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익은 풍경에서 만들어 내는 상상력

남이섬 또는 나미나라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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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섬의 아침은 한적하다,
7시 45분 첫배가 들어오기 전까진. 청평호가 만들어내는 물안개가 볼만하다는 말을 듣고 산책길에 나섰는데, 안개는 보이지 않고 투두두둑 소리가 걸음을 잡는다.
밤새 호숫가에 얼었던 얼음이 고약한 제 성질을 못 이기고 깨지는 소리다.
메타세쿼이아 숲을 지나치는데 자전거 한 대가 나를 지나친다. 무심히 뒤를 돌아보니 거대한 자전거 군단이 나를 향해 일제히 달려오고 있다. 첫배가 들어왔다.
드라마 겨울 연가 촬영지로 제2의 전성기를 누리던 2006년, ‘나미나라 공화국’으로 엉뚱한(?) 독립선언을 한 남이섬의 또 다른 이야기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남이섬 입구의 입춘대길문. 춘천시의 지원으로 만들었다.
남이섬 입구의 입춘대길문. 춘천시의 지원으로 만들었다.
배에서 나온 자투리 철판으로 문을 만들고, 버려진 나무, 깨진 그릇으로 꾸민 세미나실 ‘별천지’
배에서 나온 자투리 철판으로 문을 만들고, 버려진 나무, 깨진 그릇으로 꾸민 세미나실 ‘별천지’
죽은 나무를 거꾸로 세워 ‘역발상 나무’라 이름 지었다
죽은 나무를 거꾸로 세워 ‘역발상 나무’라 이름 지었다

장난기 가득한 역발상
생활권은 가평, 행정구역으로는 춘천에 걸쳐져 있는 남이섬. 섬에 들어가려면 누구라도 ‘나미나라공화국’ 입국 심사를 거쳐야 한다. 배에서 내리면 섬으로 들어가는 문이 보이는데 입춘대길入春大吉이라는 간판이 붙어있다. 한겨울에 웬 봄? 그런데 자세히 보면 설립이 아니라 들입이다. (본래의 뜻과 달리) 이곳(춘천)에 들어오면 큰 행운이 온다는 뜻이다. 공화국답게 헌법도 있고 ‘나미짜’라는 문자를 비롯해 남이통보(화폐), 국립 중앙은행, 방송국과 기상대, 우체국도 있다. ‛국가’로서 유니세프랑 결연도 맺었다. 이렇게 남이섬은 온통 장난기로 가득하다.
태풍을 맞아 죽은 나무를 거꾸로 세워놓고는 ‘역발상 나무’라 이름 지었다. 사람들이 먹고 버린 소주병은 시계로, 냄비받침으로, 아름다운 장식품으로 다시 태어났다. 세미나실인 ‘상상낙원 별천지’의 대문은 배에서 나온 자투리 철판으로 만들었다. 남이장대의 기와도 재활용품이다. 오늘날 남이섬의 정체성. 그 하나의 중심축이 바로, ‘세상에 버려질 것은 없다’ 이다.

남이섬 호텔 정관루 로비. 초록색 소주병으로 만든 작품들이 즐비하다.
남이섬 호텔 정관루 로비. 초록색 소주병으로 만든 작품들이 즐비하다.
정관루 호텔은 국내의 작가들이 자신만의 독특한 색깔로 방을 꾸며놓았다.
정관루 호텔은 국내의 작가들이 자신만의 독특한 색깔로 방을 꾸며놓았다.
드라마 ‘겨울연가’로 유명해진 남이섬은 2006년, 겨울연가로부터 독립한다.
드라마 ‘겨울연가’로 유명해진 남이섬은 2006년, 겨울연가로부터 독립한다.

‘한정훈 방’으로 주세요
남이섬에 단 하나 있는 호텔 정관루. 강우현 (주)남이섬 대표(62)는 낡은 호텔을 리모델링하면서 작가들에게 특이한 제안을 했다. “전 세계 사람들이 이용하는 남이섬 호텔에 본인의 방을 만들어보지 않겠느냐”는 것. 제안을 수락한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으로 방을 꾸몄다. 그래서 정관루 본관 46개 방은 제각각 다른 빛깔이다. 이곳을 자주 찾는 사람들은 201호, 302호가 아니라 누구누구 작가 방으로 주세요, 라고 특별주문을 한다.
방에 들어오면 TV도 없고 인터넷도 없어 심심할 것 같지만, 자연히 주변의 것들에 눈길이 머문다. 벽에 걸린 작품, 다양한 눈높이의 책들, 그리고 탁자 위에 켜켜이 쌓여있는, 이 방에 묵었던 사람들의 흔적을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2006년, 겨울연가를 잊다
2002년에 방영된 드라마 ‘겨울연가’의 힘은 대단했다. 자연히 겨울연가의 중심촬영지였던 남이섬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일본을 시작으로 대만, 홍콩, 중국, 동남아와 중동까지 외국인 관광객들이 해마다 급증했다. 하지만 드라마 촬영지가 반짝했다 사라진 경우가 허다했었음을 교훈삼아 남이섬은 2006년, 겨울연가를 잊기로 한다. 자연환경을 살리고, 재능 기부를 받고, 동화적 상상력과 스토리텔링, 사람들의 자발적 참여와 협력, 재활용, 생태계 존중 등으로 다양한 볼거리 즐길 거리가 풍성해지면서 겨울연가로부터 완전히 ‘독립’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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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섬에서 만나는 낯익은 풍경들. 기증받은 지역의 이름을 땄다. 왼쪽 위부터 청송사과나무, 인사동길, 청담빛길.
남이섬에서 만나는 낯익은 풍경들. 기증받은 지역의 이름을 땄다. 왼쪽 위부터 청송사과나무, 인사동길, 청담빛길.

낯익은 이름을 만나는 즐거움
길이 3km 남짓한 섬을 거닐다 보면 서울 인사동 길도 만나고, 서울 송파구에도 갔다가 바로 경북 청송으로 공간 이동할 수 있다. 인사동 길을 보수 공사할 때 나온 돌로 만든 길에는 ‘인사동 길’ 이라 이름 붙이고, 가을이면 너무 많아 골머리를 썩이던 송파구 은행잎을 가져다가 가로수길에 넉넉히 뿌려놓고 ‘송파은행길’이라 했다. 강남구에서 기증한 등을 달아 ‘청담빛길’을 만들고 사과로 유명한 청송에서 기부한 사과나무도 청송이라는 이름을 달았다. 사람들은 처음 본 풍경 속, 자신과 연이 닿아 있는 낯익음을 만나면서 마음이 따뜻해지고 섬이 더 친근해진다.
거창함이나 화려함이 아닌 익숙한 풍경 속에서 만들어내는 상상력, 그것이 힘이다.

글·사진 신수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