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여성이 살기 좋은 나라
뉴질랜드는 여자가 살기 좋은 나라로 이름이 높다. 성평등 지수, 여성권한 척도 등의 평가에서 스칸디나비아 국가들 다음으로 높은 순위를 차지한다. 특히 정치 분야에 여성 참여율이 매우 높고, 이른바 ‘유리 천장’이 얇아서 일하는 여성이 가장 살기 좋은 나라로 꼽힌다.
그 살기 좋다는 나라 뉴질랜드의 여자들, 특히나 농사짓는 여자들은 어떻게 사는지 엿볼 기회가 왔다. 대산농촌문화재단의 여성농업인 리더십 계발 호주·뉴질랜드 연수단의 일원으로 8박 9일의 연수에 참여하게 되었다.
호주 시드니에서 뉴질랜드로 가는 비행기를 타는 순간부터 벌써 뭔가 달랐다. 항공기 승무원들이 대부분 나이 지긋한 남자들이 아닌가. 동방예의지국의 아녀자로서 나이 지긋한 (그것도 엄청나게 덩치가 커서 좁은 통로를 지나다니기도 쉽지 않아 보이는) 남성 승무원의 시중을 받는 것이 송구스러운 것도 잠시, 괜히 기분이 좋았다.
인천에서 시드니로 가는 우리나라 비행기에는 젊고 예쁜 여성 승무원들뿐이었다. 우리 사회에서는 나이 어린 사람이 나이 든 사람을, 여성이 남성을 시중드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여긴다. 그래서 그런 일은 대체로 젊은 여성이 맡는다. 그런데 그렇게 나이와 성별에 따라 나누고 줄 세우는 일이 없는 곳에 있게 되니 갑자기 안전한 곳에 들어온 듯 마음이 편안해졌던 것이다.
농민이자 아내로, 어머니로 행복한 삶을 사는 뉴질랜드 여성 농업인
뉴질랜드에서 만난 여성 농민들은 대부분 유쾌했다. 그리고 가족을 무척 소중히 여기고 가족과 함께하는 일상에서 만족과 행복을 느끼며 사는 것이 보였다. 예를 들면, ‘뉴질랜드 여성농업인회’ 회장 셜리는 아침 식사 시간에 연수단을 처음 만나자마자 다짜고짜 딸 결혼식 앨범을 꺼내 놓았다. 작년 말에 결혼식을 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았다고 변명까지 덧붙이면서 앨범을 펼치는 순간, 이 회장님이 어찌나 신이 났던지…. 셜리는 여성농업인회의 사업을 설명하는 워크숍 도중의 휴식 시간에 또 앨범을 꺼냈다. 농사꾼으로서, 농업인을 대표하는 단체 회장으로서 부지런히 적극적으로 일하는 동시에 어머니, 아내로서도 행복하게 사는 뉴질랜드 여성 농업인의 모습을 바로 앞에서 직접 느끼고 확인할 수 있었다.
자녀의 결혼식이 뉴질랜드 여성들에게 얼마나 큰 기쁨을 주는지 복습할 기회는 금세 또 찾아왔다. 팜스테이 농가에 들어서서 인사를 하고 있는데 어느새 그 집 딸의 결혼식 비디오가 상영되고 있었다.
신부의 어머니와 외할머니가 비디오 내용을 설명해주는 동안 신부의 아버지인 농장 주인은 저녁 식사 준비를 위해 감자를 열심히 으깨고 있었다. 우리나라 농가에 손님이 왔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남편은 즐겁게 담소를 나누고 장모와 아내가 허둥지둥 식사 준비를 하지 않았을까. 이렇게 부부가 함께 일을 나누고 돕는 모습에서 뉴질랜드 여성 농업인이 행복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연수 중 방문했던 뉴질랜드의 다른 농가에서 만난 부부들도 남편과 아내의 사이가 좋아 보였다. “She is the boss.” 의역하자면 “저분이 마님이고, 지는 머슴일 뿐이지유.”
같은 발언도 남성 농업인들에게서 공통으로 들을 수 있었다. 뉴질랜드에서는 아이를 많이 낳으면 혜택이 무척 많고 육아에 대한 지원도 잘 되며, 이혼 시에는 여성에게 유리해서 남편이 가정적이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한국, 이곳의 여성 농업인
연수에서 돌아온 바로 다음 날이 어버이날이었다. 어버이날에는 동네 어르신들께 점심을 대접한다. 노인회에 속하지 않는 여자들 즉, 부녀회원들은 그 전날부터 음식을 준비하고, 어버이날 당일에는 음식을 나르고 설거지, 뒷정리까지 하는 것이 전통이다.
실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것이나 이상하게 변형된 것도 전통이라고 내세워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 경우도 그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새로운 것에 빨리 적응하는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오래된 마을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은 옛것을 고수하는 것으로 박탈감을 만회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나도 음식을 나르고 설거지를 함으로써 노인을 공경하는 전통과 “미풍양속”을 이어나가는 데 조금 이바지하였다. 물론 남자들은 가만히 앉아서 밥을 받아먹고 술을 마시고 간혹 취해서 쓰러져 자거나 주정하는 것으로 나름대로 마을 전통을 지켜나간다.
여성 인권의 후진국이라는 한국의 평균적인 수준에 비추어 봐도 농촌의 문화는 너무 고리타분하다. 농촌 인구 대다수가 노인들이니 어쩔 수 없는 면도 있다. 그러나 그런 문화와 인식이 젊은 여성과 농촌 사이에 커다란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농촌에서 살고 싶은 젊은 여성들은 함께 극복해보는 길을 모색하기 위한 궁리를 많이 한다. 이웃의 한 젊은 여성 농사꾼이 지역 여성 농민들과 함께 사업을 추진해 예비 사회적 기업을 만들고, 그 안에서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실험해보는 과정을 쭉 지켜보았다. 지난겨울 한과를 만들어 팔아서 수입이 짭짤했다는 소문도 들렸다. 때로는 지지부진해 보였지만 여성들이 힘을 모은 조합의 또 다른 모범사례가 되지 않을까, 한편으로는 나도 묻어갈 수 있을까, 은근히 기대와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이번에 연수를 다녀 왔다고 자랑도 할 겸 전화를 걸었다. 요즘은 사업이 어떻게 되고 있냐고 물으니 일을 도맡아 할 사람이 없어서, 특히 농사철에는 각자 농사일이 바빠서 사업이 안 된단다.
익숙하게 하던 일을 내팽개치고 전망이 불투명한 일에 매달리기 어려운 면도 있고, 집안에서 리더 행세를 하는 자 때문에 여성 농업인이 새로운 시도를 하는 리더가 되는 데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아내가 주부 노릇(또는 보조적인 농업 노동자 역할)을 제일 먼저 챙기지 않는다고 남편이 불만을 느끼면 가정불화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부러우면 배우자
뉴질랜드는 이민자들이 만든 새로운 젊은 국가다. 실업과 빈곤으로 허덕이던 영국을 떠나면서 지긋지긋한 계급 사회와는 결별하고 이제 모두가 평등한 나라를 만들어보자고 초기 이민자들은 다짐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뉴질랜드는 1893년 세계 최초로 여성에게 투표권을 주었고(피선거권은 1919년에 주어졌다), 1898년 노령연금법이 만들어지는 등 가장 앞서 가는 복지국가로 일찍이 자리 잡았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과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여성운동가들이 투옥까지 당해가며 온갖 전투적인 방식으로 참정권 획득을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도 뉴질랜드 여성들보다 많게는 몇십 년 뒤에나 참정권을 획득했다.
우리나라 여성농업인들도 농업과 농촌 문제를 해결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하는 세력이 된다면 아마 여성이 더 살기 좋은 농촌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농업과 농촌 문제가 심각하니 여성농업인의 손길이 필요한 일이 많이 있을 것이고, 여성들이 기여할 길도 많이 찾을 수 있을것이다.
그렇게 여성들이 함께 힘을 모아서 새로운 시도를 할 때 필요한 리더십이란, “야, 여기 다 붙어!” 하고 죄다 불러 모을 수 있는 카리스마보다는, 때로는 혼자서 낑낑거리면서 버티는 헌신과 인내심이 아닐까. 거기다가 약간의 용기와 모험심도 있어야 할 것 같다. 멀고 먼 새로운 나라를 향해 긴 항해 길에 올랐던 오래전 뉴질랜드 여자들처럼.
※필자 이현정: 서울에서 출판사에 다니다가 강원도 화천으로 귀농하여 농사짓기 시작한지 8년째. 유기농 애호박 등을 재배한다. 『텃밭농부를 돕는 토양 먹이그물 활용법 _ 땡큐 아메바』, 『거짓된 진실 _ 계급, 인종, 젠더를 관통하는 증오의 문화』, 『이갈리아의 딸들』 등을 번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