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신수경 편집장
“먹는 것이 곧 농업이다.”
미국의 농부이자 시인인 웬델 베리의 말을 빌리면, 우리는 하루에 두세 번, 식탁에 앉는 순간 농업을 만난다. 그러니까 농업은 모두가 함께 관심을 두고 지켜야 하는 것. 2023년 4월, 프랑스 남부 툴루즈와 알비 지역에서 확인하고 싶었던 것은 지속 가능한 ‘농農’을 위한 도시민과 농민의 다양한 연대 방식과 그것이 아직도, 앞으로도 유효하냐는 질문에 대한 명쾌한 답이었다.
‘함께 농사짓고 위험도 함께 넘는다’
그랑 자르뎅Grand Jardin 농장_아맙AMAP 회원 농가
프랑스 툴루즈시 인근에 있는 그랑 자르뎅 농장. 농장주 도미니크Dominique LAMAMY와 마리Marie DESBEAUX 부부가 농장 문을 연 것은 1996년이었다. 습지를 개간해 만든 농장을 인수하고 이전 농장주가 관행농으로 짓던 토지를 30년 가까이 자연농업으로 일구어 왔다. 농장 규모는 총 3ha. 농산물은 대부분 노지에서 재배하고 일부 비닐하우스에서 키우기도 하는데, 유인작업을 최소화하고 전분으로 만든 생분해 필름을 쓴다.
“자연은 내버려두면 알아서 자라요.”
예쁠 것도 없고 아무렇지도 않은 풀과 작물이 공존하는 땅에서, 알아서 자란 30여 종의 채소가 철에 맞춰 나오면, 도미니크와 마리는 농산물을 아맙AMAP 시스템으로 유통한다. 아맙은 ‘Association pour le maintien d’une agriculture paysanne’의 약자로, 우리말로 ‘소농유지협회’로 해석할 수 있다. 1970년대 초 일본에서 시작된 산소제휴(産消提携, teikei)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된 CSA(Community Supported Agriculture, 공동체 지원 농업)는 다양하게 변주되고 있는데, 아맙은 CSA의 프랑스 버전이다. 2001년 설립 후 빠른 속도로 사라지는 소농을 지켜야 한다는 필요와 안전한 먹을거리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확산하면서 2021년 현재 아맙은 프랑스 전역에 2400개가 넘었고, 12만 명의 소비자와 6500명의 농민이 참여한다.
아맙을 주목하는 이유는 소비자와 농민의 강력한 신뢰와 연대로 운영된다는 점이다. 소비자 회원은 지역의 아맙 회원으로 가입하면서 농민이 농산물을 생산하는 비용을 충당하는 회비를 먼저 내고, 농산물이 생산되는 시기를 기다려 주기적으로 공급받는다. 소비자의 가정이 아니라 아맙에서 미리 정한 장소(예를 들면 광장)로 가서 소비자가 직접 가져오는 시스템이다. 또한, 농장에 가서 농작업과 수확 작업을 돕고, 자연재해 등으로 농산물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도 소비자는 회비를 돌려받거나 하지 않는다.
“아맙은 생산자와 소비자가 같이 크고 같이 삽시다, 서로에게 하는 약속입니다. 직거래보다 더 적극적이고 강력한 연대인 거죠. 그래서 농부시장에 나가다가 아맙으로 선회했습니다.”
그랑 자르뎅 농장의 회원은 현재 35명. 한때는 90명까지 간 적도 있지만, 부부의 노동력으로 가능한 정도로 줄였다. 연중 36주간 발송하는 꾸러미는 상자당 25.5유로(약 3만 6000원), 농장주 수익은 연간 3만 2000유로, EU의 보조금은 약 3500유로 정도라고 했다. 1주일에 50시간 이상 일하지만 한 사람의 월급을 환산하면 1000~1200유로 정도로 프랑스 최저임금 1400유로에 미치지 못한다. 그런데도 이들의 만족도는 높은 편이었다.
“연초에 생산비용과 인건비를 고려해 생산자가 꾸러미 가격을 정해요. 농기계, 설비가 고장 나면 스스로 고치고 농산물 일부는 자가 채종하고, 먹거리를 자급자족하면서 비용을 줄이죠. 돈을 벌 생각이었다면 이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 거예요.”
얼마 전, 비닐하우스가 무너졌다. 급히 회원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10명이 농장으로 찾아왔다.
“둘이서는 꿈도 못 꿀 일이었지만, 열 명이 함께해서 다시 세울 수 있었어요. 자연의 변화, 생태계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소비자의 인식은 바뀌지 않죠. 단순히 일손 돕기가 아닌 지속 가능한 농업에 공감하는 동지를 만나는 거예요.”
‘동물과 교감하고 전통을 잇는 농장’
오 페르 아 슈발(말발굽) 교육농장Ferme pédagogique AU FER À CHEVAL
프랑스 남부 타른 지역에 있는 오 페르 아 슈발 교육농장. 오페르 아 슈발은 말발굽이라는 뜻으로, 농장 입구에 말발굽으로 형상화한 간판이 있다.
35년 전 문을 열었고, 현재는 농장을 승계한 알렉산드라Alexandra CARREL와 실뱅Sylvain CARREL 남매가 운영한다. 규모는 약 40ha로, 90명이 동시에 묵을 수 있는 숙박 시설과 수영장, 교육 활동이 가능한 편의시설을 갖추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농장 이름에 맞게 주로 말을 사육하고 말 관련 활동이 중심이 되지만, 승마보다는 말과 교감하는 것, 말의 생태를 관찰하고 이해하는 데 목표를 둔다.
“승마는 고급스포츠여서 평범한 아이들이 접하기 어렵죠. 학교 단위로 25명이 한 그룹으로 오는데, 그중 서너 명을 빼고는 말을 본 적도 없는 학생들이 대부분이에요.”
말들을 한 칸씩 격리하는 다른 승마장과는 달리, 말들을 자연스럽게 무리 지어 키운다는 것도 이 농장의 특별한 점이라고 했다. 말 40마리를 사육하면서 소, 닭, 돼지, 염소, 토끼, 양, 꿩, 칠면조 등 전통적인 프랑스 농가의 가축들을 다양하게 만날 수 있도록 한다.
“아이들이 물어요. 여긴 왜 사자가 없어요? 아이들이 동물을 보는 일이 기껏해야 동물원인 거예요. 도시에 살면서 토끼 한 번, 닭 한 번 보지 못한 아이들이 많아요. 내가 사는 곳이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아이들이 경험하고, 그것이 어떤 계기가 될 수 있었음 좋겠어요.”
농장 한쪽에 상자 텃밭이 여러 개 있었는데, 잡초를 막기 위해 나뭇가지를 비롯해 양털까지 다양한 자연의 재료로 덮어놓은 것도 눈에 띄었다.
오 페르 아 슈발 농장의 프로그램은 프랑스 정규 교육과정과 연관되어 움직인다. 하루 프로그램에서 2박 3일 프로그램 등 학교와 연계하는 프로그램 외에 프랑스는 여름방학(7~8월) 이외에 2월, 4월, 10월과 12월에 2주씩 작은 방학이 있는데, 이러한 단기방학 때 교육농장에서 전통과 농업을 체험하도록 하는 경우가 많다.
농장이 있는 타른 지역 역시, 인구 감소와 고령화 문제를 안고 있다. 알렉산드라는 말발굽 교육농장의 의미를 지역에서 고용을 창출하고, 넓은 면적의 땅을 생태적으로 보존하고 있다는 데서 찾는다.
“지역의 전통성을 유지하고 생태환경을 보존하면서 이곳을 떠나지 않고 살 수 있는 일자리를 꾸준히 유지하고, 또 우리의 아이들 중 누군가가 이 농장을 잇는다면 좋겠습니다.”
‘직접 재배한 밀로 빵을 만들어 소비자를 만난다’
카스텔 뮈스케 농가FERME DE CASTELMUSQUET
카스텔 뮈스케 농장의 장 프랑수아Jean François 씨는 농부가 될 생각은 없었다고 했다. 그런데 유기농에 관심이 생겼고, 1980년대 프랑스 최초 유기농업학교를 졸업했다. 1992년 농민이었던 아버지가 은퇴하자 농장을 이어받아 유기농으로 전환했다.
“그때만 해도 유기농이라는 개념이 없었어요. 소비자를 찾아서 시장을 개척한다는 자체가 무척 어려웠죠. 그래서 밀로 빵을 만들어서 파는 방법으로 방향을 잡았어요.”
프랑수아 씨는 35ha의 농지에 주작목인 밀을 비롯해 병아리콩과 렌틸콩을 재배하고 25ha의 목초지에서 20두의 지역 품종 소를 키운다.
“최종 결과물이 좋은 품질을 얻으려면 처음부터 끝까지 다 관리해야 합니다. 밀을 재배해 천연발효종을 넣어 빵을 만드는 방식이 소비자한테 갈 때까지 일정한 품질을 유지할 수 있는 최적의 방법이었던 거죠.”
프랑수아 씨는 생산한 빵과 밀가루, 콩, 식용유 등을 금요일마다 농장에서 직판한다. 녹탐비오와 페르낭 펠루티에 광장 등 두 군데 파머스마켓에 나가는데 녹탐비오(유기농 야시장)는 유기농이라는 개념이 없던 1980년대부터 유기농으로 농사를 짓는 12개 농가들이 합심해 화요일 저녁에 꾸준히 열고 있는 아주 작은 시장이고, 페르낭 펠루티에 광장에서 토요일마다 열리는 장은 좀 더 대중화된 장이다.
“유기농 야시장에 오는 소비자에겐 별다른 설명이 필요 없어요. 반면 일반 파머스마켓에서는 생산 과정과 생산품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야 하는 일이 많습니다. 대신에 많은 사람을 만나고 관계 맺는다는 장점이 있죠.”
프랑수아 씨의 1년 매출액은 약 20만 유로. 이 중 2만 유로가 소득으로 남는다고 했다. 여기에는 본인의 인건비로 월 1000유로 남짓과 국가보조금 2만 3000유로가 포함되어 있다.
“사실 프랑스 농가 90%가 국가지원금이 없으면 직원들 월급을 줄 수 없는 상태예요. 저는 그래도 빵을 만들어서 팔았기 때문에 농장 운영하면서 직원 월급도 주고 필요한 농기계도 구입할 수 있었죠. 큰돈은 벌지 못했지만 내 몸을 움직여서 일해서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던 농부로서의 삶에 만족해요.”
50대 후반인 프랑수아 씨는 약 5년 후에 농민연금을 받게 된다. 은퇴하면 무엇을 하고 싶냐는 질문에, 대만에서 사는 아들에게도 가보고 싶다고 했다. 이어 농사일로 못했던 일들을 하고 싶고, 나의 농사 경험과 지식을 나누고 싶다며 환하게 웃었다. 무척 행복한 얼굴이었다.
현지에서 만난 전문가 프랑수아 오르페오M. François Orfeo 씨는 프랑스 농업 현황을 설명하면서, 프랑스 농산물 유통의 92%를 6개의 대형유통업체가 장악하고 있고 농민 직거래 1.7%, 농부시장은 2%에 불과하다는 통계와 함께, 우리가 보았던 아맙이나 직거래, 농부시장 등은 보편적인 유통방식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나 소수라 해도 그들이 주는 메시지는 선명했다. 도시민과 농민의 연대는 농민을 돕기 위한 것이 아니라 먹고 사는 모두를 위한 것이며, 사회를 지탱하는 힘이라는 사실에 대한 확인이다.
사진 이진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