대와 소방복, 소방모, 장갑, 소방화 등 소방 활동에 필요한 도구들이 가지런하게 정돈되어 있고, 역사를 알 수 있는 옛날 소방물품과 사진도 전시되어 있었다.
  “60명의 남녀회원이 소방대를 운영해요. 인근 10km 이내에서 비상 상황이 벌어지면 2분 내 출동하게 되어있죠. 물론 모두 자원봉사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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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로원과 건너편에 있는 유치원. 노인과 어린이가 가까이서 서로를 돌본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양로원(위)과 건너편에 있는 유치원(아래). 노인과 어린이가 가까이서 서로를 돌본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보통 200년 이상이 되었지만 고풍스러우면서도 깔끔하게 정돈된 집들을 지나쳐 노인과 장애인 보호시설 앞에 멈췄다.
  “이 시설은 12년 되었는데, 어르신과 장애인들을 다른 곳으로 보내지 않고 마을에서 보호하는 겁니다. 방이 17개가 있는데 현재 꽉 찼어요. 건너편에는 유치원이 있는데, 6세 미만 어린이가 130명 있어요. 노인과 어린이가 가까이서 서로를 돌본다는 개념으로 설계했죠.”
  후글핑 마을에서는 30개의 자발적인 단체가 활발하게 움직인다. 소방서, 축구, 탁구, 청소년 모임, 사냥, 댄스, 시니어, 봉사자 단체 등 내용과 성격도 다양하다. 이런 단체들이 마을의 일에 한마음으로 동참하면서 마을이 친화적으로 변했다.

  “우리는 마을의 가치를 미래에 두고 있어요. 작년에 모험 놀이터를 만드는데 160명의 주민이 자발적으로 일한 덕분에 10주 만에 끝낼 수 있었죠. 원래는 40만 유로가 든다고 했는데 마을 주민들이 몇천 시간을 봉사해 15만 유로로 절약했지요.”
  이러한 마을 활성화의 원동력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후버 시장은 명쾌하게 답한다.
  “주민들의 자발적인 헌신이 핵심입니다. 작은 마을이지만 공동체 구성원들이 지닌 관심사가 다 달라요. 하지만 주민들이 한마음으로 마을의 발전 방향을 합의했고, 연방정부의 지원금이 있어서 실현할 수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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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글핑 마을 주민들은 마을 안에 있는 축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후글핑 마을 주민들은 마을 안에 있는 축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마을을 둘러보다 축산농가를 발견했다. 마을 안 축사에 대해 마을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농가는 원래 있었던 것이어서 마을 사람들은 당연하게 받아들인다는 답이 돌아왔다.
  후글핑 마을은 독일연방식품농업부가 주관하는 ‘우리 마을은 미래가 있습니다(Unser Dorfhat Zukunft, UDHZ)’ 2023년 제27회 대회에서 약 1100개 마을 중 금상을 받았다. 이 대회는 독일 지역사회와 농촌 발전을 장려하기 위해 주민 3000명 이하의 마을공동체를 대상으로 3년에 한 번씩 개최한다. 1957년 처음 시작할 때 대회 이름은 ‘우리 마을은 더 아름다워져야 합니다(Unser Dorf soll schöner werden)’였다. 주로 미화와 경관 개선에 치중했던 마을 만들기 프로그램은 1993년 현재의 이름으로 변경되었고 2016년부터 농촌개발과 지역 가치 창출이라는 연방프로그램으로 발전되었다. 내용도 주민들의 사회적 통합과 문화적 가치, 지속 가능성을 주요 목표로 하며 진화되었다.
  2024년 1월, 후글핑 마을 주민들은 연방농업부장관이 주최한 ‘큰마을축제(Großes Dorffestin Berlin)’에 초대되어 베를린에 다녀왔다. 이번 수상으로 마을 주민들의 자긍심과 마을의 가치가 한껏 높아지고, 공동체가 더욱 활발하게 움직이는 동력을 얻었다.
  “시장으로서 저의 역할은 공동체 의식이 가라앉지 않도록 계속 노력하는 겁니다. 작은 하나가 무너지면 도미노처럼 무너질 겁니다. 궁극적으로 사람들이 마을을 떠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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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 시위, 뒷 이야기
  2024년의 시작을 시끄럽게 했던 유럽 농민 시위에 대한 연수자들의 관심이 단연코 컸다. 현장에서 만난 요세프 히머 전 켐프텐시농업국장은 농민 시위에 대해 ‘통이 넘쳤다’고 진단했다 “농업과 농민은 사회의 기본을 이루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사회에서 좋지 않은 이미지와 처우를 받고 있다”며, 여기에 2023년부터 시작된 EU 공동농업정책(CAP)이 농민에게 더욱 불리하게 적용된 것을 이유로 들었다. 특히 독일 농민들은 CAP보다 더 엄격하게 적용하고 보조금과 세금 면제 혜택 등을 삭감하거나 감소하는 정책에 대한 반발이 컸다고 보았다. 프랑수아 오페오 프랑스 타른축산협회 전문가 역시 프랑스 농민들의 불만의 원인을 농업인에 대한 과도한 규제로 보았다.
  히머 박사는 시위 결과에 대해 “농지 4% 휴경 조항이 중단되었고, 살충제 사용 50% 감축 부분도 잠정적으로 중지되었으며, 자연복원법이 보류되는 등 효과가 있었다”고 보았지만, “언제든 다시 문제가 대두될 수 있다”고 경계했다. 장 클로드 윅 타른농민협회 회장도 “프랑스 정부가 농민의 요구를 상당 부분 수용했지만, 프랑스 정부의 법안이 EU에 상정되어 실제 변화를 가져올 것인가는 낙관하기 어렵다”고 의견을 피력했다. 그는 “프랑스 농민들은 농업이 변해야 하는 것을 알고 있다. 다만 농민들에게 시간을 좀 달라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어쨌거나 유럽의 농민 시위는 국민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 이유는 작목과 규모와 농사 방식에 상관없이 범농업계가 협력해 한목소리를 냈다는 것이다.

  유럽에 머문 15일 중 14일 눈이나 비를 만났다. 호두가 특산물인 지역에서는 호두나무가, 포도주 생산농가에서는 포도밭 나무 전체가 얼어 죽었다는 말도 들었다. 기후 위기는 세상의 농민들이 가장 먼저 맞닥뜨리고 있다는 말이 실감 났다.
  바덴농업협회의 슬로건 ‘농업은 다채롭다’는 말은 농(農)이 지닌 다양한 가치로도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저마다의 방식으로 농을 포기하지 않고 이어가는 이들에게 다채롭게 한마음으로, 연대의 손을 내밀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