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달래를 깨물었더니

글·사진 정상원

들녘에 잔풀이 돋아야 비로소 봄이다. 보드라운 명지바람이 겨우내 굳은 들판을 어루만지면 한없이 푸르른 연두색 순이 하나둘 돋는다.

  들녘에 잔풀이 돋아야 비로소 봄이다. 보드라운 명지바람이 겨우내 굳은 들판을 어루만지면 한없이 푸르른 연두색 순이 하나둘 돋는다. 이제 막 심긴 농부의 꿈도 첫 비를 만나 조용히 움튼다. 농막의 봄은 그렇게 문득 오는 것이지, 상춘객처럼 날짜를 헤아려 재촉한다고 서둘러 오는 법이 아니다.
  예산 삽교읍 삽다리 시장, 오 일마다 열리는 장터에서 봄을 팔고 있다. 땅두릅이며 돌미나리, 좁쌀냉이 같은 땅것들이 이짝저짝에서 각자의 향기를 뽐낸다. 누런 상자 귀퉁이를 뜯어 써 붙인 가격표에는 ‘노지’라는 단어가 어깨를 우쭐거리는 듯하다. 재래시장에서는 물건을 산 곳이 곧 원산지다. 쑥과 파와 취와 봄, 가판에 널려 있는 모든 것이 죄다 이 동네 거란다. 청과전 옆 어물전, 봄 바다도 질세라 판을 펼쳤다. 제철의 바지락과 새우 풋젓, 알배기 주꾸미. 짠내조차 싱그럽다.
  조막만 한 병어도 차롬하게 놓여있다. 여름 덕대보다야 작은 크기지만, 봄바람같이 부드러운 살코기는 어디에도 비할 바가 아니다. 작은 병어의 달걀 같은 얼굴이 얼마나 귀엽던지, 셰프는 순간 녀석과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발걸음을 멈춘 채 병어의 곱디고운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니, 아내가 무언가 눈치를 챈 모양이다. 섬지에 힘을 줘 옆구리를 콕 찌른다. 아내의 뾰로통해진 얼굴이 왠지 병어처럼 귀엽다.
  “너 병어 같아.”
  새초롬 말간 얼굴이 봄 병어처럼 깜찍해서 한 말인데, 앞뒤를 죄다 잘라내고 속내만 전했으니 말본새가 영 멋쩍다.
  “마누라가 병어같이 생겼다고?”
알아듣고도 놀리는 말투다. 아무래도, 오늘 저녁 당번은 또 난가 보다.

플라스틱 소쿠리에 담긴 희고도 흰 은달래.
플라스틱 소쿠리에 담긴 희고도 흰 은달래.

  청과상 할매가 봄을 건넨다.
  플라스틱 소쿠리에 담긴 희고도 흰 은달래. 봄은 달래에게 무슨 짓을 한 걸까? 땅에서 나온 것이 요렇게 동그랄 것은 또 뭐람? 희고 하찮은 봄 주머니. 무언가를 저지를 듯한 설렘. 비밀로 가득 찬 은달래를 내미는 할매의 손이 눈에 들어온다. 곱은 손등에는 주름이 깊다. 흙고물이 물든 손톱 거스러미는 그녀가 앉아 있는 땅의 색과 똑같다. 섧은 밭일이 그대로 물든 손. 소쿠리를 받은 셰프의 손도 못나기는 마찬가지다. 둘은 잠시 서로의 손에 적힌 부박한 노동을 살핀다.
  보부장사는 눈치가 백단이다. 객마다 찾는 것이 다르니, 흥정 붙일 물건을 잘 선택해야 한다. 할매가 내민 은달래 한 소쿠리는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취향 저격 맞춤 상품인 셈이다. 동네에서 난 것만 신기한 듯 구경하는 손님의 눈길에서 그가 원하는 것을 대번에 알아차려 버렸다. 소쿠리에는 원산지 표시도, 정가 표시도 없다. 셰프가 궁금한 것은 원산지다. 할매는 그것을 잘 안다. 충청도에선 괜스레 긴 설명을 덧붙이는 법이 없다. 거두절미하고 토박이말이 쑥 들어온다.
  “캤슈.”
  샀다. 살 생각 없던 달래를 샀다. 왠지 맘이 알싸하다. 눈 뜨고 코 베인다는 서울에서 수십 년 장사를 했는데, 깍쟁이 장삿속이라면 남들에게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했는데 호구도 이런 호구가 없다. 정 넘치는 재래 장터에서 에누리도 우수리도 없이 정가에 달래 한 소쿠리를 사고 만 것이다.
  “자슈.”
  서운한 기색을 눈치챘는지, 할매가 딸기 한 알을 내민다. 소쿠리에 담긴 것 중 알이 제일 큰 녀석을 선심 쓰듯 건넨다. 촉촉한 딸기 속살이 레이어드 크루아상처럼 결 따라 찢어진다. 소공동 백화점에도 이런 특상품은 없다. 막 딴 노지 딸기다. 봄볕은 며느리 쬐이고 가을볕은 딸내미 쬐인다는데, 따끔한 봄볕에 뒹굴어 속이 꽉 찬 노지 딸기다.
  볕에 그을린 할매의 손등이 다시금 눈에 들어온다. 셰프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지갑을 만진다. 할매가 손사래를 친다.
  “됐슈.”
  딸기 한 알에 입 안 가득 빨간 봄맛이 물든다. 날숨마저 딸기 맛이다.
  봄볕 한번 참 맛있다.

  사실, 올봄은 들판에 살며 만난 첫 봄이다. 언제 오냐고 성화를 부리며 간절히 기다린 봄이다. 봄이 오니 길 어깨 과수원에는 분홍 연어 빛 복숭아꽃이 폈다. 이곳의 복숭아나무는 어른 키를 넘지 않는다. 땅 가까운 데서 자란 복숭아. 직업병이 도진다. 그 맛이 또 궁금하다. 이제 여름은 언제 오냐고, 복숭아가 언제 열리냐고 성화할 태세다.
  “거참. 꽃이 지면 여름이 열리겠지.”
  농부의 느긋한 기다림이 싫지만은 않다.
  셰프의 봄은 언제나 정신없는 계절이었다. 무언가에 쫓기듯 무언가를 좇았다. 다른 레스토랑보다 먼저 봄을 기획해야 했고, 놀라운 새 메뉴를 선보여야 했다. 화려한 요리와 그럴싸한 네이밍, 젠체하기 위한 SNS 포스팅. 경쟁과 평가. 무대 위의 연극배우처럼 모든 순간이 긴장의 연속이었고 호평과 혹평 사이에서 안절부절못했다. 그게 봄인 줄로만 알았던 그동안의 봄, 종로의 콘크리트 마천루 안에서 통유리 밖으로 바라본 봄은 어떤 색도, 아무 냄새도 없었더랬다.
  농막으로 돌아오는 길, 막 모내기한 볏모가 배냇짓하는 갓난아기의 손가락처럼 꼼지락꼼지락 바람에 흩날린다. 생채기 하나 없는 새순이 말랑한 봄병아리처럼 사부작거린다. 초록으로 물든 세상이 새삼 반갑다. 사실, 들판의 초록색에는 비밀이 하나 있다. 색이라는 것이 물체가 반사한 빛을 보는 것인데, 식물은 빨주노초파남보 가시광선 중 한 가운데 살코기인 초록빛만 도로 뱉어낸다. 가장자리의 빨간색 쪽 파장과 보라색 쪽 파장만을 흡수해 에너지원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빛 좋은 계절 초록색을 맘껏 받아들이면, 익숙해진 몸이 혹독한 겨울이나 무더운 여름을 날 수 없단다. 식물은 그렇게 탐을 버리고 진화했다. 초록은 그런 맘이다.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아는 농민의 마음. 덤은 묵묵히 일한 자의 것이라는 자연의 섭리 같은.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것이 실은 모진 시간을 견딘 이야기인 경우가 많다. 팩에 든 달래 한 알도 그렇다. 농사일이 대부분 그렇듯, 달래 농작은 손품깨나 든다. 수확부터 만만찮다. 하늘하늘 여린 줄기는 조금만 힘을 주어도 뜯어지고 찢기기 일쑤다. 알뿌리의 겉껍질은 쉽게 색이 바랜다. 얇은 줄기는 금세 숨이 죽는다. 그러니 캐낸 다음은 시간과의 싸움이다. 잔뿌리에 붙은 흙을 터는 일도, 고명딸 머리 땋듯 한 올 한 올 결을 살려 고무줄로 묶는 일까지 일거리가 많다. 하나하나 살뜰하게 챙겨야 기다린 시간이 제값을 받는다.
  봄의 이면, 귀엽고 여리고 싱그러운 봄의 향기는 알싸하고 씁쓸하고 쌉싸래하기도 하다. 아니, 오히려 그런 맛이 진짜 봄인지도 모른다.

  하늘을 깨물었더니
  비가 내리더라

  비를 깨물었더니
  내가 젖더라

  정현종 시인의 짧은 시 <하늘을 깨물었더니>의 전문이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라는 시 <방문객>의 들머리로 유명한 바로 그 시인이다. 세종로 교보생명 건물 벽면에서 그의 문장을 처음 봤을 때가 기억난다. 그때, 그의 시에서 ‘환대’라는 단어를 주웠다. 그 단어를 주머니에 넣고는 오랜 시간 식탁 차리는 일을 한 셈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하루를 위한 따뜻한 저녁밥, 자식 키우듯 온 맘으로 작물을 키워 세상에 내놓는 농부. 헤지는 옷깃에 마음 두지 않는 그런 이야기들. 계절이 온다는 것도 필경 그런 일이 아닐는지.

[크기변환]38-1

미리 건진 국수 위에 새콤달콤한 봄을 끼얹는다.
미리 건진 국수 위에 새콤달콤한 봄을 끼얹는다.

미드나잇 달래장 비빔국수.
  미리 건진 국수 위에 새콤달콤한 봄을 끼얹는다.
  오늘 야참은 국수다. 국수를 배 채우려고 먹나? 맛으로 먹지. 장을 보고서 장터 국밥으로 든든히 배를 채웠지만, 걱정 마시라, 국수 들어갈 배는 따로 있다. 게다가 새콤달콤 달래장 비빔국수라면 얘기가 다르다.
  먼저, 국수를 삶는다. 들통을 꺼내 넉넉하게 물을 붓는다. 국수를 삶는 일은 타이밍이다. 봉투에 적힌 삶는 시간은 하나의 예시일 뿐이다. 인생이 어찌 계획대로 흘러가겠는가. 같이 먹는 사람의 면발 취향과 그날 먹을 양을 꼼꼼히 살펴야 제대로 된 면발을 얻을 수 있다. 찬물에 비빔용 국수를 헹굴 때는 약간의 미열을 면에 양보하는 것이 좋다. 미지근한 면에 들기름을 살살 뿌리고 채반을 들척이면 기름이 고소하게 변하며 면에 달라붙는다. 면의 마지막 온기를 알뜰히 사용하면, 고슬고슬하면서도 차진 면발을 얻을 수 있다.
  국수는 삶겼으니, 이제 비빔장의 차례. 장터에서 강매당한 은달래 한 소쿠리가 있으니 걱정이 없다. 푹신한 알뿌리의 겉껍질 한 겹만 걷어낸다. 잔뿌리 사이의 흙을 하나하나 톺아야 장 전체를 망칠 일이 없다. 커다란 알은 찹찹 다지고 작은 알은 깨물어 먹게 그대로 둔다. 다진 마늘과 고추장. 간장 한 술, 식초 한 술. 양파도 조금 주워 삭삭 다진다. 양파가 달다면 그만큼 설탕을 줄일 것. 그리고, 미리 건진 국수 위에 새콤달콤한 봄을 끼얹는다.
  마지막으로, 막 덖은 참깨 한 꼬집을 국수 위에 솔솔 뿌린다. 손가락 끝에 힘을 줘 깨 몇 알을 짓이겨 고소한 향을 더한다. 이것은 봄과는 상관없는 셰프의 기교다.
  “다 됐슈.”
  셰프는 이곳 토박이말을 흉내 내 아내를 불렀다.
  국수 가락이 호로록 감치며 콧등을 톡 친다. 가락 결이 벚나무 아래 이는 하얀 꽃보라처럼 부드럽다. 달달하고도 알싸한 양념장은 농막의 삶처럼 살갑다.
  봄결 한번 맛있다.

  똬리를 튼 하얀 중면 위에 올려진 주옥같은 은달래. 희고 동그란 봄 주머니. 흙이 빚은 놀라운 맛과 씨 뿌린 농민의 비밀을 간직한 봄것들. 은달래를 깨물었더니, 봄이 왔다. 앙다문 달래가 터지며, 어느 해 봄의 알싸한 그리움이 밀려왔다. 처음으로 봄을 알게 된 소년의 마음 같은 것이.

정상원필자 정상원: 맞는맛연구소 소장
2018년 미쉐린가이드 등재 프렌치레스토랑의 오너 셰프로, 국무회의 및 외교부 국빈 만찬을 주관했다. 지금은 잠시 주방에서 나와 식탁 아래 떨어진 음식 문화에 대한 뒷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내셔널지오그래픽 필진, 팟캐스트 <언어탐험대>·채널A <박경림의 아모르바디> 패널. 쓴 책으로 《글자들의 수프》(2024, 사계절출판사), 《탐식수필》(2020, 아침의정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