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악의 기쁨

글·사진 이한나

  농촌에 와서 새로 갖게 된 취미가 있다. 바로 농악이다. 꽹과리잡이인 상쇠의 신호에 따라 징, 장구, 북 등의 악기를 든 치배1)가 어우러져 소리를 내는 민속예술이다. 농촌에서는 사람이 모인 곳에 농악이 빠지질 않는다. 정월대보름이면, 풍물패가 집집마다 찾아가 농악을 울리며 잡귀잡신을 물리치고, 복을 불러온다. 모내기 할 땐, 노동할 힘을 얻기 위해 굿을 친다. 농악은 우리의 삶에 계절마다 여러 모습으로 함께한다.
1) 농악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악사.

2025년부터 ㈔곡성죽동농악보존회의 준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사진은 마을회관 앞에서 공개발표회(길놀이)를 하는 모습이다.

처음 농악과 만난 것은
  곡성살이 2개월 차, 한적하고 자연스러운 곳에 살고 싶어 서울을 떠나왔는데, 대뜸 폐기물처리장이 재가동을 준비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불법행위를 저질러 중단 명령을 받은 이력이 있는 곳이다. 마을에서 1㎞도 떨어지지 않은 처리장 부지로 이웃들이 모였다. 추운 날씨에도 할머니, 할아버지들까지 나왔다. 길게 늘어선 주민들 옆으로는 대형트럭과 출근하는 차량이 쌩쌩 지나갔다.
  본격적인 시위에 앞서 사물놀이 공연을 하는데, 그 자리에 내가 불려 나갔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진한 눈썹을 가진, 사과 농장 아저씨가 내게 다가왔다. “북 좀 쳐주쇼잉. 따라만 치면 되니께.” 그날의 상쇠, 길구 단장님이었다. 처음 보는 나를 섭외하곤, 배낭에서 꽹과리를 꺼내 순식간에 판을 이끌었다. 쇳가락이 그의 전라도 사투리처럼 쫀득하니 찰졌다. 공연 내내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 순간만큼은 길거리 아스팔트 바닥에서 쇠 치는 단장님이 가장 행복해 보였다.
  “도시 쓰레기 넘쳐나니, 시골에는 사람 없네. 농촌 착취, 농민 착취 막아보자. 바꿔보자!” 시위 구호에 맞춰 북을 쳤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세차게 내려쳤다. 북의 울림은 시선을 한데 모으는 데에 효과적이었다. 가죽의 둥둥거림이 심장까지 닿아 맥박이 더 세차게 뛰는 듯했다. 그것이 나와 농악기와의 첫 만남이었다.

농악, 어울려 사는 삶
  시골에 정착하기로 결심한 시기에 비슷한 가치관의 귀농인들과 자주 교류했다. 하지만 그 안에 있으면서도 이질감이 느껴졌다. 새로운 만남이 갈급하던 차에 옥당골 풍물패를 만났다. 풍물패 어르신들은 젊은이가 왔다면서 반겨 주었다. 내 또래라곤 마을 친구 망고뿐이었다. 부모님 혹은 할머니 또래로 20년 이상 농악을 한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연습이 시작되자 각자 맡은 악기를 매고 섰다. 나는 장구를 매고 망고만 졸졸 쫓아다녔다. 20명 정도가 큰 원으로 둥글게 섰다. 달팽이집처럼 진을 짜기도 하고, 11자로 서서, 상쇠의 신호에 맞춰 장엄하게 전진하고 물러서는 ‘미지기’도 했다. 상쇠는 치배들과 눈을 맞추며 호흡을 함께했다. “얼씨구!”,
“잘하요!” 추임새가 더해지며 분위기는 고조되었다. 서로의 춤사위를 보면 절로 웃음이 났다. 배운 지 얼마 안 된 사람 중엔 박치도 있어 보였다. 하지만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박자는 맞춰가면 될 일이고, 판이 시작되면 신나게 놀면 될 일이었다.
  2년간 매주 합을 맞추고, 이따금 공연도 하다 보니 풍물패는 점차 내가 속한 공동체가 되어갔다. 나와 망고, 또 다른 마을 친구 풀까지, 우리는 존재만으로 어르신들에게 예쁨 받고 있었다. 이제껏 나와 다른 세계 사람이라고 여겼던 사람들이 별 다르지 않은 이웃임을 느끼게 된다. 나이와 직업은 중요치 않다. 우리는 그저 판 안에서 함께하는 벗이 된다.
  서울에서 사회복지사로 일할 때, 수많은 어르신을 서비스 이용자로 만났지만, 악기를 다루는 사람은 볼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이곳에서 본 풍경이 낯설게 느껴졌다. 1인 1악기는 기본이고, 악기 4개까지 섭렵한 어르신들을 보면 내 미래를 기대하게 된다. 흔히 듣는 ‘나이 들수록 배움의 기회가 적어진다’는 말은 고이 접어 두게 된다. 일상을 부지런히 살아내며 농악을 즐기는 어르신들 덕분에, 죽기 전까지 흥겹게 살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생긴다. 내 삶의 레퍼런스를 농촌에 와서 발견했다.

옥당골 풍물패는 곡성군 옥과면에서 활동하는 풍물패다. 2023년 곡성국악전수관이 생기며 옥당골 풍물패가 다시 모였다.
옥당골 풍물패는 곡성군 옥과면에서 활동하는 풍물패다. 사진은 남도국악제에 참여하러 간 모습이다.

무당이 되어보다
  무형유산인 ‘곡성죽동농악’ 보존회의 공연에 잡색2)으로 함께하게 되었다. 창부라고 불리는, 남자 무당 역할을 맡았다. 잡색은 판 안에서 마음대로 놀면 된다는데, 한국 사회에서 자유롭게 몸을 놀리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하지만 근거 없는 자신감이 들었다. 우선 옷 색깔이 나와 잘 어울리는 쨍한 개나리색인 게 맘에 쏙 들었다.
  대망의 서울 공연 날, 새벽부터 전수관으로 모였다. 버스에 각종 악기와 전수관 2층 높이만 한 깃발을 싣고 출발했다. 평일 오후의 국립민속박물관 마당엔 외국인이 대부분이었다. 판의 구성에 따라 들어갔다 나왔다 하며 공연을 선보였다. 준비한 시간이 무색하게 순식간에 끝이 났다. 내 춤사위에 신경 쓰느라, 정작 타인과의 교감은 부족했다.
  처음 농악을 봤던 때가 떠올랐다. 무대란 자고로 관객석보다 높이 있는 게 당연했는데, 농악은 달랐다. 무대와 관객의 경계가 흐릿하며, 올려다보지 않는다. 흥이 난 관객은 마음대로 무대에 들어와 춤을 추다 간다. 막이 넘어갈 땐, 관객이 물이나 막걸리를 들고 와 고생한 치배들의 목을 축인다. 서로를 바라볼 수 있는 둥근 대형도 참 마음에 들었다.
2) 농악에서 춤이나 연기, 재담으로 극을 이끌어가는 예인.

곡성죽동농악에서 창부 역할을 맡았다. 길놀이를 하며 마을을 한 바퀴 돌고, 당산굿을 위해 당산나무로 향하고 있다.

마을과 함께 뛰어놀다
  이틀 뒤, 곡성죽동농악 정기발표회에서는 이 말을 되뇌었다. “판굿은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만들어 가는 것.” 화려한 색동 소매의 두루마기를 걸치고, 깃털이 꽂힌 노란 갓을 썼다. 이 착장이 마치 사회적 시선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방어막 같았다. 인사굿에서 큰절을 올리며 와준 분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시작하는 장단에 맞춰 부채를 촥 펼쳤다. 찬찬히 무대 곳곳을 밟으며 긴장한 마음을 달랬다. 한복 입은 각시 역할 어머님과 눈빛이 닿았다. 둘이 맞춘 것처럼 어깨를 들썩이며, 팔을 좌우로 살랑살랑 흔들었다. 악기 대열을 따라갈 땐, 뒤에 양반 할아버지가 잘 따라오고 있나 한 번씩 살폈다.
  틈만 나면 무대 바깥으로 시선이 향했다. 마을 할머니들과 눈이 계속 마주쳤다. 손뼉 치며 잘한다고 해주니 신이 나서, 그 앞에서 어깨춤을 췄다. 내 재롱에 할머니들도 덩달아 덩실덩실 몸을 흔들었다. 나중에는 관객들을 판 안으로 끌어들였다. 어린아이로 돌아간 듯, 경쾌한 발걸음으로 판을 누볐다. 이따금 휘모리장단이 나올 땐, 역할에 충실하게 두 손을 하늘로 쭉 뻗고, 눈을 감아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트램펄린 타듯이 제자리에서 콩콩 뛰었다. 사람들은 우스갯소리로 신내림 받는 줄 알았다고 말했다. 몸을 자유롭게 놀리니 해방감이 느껴졌다. 농악에서는 자연스러운 몸동작을 통해 각자의 개성이 드러난다. 모든 이의 것이 조화롭게 어우러졌다.
  나중에 올라온 영상을 보니 내 모습이 낯설었다. 샛노란 창부복이 눈에 확 튀었다. 활짝 웃은 채 사람들과 눈을 맞추는 모습이었다. 몸놀림이 부끄럽게 느껴져, 차마 영상을 끝까지 볼 수 없었다. 창부복을 입으니 다른 자아가 튀어나오는 듯 했다. 곡성죽동농악 이수자인 숙자샘은 내게 말했다. “그 모습도 네 모습이야.”
  그 공연 본 사람들은 이제 나를 ‘잡색 아가씨’로 기억한다. 사투리나 외국어 중에서도 자기 모습을 잘 드러내는 언어가 있듯이, 농악에서도 자기 몸에 더 잘 맞고, 자신의 모습을 잘 드러낼 수 있는 역할이 있다. 어쩌면 나는 농악을 통해 내 안에 있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농촌에서는 사람이 모인 곳에 농악이 빠지지 않는다.
정월대보름에 마을 청년들과 지신밟기를 준비했다. 세 개 마을을 누비며 농악을 울렸다.

존재가 기쁨이 되는 곳에서
  농악의 현실은 농촌의 현실과 맞닿아 있다. 10년 뒤면 같이 활동하던 사람 중 몇이나 남아 있을까? 이러한 현실에 곡성죽동농악 이수자들은 발 벗고 나서 학교에 찾아가 지역의 문화유산을 가르치고 있다. 나와 마을 친구들을 위해 4박 5일의 장구 전수 과정을 마련해주기도 했다.
  농악이 계속 이어지면 좋겠다. 농악의 힘을 믿기 때문이다. “농악하면서 삶을 주체적으로 살게 되었어요.” “아이 키워놓고 우울감이 심했는데, 덕분에 활기를 찾았어요.” “가정에서 받은 스트레스 여기서 풀고 가요.” 내가 만난 여성들의 말이다. 나 또한 농악을 통해 주체성을 찾아가고 있다.
  한때 시골살이에 맞는 사람은 따로 있다고 생각했다. 귀농해서 잘 지내는 이웃들과 비교하며, 나는 곡성과 안 맞는다고 단정 지었다.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사회에서 벗어나고자 농촌으로 왔는데,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기존의 사회를 답습하며 살 뻔했다. 농악을 하며, 나다운 모습으로 존재할 때 비로소 편안한 마음으로 타인에게 시선이 뻗어나갈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처럼 내 존재가 기쁨이 되는 곳에서, 신명 나는 농악 생활을 이어가고 싶다.

[에세이] 이한나필자 이한나: 귀농 청년, 옥당골 풍물패 단원
곡성에 내려온 지 3년 차, 항꾸네협동조합의 생태농사 프로그램인 ‘청년 자자공’에 참여하며 곡성에 정착했다. 현재는 곡성군청에 속해 오후엔 아동복지교사로 어린이를 만나고, 오전엔 좋아하는 것들을 하며 지낸다. 마을 친구와 둘이 조그마한 논을 빌려 벼농사도 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