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대산장학생 2014년 동계연수
어? 여기가 병원 맞나? 건강교육 프로그램 소개, 소모임 회원 모집 안내 등의 내용이 담긴 종이가 벽면 한 귀퉁이에 붙여져 있었다. 병원에서 웬 교육? 웬 소모임? 병원은 ‘차갑고 딱딱한, 가기 싫은 곳’이라는 고정관념이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의사와 직원, 환자 모두가 주인인 병원, 안성의료생협에서는 따뜻한 사람 냄새가 났다.
모두가 주인인 병원 만들기
안성의료생협은 1994년 우리나라 최초로 창립된 의료생활협동조합이다. 의료서비스를 영리병원이 아닌 사회적 협동조합을 통해 제공한다는 발상은 농민의 건강권을 염려하는 마음에서 생겨났다. 주말 진료봉사를 하던 의대생들과 마을 청년들이 뜻을 모아 주민참여를 이끌었고, 현재는 전체 안성시 인구 18만 5천 명 중 10%가 조합원일 정도로 활성화되었다. 농촌의 열악한 의료기반을 주민의 힘으로 극복한 셈이다.
안성의료생협은 주민 건강권을 확보해 농촌 삶의 질을 향상하는 한편, 지역공동체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고 있다. 이곳을 찾는 환자들은 일방향적인 진료를 받지 않는다. 언론에서 연일 의료 정보 격차와 과잉진료 문제를 요란하게 보도할 때, 안성의료생협의 환자들은 걱정 없이 안심하고 의료서비스를 이용한다. 각종 소모임에 참여하고, 병원의 정책제언 활동에도 적극적이다.
그들은 환자일 뿐만 아니라 병원의 주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의료시스템은 의사들이 과잉 진료를 할 수밖에 없는 구조로 되어 있죠.” 김보라 안성의료생협 전무이사는 현 의료체계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민간 위주의 공급구조는 수지타산을 맞출수밖에 없다. 의과대학 수료 후 병원 개원비, 각종 장비 도입비 등을 충당하려면 과잉 진료를 할 수 밖에 없고, 그 과정에서 환자의 건강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마음은 뒷전으로 밀려나게 된다. 의료생협이 새로운 대안으로 주목받는 이유다.
시장논리나 영리에 좌우되지 않는 의료생협의 존재가 감사하게 느껴졌다. 의료생협은 환자의 건강권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따뜻한 마음, 의료 소외계층에 대한 고민과 상상력이 만들어낸 작품이다. 나도 조만간 집 근처의 의료생협에 조합원으로 가입할 생각이다.
세상의 다양한 빛깔과 향기를 만들어내는 것은 결국 사람들의 따뜻한 상상력이다.
이 무궁무진한 농업과 농촌의 세계에서 나는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가능성을 보
게 될까. 따뜻한 상상력이 가득한 농촌, 다채로운 빛깔과 향기가 가득한 농촌을
꿈꿔본다.
축산업에도 상상력이 필요하다
안성에는 상상력이 발휘된 사례가 또 하나 있다. 바로 고삼농협의 ‘안성마춤 푸드센터’다. 2012년
8월 개관한 안성마춤 푸드센터는 한우 부산물로 사골 곰탕 등의 가공 상품을 개발해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해냈다. 안성마춤 푸드센터가 개발한 브랜드 ‘착한들’에서는 현재 ‘한우사골곰탕’, ‘고기곰탕’, ‘진한곰국’ 등 10여 가지 제품과 선물세트를 생산 중이다. 제품들은 주로 농협 하나로마트와 학교 급식에 납품되고 있다.
‘착한들’의 제품은 하루 평균 4,500에서 5,000봉이 생산된다. 앞으로는 냉면 육수 등도 개발 예정이다. 최병찬 안성마춤 푸드센터 대표는 ‘착한들’ 제품에 대해 큰 자부심을 보였다. “20시간 이상 가마솥에 한우를 푹 고는 전통 방식의 제조 공정으로 제품을 만들고 있어요. 정말 깐깐하고 청결하게 품질 관리를 해서 고객이 믿을 수 있는 제품을 만들고 있죠.” 실제로 안성마춤 푸드센터에서는 HACCP인증을 획득한 생산 설비를 통해 안전성을 철저히 관리하고 있고, 농도를 측정하는 단위인 브릭스 Brix 관리로 제품의 진한 맛을 유지하고 있다.
사실 안성마춤 푸드센터가 만들어진 데에는 뒷이야기가 있다. 조현선 고삼농협 조합장은 1994년 한우 직판장을 먼저 열었다고 한다. “장사는 엄청나게 잘됐는데 망했어요. 다리 살이나 잡뼈 같은 비선호 부위가 팔리지 않고 계속 쌓였거든요.” 한우 가격에는 대개 소뼈 가격이 포함되어 있는데 유통업자는 소뼈가 재고로 남는다는 이유로 농민에게 제값을 치르지 않거나 소비자에게 덤터기를 씌우는 사례가 많다. 축산 농가 입장에서는 인기 부위가 아무리 많이 팔려도 비 선호 부위가 팔리지 않으면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구조다. 안성마춤 푸드센터는 축산 농가의 이런 어려움을 해결하려는 고민에서 탄생했다. 잘 팔리지 않아 축산 농가의 어려움을 가중시키는 한우 비 선호 부위 및 부산물을 처리함으로써 지역 농가소득 증가에 이바지하고, 축산업 유통가격 기반을 안정시키는데도 기여한다.
안성마춤 푸드센터의 곰탕 가공사업은 원래 13개 농협이 함께 하기로 약속한 사업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한우 부산물을 활용한 사업의 가능성을 의심한 다른 농협들은 일찍 손을 뗐고, 결국 고삼농협이 단독으로 사업을 진행하게 되었다. 남들이 꺼리는 새로운 도전이었지만 안성마춤 푸드센터는 1년 만에 연 매출 24억 원을 달성했다.
안성마춤 푸드센터가 성공한 것은 ‘열린 상상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농협들은 보지 못한 가능성을 고삼농협은 보았고, 그런 열린 시각이 이 사업을 가능하게 했다. 안성마춤 푸드센터의 가공 사업이 보여주듯, 축산업에도 여러 갈래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나도 그동안 축산업을 일차 산업으로만 여기는 제한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는데, 잘 팔리지 않는 부산물을 이용한 사업이 성공을 거둔 모습을 보면서 다른 사람들이 꺼리는 길이 오히려 더 큰 기회, 블루오션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농업의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앞으로도 여러 곳에서 많이 발현되었으면 좋겠다.
따뜻한 상상력이 가득한 농촌을 꿈꾸며
이번 연수를 통해 얻은 가장 큰 수확은 ‘따뜻한 상상력의 힘’을 두 눈으로 보았다는 점이다. 농촌 주민의 건강권을 염려하는 마음, 어려운 축산 농가를 생각하는 마음이 현재에 머무르는 대신 다른 무언가를 상상하게 했고, 결국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냈다. 세상의 다양한 빛깔과 향기를 만들어내는 것은 결국 사람들의 따뜻한 상상력이다. 이 무궁무진한 농업과 농촌의 세계에서 나는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가능성을 보게 될까. 따뜻한 상상력이 가득한 농촌, 다채로운 빛깔과 향기가 가득한 농촌을 꿈꿔본다.
※필자 김연지: 농업전문언론장학생 5기. 이화여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세명대학교 저널리즘스쿨대학원 PD과정에 재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