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강보리
일손이 부족하다는 어머니의 연락에 잠깐 도와드리러 시골에 내려온 지도 벌써 6년 차. 시간이 지나갈수록 당연히 해오던 일들에 질문을 던지며 앞으로 더 나아가기 위한 이유를 찾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여러 세대에 걸친 지속 가능한 농업을 할 수 있는지, 대를 잇는 열정은 어디에서 오는 건지 마음속에서 맴돌던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해보고자 2024년 4월, 17명의 농민, 연구자, 기자, 활동가로 구성된 연수단의 일원으로 프랑스와 독일, 스위스, 오스트리아의 ‘미래가 있는 농촌, 지속 가능한 농업’ 현장을 둘러보았다. 모든 시간이 귀했지만, 특히 지속 가능한 농업·농촌의 희망을 보여주는 프랑스의 두 농장이 나에게 크게 다가왔다.
역사를 이어가는 가족농, 끌로 트리그디나
“농장에 들어오는 순간 여러분은 발데스 가문의 역사에 들어오는 것과 같습니다.”
프랑스 남서부에 위치한 말벡1) 와인의 주요 생산지 까오르(Cahors). 그 지역에서도 가장 중심부에 위치한 ‘끌로 트리그디나2)’는 장뤽 발데스(Jean-Luc Baldès) 씨와 사빈 발데스(Sabine Baldès) 씨 부부가 6대째 운영하는 유기농 포도주 농장이다. 1830년 첫 포도나무를 심은 것을 시작으로 200년 가까운 역사와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농장으로, 2023년부터 딸 줄리엣이 대학에서 포도주 생산과 마케팅 과정을 이수한 뒤 합류해 7대째 내려오는 가문이 되었다.
농장 입구에 들어서자 모던한 건물 앞 독특한 조형물이 우리를 맞이했다. 네모난 나무 프레임 안에 각각 특색 있는 돌과 흙이 담겨있었다. 사빈 씨는 발데스가 와인용 포도가 자라는 까오르 지역의 ‘떼루아(Terroir)’를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떼루아는 지역의 독특한 자연환경이 그곳에서 생산되는 농산물, 특히 와인에 미치는 영향을 의미하는 프랑스어다. “포도의 품종도 중요하지만, 포도가 자라는 밭의 토양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토양을 오염시키지 않고 영양분이 풍부한 원상태를 계속해서 지켜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1) 말벡(Malbec): 적포도주를 만드는 데 사용되는 보라색 포도 품종.
2) 끌로 트리그디나(Clos Triguedina): 트리그디나(Trigdina)는 프랑스 남부 전통언어 ‘me trigo de dina’ 의 줄임말로 ‘나는 정찬을 갈망한다’라는 뜻이다. 사빈 씨는 그 내용을 “나는 저녁식사에 늦었다, 배가 고프다”라는 의미라 설명하면서, 농장 위치가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의 일부이자 순례객들이 밥을 먹던 곳이라는 역사를 담아 농장 이름을 지었다고 덧붙였다.
포도밭은 해발의 높이, 고도에 따라서 구획하는데, 이를 ‘테라스(Terrasse)’라고 부른다. 강과 같은 고도에 있는 첫 번째 테라스는 습기가 너무 많아 좋은 품질의 포도를 수확하기 어렵다. 발데스가는 강보다 약간 높은 곳에 있는 두 번째 테라스부터 세 번째, 네 번째 테라스까지 고도에 적합한 다양한 품종의 포도를 재배하고 있다.
연수단이 도착하기 일주일 전, 4월에 내린 서리로 인해 냉해 피해를 본 포도나무의 잎을 모두 잘라냈다고 덤덤하게 이야기하는 사빈 씨. 전체 재배면적 75ha 중 45ha, 60%가 넘는 피해를 보았음에도 긍정적인 태도를 가질 수 있는 데에는 발데스가의 오래된 경험과 역사가 있다. 테라스에 따른 다양한 종류의 토양을 갖추고 있다는 것의 최대 장점은 기후 변화에 대응할 수 있다는 점이다. 65% 냉해 피해를 본 두 번째 테라스에 비해, 일조량이 높은 세 번째 테라스는 그 피해가 훨씬 적었다. 또한 해마다 와인의 일부를 판매하지 않고 저장하며 위기에 대응하고 있어, 큰 피해에도 대처가 가능하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했다.
건물 지하에 위치한 와인 숙성실에는 오크통이 가지런히 줄을 맞추고 있었다. 원래는 에어컨이 없어도 15℃의 온도가 자연스레 유지되었지만, 최근 몇 년간 지구 온도 상승으로 냉방 시설을 설치했다고 한다. 숙성실 견학을 마치고 다이닝 코스에서 정성스럽게 준비된 음식을 곁들여 발데스가의 와인을 시음하는 시간을 가졌다. 120년이 넘는 포도나무의 열매로 만든 발데스가의 최고급 와인인 ‘클로스 트리게디나’부터 다양한 풍미의 디저트 와인까지. 장뤽 씨의 애정이 담긴 친절한 설명이 더해져 와인을 더 깊고 풍부하게 즐길 수 있었다.
장뤽 씨는 40년간 말벡 와인을 끊임없이 연구했을 뿐만 아니라, 이를 서비스화하기 위해 새로운 공간을 지어서 방문객에게 스토리가 있는 경험을 제공하고 있다. 1차 생산뿐만 아니라 농산물의 부가가치를 높일 수 있는 2차, 3차 산업을 함께 진행하여 사업의 규모를 확대하고 다양성을 확보하며 위험을 분산시키는 효과를 얻었다. 이를 통한 경제적인 안정감은 농장을 지속할 수 있는 또 하나의 힘이 된다.
“좋은 포도 없이는 좋은 포도주가 없고, 포도나무와 땅을 잘 관리하지 않으면 좋은 포도도 없습니다.”
7대를 거치며 우여곡절이 많았겠지만, 계속해서 땅과 포도나무를 지키기 위한 노력과 품질을 높이기 위한 끊임없는 희생과 노력이 튼튼한 뿌리가 되어서, 발데스가는 웬만한 비바람에도 쉽게 쓰러지지 않는 힘을 가지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농업을 잇는 새로운 대안, 가엑
가엑(GAEC, Le Groupement Agricole d’Exploitation en Commun)은 프랑스 소농들이 협력하여 운영하는 공동농업그룹이다. 1962년 농업의 현대화를 통해 식량자급률을 높이기 위한 방안 중 하나로, 소규모 농장과 농업인들의 협업을 지원하며 지속 가능한 농촌을 위한 안전망의 역할을 하고 있다.
프랑스 알비 지역에서 전통 소(牛) 품종인 ‘블롱드 다키텐(Blonde d’Aquitaine)’을 사육하고 있는 장 폴 누베(Jean Paul Nouvel) 씨는 1983년 고향에 내려와 할아버지의 농장을 물려받은 승계농업인이다. 그에게는 두 명의 자녀가 있지만, 농업을 이어가겠다는 뜻과 의지가 없다. 그는 2017년 가엑에 가입하였고, 현재 파비앙 에시에(Fabien Assié) 씨를 비롯한 세 명의 귀농한 청년농부들과 공동으로 농장을 운영하고 있다.
장 씨는 송아지를 어미 소와 분리해 따로 키운다. 어미 소는 풀밭에서 자유롭게 풀을 뜯어 먹은 후, 송아지에게 돌아와 젖을 먹인다. 송아지는 8개월에서 10개월 동안 오로지 어미 소의 젖만 먹으며 성장하는데, 이는 다른 지역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전통적인 양육 방식이다. 어미 소와 송아지가 밖에서 풀을 뜯어 먹는 것보다 손이 많이 가지만, 단백질 함량이 높은 고품질의 고기를 생산할 수 있어 가엑의 다른 구성원들의 동의하에 전통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가엑으로 획기적으로 노동시간이 줄어들었어요. 덕분에 사진작가로 활동할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생겼습니다.”
가엑은 농업인들이 투자한 자본금을 지분으로 나누어 운영하고, 농업회의소를 통한 전문적인 컨설팅을 기반으로 분쟁을 방지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또한 모든 농장주의 역할 분담으로 안정적인 생산, 관리, 판매가 이루어지고 노동시간이 획기적으로 줄어들어 농업인 삶의 질이 크게 향상된다. 2011년부터는 부부가 동시에 가입할 수 있게 되면서 여성농업인 권리 향상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새로운 농업을 시작하는 사람들의 70%가 가엑에 가입한다고 한다. 농업 기반이 없는 신규농업인이 토지나 기계 구입 등 큰 투자 없이도 농사지을 수 있는 또 하나의 기회로, 이는 지속 가능한 농촌을 만들어 가는 좋은 대안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농업을 잇는다는 것, 지속 가능성을 이끄는 일
프랑스는 전체 농가의 70~80%, 한국은 90% 이상이 가족농의 형태다. 연수에서 본 유럽의 가족농은 자녀가 어릴 적부터 농업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며 가치와 철학을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하고, 오랜 시간 전문적인 교육 및 경험을 통해 실력을 키우도록 하여 대를 잇는다. 가족농의 형태는 절대적인 시간과 신뢰는 물론, 경험을 통해 가르칠 수 있는 여건, 자유롭고 편하게 의사소통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특히, 기반이 있는 상태에서 시작할 수 있고 긴 시간 축적된 유무형의 자산은 세대를 거듭하며 성장할 수 있는 중요한 자원이 된다.
‘학교 안 가는 날=일하는 날’이었던 어린 시절 나에게 농업은 힘들고 쉼 없는 일이었다. 일하기 싫은 어린 마음에 고등학교도 집에서 5시간이나 떨어진 곳으로 지원했다. 그럼에도 다시 농촌으로 돌아와 가족과 함께 농업을 하는 까닭은 어렸을 때부터 보고 듣고 느꼈던 농업의 가치와 철학이 마음속에 깊게 새겨져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나라와 환경에 이바지하고, 이웃에 이바지하는 이만한 일이 없다”며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어머니를 보며 나 또한 농업에 자부심을 느끼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자 알게 모르게 노력하고 있는 것 같다.
가엑과 같은 협업모델은 혈연관계가 아니더라도 가족농이 가지는 장점을 살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농사가 처음인 신규농업인도 선배농업인의 가치와 철학, 시간의 축적으로 얻어진 지혜를 배운다. 함께 기준을 만들고, 명확한 규칙과 공평한 권한을 통해 효율적으로 농장을 운영하며, 가족농과 더불어 농촌을 이어가는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노인에게 뛰라고 하지 않는 것처럼 오래된 포도나무에 많은 양의 포도를 생산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발데스가에서 보았던 고귀한 포도나무가 떠오른다. 최고급 와인을 만드는 오래된 포도나무는 깊게 뻗은 뿌리로 영양분을 흡수하여, 적은 수의 열매에도 농축된 풍미와 에너지를 맺는다. 120년이 넘도록 한자리에서 최상의 열매를 맺어내는 포도나무를 통해 농업의 진정한 가치와 품격을 엿보았다.
대를 잇는 곳에 농업과 농촌이 있다. 농업·농촌의 소멸을 이야기하고 있는 오늘날, 오랜 시간 축적된 경험과 지식이 세대를 이어가며 문제를 해결해 나갈 실마리가 되어 주지 않을까. 열정이란 단순히 뜨거운 마음이 아니라 지속 가능성을 이끄는 가치와 철학,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인내심이라는 것을 되새겨본다.
필자 강보리: 농업회사법인(주)우리원 실장
‘약식동원(藥食同源, 약과 음식은 그 근원이 같다)’을 실천하겠다는 생각으로 대학에서 식품영양학을 전공했다. 대학원 졸업 후 국립암센터에서 식습관과 질병의 상관관계를 연구하다가, 현장에 도움이 되는 활동을 하기 위해 2018년에 고향인 전남 보성군 벌교로 내려왔다. 현재 (주)우리원에서 어린이부터 청년, 농업인, 소비자를 대상으로 하는 친환경농업체험교육을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