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학위를 받은 것은 1996년이다. 그전까지 내가 농업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국제 자원시장이라는 틀에서 쌀 시장에 관해 대학원 논문을 쓴 것이 거의 전부였다. 그것도 한국에 관한 것이 아니라 미국에서 벼농사를 짓게 되는 경제적 배경 그것도 케인스 시절 이후의 거시 경제정책과 농업법Farm Bill에 관한 것이었다. 80년대 학부에서 공부하던 시절에는 막연하게 미국의 농업이 세계에서 가장 강하다고 배웠다. 왜? 그런 질문은 없었다. “그냥 외워!” 난 성실한 학생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냥 외웠다. 90년대 초반, 대학원에 가서 왜 그렇지, 갑자기 그게 궁금해졌다. UR 통과 이후 WTO 출범을 위한 협상이 한참 진행되던 시점이다. 그래서 결국 그게 대학원 논문이 되었다.
경제학자, 농업을 만나다
그렇지만 그 이후 농업에 대해서 진지하게 들여다보지는 않았다. 대학원 시절에 공식적인 내 전공은 국제금융이었고, 그 이후에도 산업정책 중 환경과 관련된 것들을 주로 다루면서 박사 논문을 썼다.
농업에 대해서 처음으로 진지하게 공부를 시작한 것은 2004년의 일이다. 이천의 어느 농가에 연구진들을 모아놓고 ‘농업공부 모임’이라는 것을 만들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진짜로 농업을 들여다보기 시작하였다. 당시 한살림 등 이제 막 초창기를 벗어난 생협 쪽에서 농업에 대해서 정책적 접근을 해달라는 부탁이 많았다. 농업공부 모임이 처음 시작된 그 농가가 서구적 의미에서 시민지원농업CSA:Community-Supported Agriculture의 시범 농가가 되었다. 나중에는 현실적 의미로 해소되었지만 사회적 기업인 ‘콩세알’이 그곳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그 2004년이 딱 10년 전의 일이다. 당시에 내 주변의 동료 경제학자 특히 선배 경제학자들이 내가 농업을 공부하는 것에 대해서 간절하게 만류하였다. 지금도 농업은 사양산업이라, 농업경제학 전공자들이 응용경제학이나 생태경제학 같은 쪽으로 넘어가는 중인데, 주변에서는 ‘너는 환경과 생태라는 좋은 자산을 가지고 있으면서 뭐하러 이 사양산업에 시간을 들이려 하느냐.’고 묻곤 한다. 나는 그냥 내 양심 가는 대로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어차피 돈과 권력에 관심 있었다면, 경제학 그것도 생태경제학 전공할 이유도 없었고, 대기업을 거쳐 총리실까지 갔다가 중도에 사직할 이유도 없었다. 그냥 내 양심이 가는 대로 가기로 하였다.
돌이켜보면 그 2004년이 딱 10년 전의 일이다. 당시에 내 주변의 동료 경제학자
특히 선배 경제학자들이 내가 농업을 공부하는 것에 대해서 간절하게 만류하였다.
지금도 농업은 사양산업이라, 농업경제학 전공자들이 응용경제학이나 생태경제학
같은 쪽으로 넘어가는 중인데, 주변에서는 ‘너는 환경과 생태라는 좋은 자산을 가
지고 있으면서 뭐하러 이 사양산업에 시간을 들이려 하느냐.’고 묻곤 한다. 나는 그
냥 내 양심 가는 대로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도마 위에 오른 밥상』 그 이후
농업에 관해 공부하면서 기억에 남는 것이 몇 가지 있다. 노무현 시절에 6헥타르 정책이라는 이름으로 지금의 소농 구조를 대농 구조로 전환하려는 농정이 추진되었다. 당시 농지제도연석회의라는 시민단체 연대기구를 만들어서, 사무국장을 했었다. 도시민의 농지 투기를 전면적으로 개방하는 것을 막았다. 국회에서 식품위생법과 관련된 법안의 초안을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시민모임(민변)’ 송기호 변호사와 같이 준비하던 시절도 기억에 오래 남는다. 농업만으로는 농업을 지키기 어렵다고 생각해서, 식품안전과 생태를 결합하려는 시도가 이 시기에 진지하게 진행되었다. 결국, 저자로서 내가 처음으로 책 작업을 했던 것이 데뷔작이라고 할 수 있는 『도마 위에 오른 밥상(2006년)』이 되었다. 이후 한미 FTA가 추진되면서, 산업정책과 농업정책이라는 두 가지 관점으로 이 협상을 막는 일에 정말로 전력을 다했다. 법정 스님이 길상사 대중법회에서 내 졸저를 사람들에게 펼쳐 보이시면서 한미 FTA를 막고 농업을 살려야 한다고 하셨다는 얘기를 건네 들었을 때가, 부끄럽지만 영광스러운 순간이기도 했다. 생전에 법정 스님 손에 내 책이 들렸었다는 것, 평생 잊지 못할 영광일 것 같다. 스위스 농업과 관련해서 헌법 개정이 이루어진 사건, 영국의 식품, 환경, 식품이 통합된 환경식품농무부Department for Environment Food & Rural Affairs, DEFRA 등이 주로 내가 한국에 소개했던 외국의 농정사례들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학교급식이 추진되던 초창기에 외교부의 좀 억지스러운 주장을 막아낸 일이다. 학교급식 네트워크의 부탁을 토요일에 급하게 받아서, 일요일 오후까지 밤을 새우면서 WTO 조항들을 뒤졌다. 일요일 오후 위생 관련 조항에서 예외로 해석할 수 있는 조문을 찾아냈다. 지난달 당시 그 일을 같이 했던 사람들에게, 나중에 돌아보니 그때가 학교 급식 운동에서 결정적인 순간이었다는 얘기를 건네 들었다.
어느덧 나도 한국의 농업이 앞으로 10년, 어떻게 가야 할지 고민을 진지하게 하는 순간을 맞게 되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고 하니, 한국과 일본에서 같이 부탁을 받아서, 연말 즈음에 농업경제학에 관한 책을 한일 공동출간을 하게 되었다. 학자로서, 농업에 관한 큰 그림을 한 번쯤 그려봐야 하는 순간이 나에게도 왔다.
제도를 디자인하다 보니, 직불금을 농사짓지 않는 데에 주게 된 것, 이건 근본 철
학의 문제이다. 결국은 청년들에게, 생태적인 것에게 그리고 미래 가치와 관련된
것에 직불금을 비롯한 지원제도가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정책의 기본이 되어야
한다. 거의 재구축 수준의 보조금 조정 작업이 필요하다.
청년, 생태, 미래가치를 위한 보조금제도를 구축해야
지난 10년을 돌아보면, 한국과 일본이 공동으로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청년 농업의 위기이다. 고령화야 상식적으로 뻔한 것이다. 농업의 위기가 농촌 지역의 위기로 번져가는 것은 비단 한국과 일본의 문제만은 아니다. 유럽이나 미국도 농업을 살리기 위해서 지난 10년 동안 엄청나게 노력을 하기는 했는데, 위기를 완벽하게 극복한 나라는 거의 없다. ‘지지support’라는 단어가 농업만큼 확실한 곳도 별로 없어 보인다. 지표상으로 이탈리아 정도가 버티는 중인데, 이탈리아 경제가 유럽안에서도 워낙 특수해서 한국이나 일본에 보편적 해법으로 제시하기에는 좀 애매하다. 차이점은 좀 있다. EU 차원에서도 청년 농업직불금이 시행 직전 단계에 가 있고, 일본도 어느 정도는 제도화되어있다. 한국은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캠프에서 공약 검토를 했다고 건네 들었는데, 예산 문제로 잠자게 되었다. 청년들이 어떻게 농업에 진출할 수 있고, 그 진출 후에 어떻게 일정 정도 이상의 삶을 보장할 것인가, 장기적으로 보면 OECD 국가에서 농업에 대한 가장 큰 고민이 이것이다. FTA나 TPP같은 양자 체계로 갈 것이냐, 아니면 DDA를 살려서 그래도 조건이 완화된 다자간 무역체계로 갈 것이냐, 이것은 ‘늙은 농업’과 ‘젊은 농업’으로 상징되는 거대한 조건에 비하면 부차적인 조건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을 해보면, WTO의 그린 리스트와 같은 무역 조건 내에서 생겨난 직불제에 대한 재설계가 자연스럽게 질문거리로 나오게 된다. 직불제 자체가 농업의 효율성만 놓고 보면 최적의 지원제도는 아니다. 효율성과 지원 체계를 바로 연결하면 WTO 규정 위반이니, 어쩔 수 없이 지금과 같은 이상한 제도가 튀어나온 것이다. 큰 문제는 두 가지이다. 엉뚱한 사람이 직불금을 받아가는 상황. 우리나라도 가끔 문제가 되지만, 그건 유럽도 마찬가지이다. 거대한 농지를 소유하고 있는 영국 황실에 서 직불금을 받아 영국에서도 큰 논란이 되었다. ‘경자유전’이라는 헌법 조항을 실정법 내에서 어떻게 강화할 것이냐, 이런 종류의 질문이 한 가지가 있다. 또 다른 하나는, 농업을 촉진하기 위해서 주는 직불금이, 제도를 디자인하다 보니, 농사를 짓지 않는 데에 주게 된 것, 이건 근본 철학의 문제이다. 휴경하고, 농지를 놀리는, 그런 수요관리 정책에도 직불금이 가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 결국은 청년들에게, 생태적인 것에게 그리고 미래 가치와 관련된 것에 직불금을 비롯한 지원제도가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정책의 기본이 되어야 한다. 거의 재구축 수준의 보조금 조정 작업이 필요하다.
지난 10년을 돌아보면 가장 큰 변화는, 소비자라고 할 수도 있는 시민들이 농업을 접하는 기반이 변했다는 사실이다. 생협 인구가 크게 늘었고, 학교급식이 이제 학교를 넘어 지역의 급식소로 넘어가는 중이다. 무상이냐 아니냐라는 초창기의 논의에서, 어느 범위까지 공공 급식을 할 것인가 그리고 친환경 비중을 어떻게 할것이냐, 이런 다음 논의로 넘어가는 중이다. 10년 전에는 수요 변수를 다루기가 아주 어려웠지만, 이제는 급식 체계를 통해서 ‘최소 수요’를 넘어 ‘기본 수요’는 어느 정도 만족하게 하는 조건이다. 이게 한 단계만 넘어가면, 이제는 체계적인 공급에 대해서 고민할 수밖에 없는 단계로 가고 있다. 여전히 시범 단계에서 많이 벗어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로컬푸드’ 역시 이러한 차원에서 볼 수 있다. 이건 분명히, 긍정적인 요소이다.
우리도 농업에서 ‘학교급식 바스켓’ 혹은 ‘어린이 표준 바스켓’ 같은 것을 지정하면
좋겠다. 학교에서 먹는 것 혹은 어린이들에게 먹이도록 권고할 것을 지정하고, 그
기본 항목에 대해서는 지역 친환경 농업체계를 구성하는 것, 그런 게 장기적으로
는 갈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그게 시민지원농업의 기본 틀이 될 것이고, 젊은 사람
들이 농사지을 때 나름의 틈새시장을 찾아갈 방법일 것 같다.
눈을 더 작게, 더 멀리, 미래로
6헥타르, 약 만 8천 평 정도 농사짓는 쌀 전업농을 육성하는 것이 10년 전 정부의 기본 농정이었다. 고령농, 대규모 농업, 화학농, 이런 쪽에 방점이 갔다. 이것을 청년농, 소규모, 친환경, 식품안전 그리고 미래가치를 결합하는 쪽이 우리가 만들어야 할 농업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일정한 범위에서는 기술 요소를 결합하는 것에 대해서도 고민해볼 수 있을 것이다. 유럽과 일본 그리고 미국을 농업이라는 관점에서 구분 짓는 가장 큰 기준점인 GMO, 이런 문제가 점점 더 부각될 것이다. 유럽에서 시민들이 농업에 대해서 관심을 끌게 된 가장 큰 계기가 결국은 광우병과 GMO 아니겠는가?
‘핸드폰 팔아 쌀 사먹으면 된다’, 한미 FTA 시절에 고위급 경제관료들의 머리를 지배하던 생각이다. 그래서 결국 쌀은 형식적으로는 지켰다. 그래서 뭐? 한국은행에서 물가 지수를 내기 위해서 ‘물가 바스켓basket’이라는 것을 쓴다. 어떤 상품을 물가지수에 포함할 것이냐, 그런 질문이다. 우리도 농업에서 ‘학교급식 바스켓’ 혹은 ‘어린이 표준 바스켓’ 같은 것을 지정하면 좋겠다. 학교에서 먹는 것 혹은 어린이들에게 먹이도록 권고할 것을 지정하고, 그 기본 항목에 대해서는 지역 친환경 농업체계를 구성하는 것, 그런 게 장기적으로는 갈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그게 시민지원농업의 기본 틀이 될 것이고, 젊은 사람들이 농사지을 때 나름의 틈새시장을 찾아갈 방법일 것 같다. 지난 수년간 FTA 체결 때마다 나온 농업대책을 몇 년간 지켜보니, 이거 영 아니다 싶다. 별것도 없을뿐더러, 대규모 영농인들에게 주로 지원이 가는 방식이다. 한 마디로, 지역농협의 이사진쯤 되는 사람들에게나 도움이 되지, 3,000평 안팎의 소농들에게 가는 건 아무것도 없는 방식이다. 눈을 더 작게 그리고 더 멀리 미래로, 그렇게 농업정책에 대한 틀을 만들어가야 한다.
※필자 우석훈: 민주정책연구원 부원장, 경제학 박사. 프랑스 파리10대학에서 생태경제학을 전공했다. 스스로 C급 경제학자라 칭하며 사회, 문화, 생태 영역을 고루 넘나들며 주로 목소리를 내왔다. 『88만원 세대』 (2007, 레디앙), 『불황 10년』 (2014, 새로운현재), 『음식국부론』 (2005, 생각의 나무)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