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레-홀즈란트 지역개발협회, 살펜델 지역 농민 공동 직판장
언젠가 꼭 마음씨 고운 사람과 결혼하고, 신혼여행에 맞춰 생애 첫 여권을 만들 계획이었다. 커피 향이 진한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부드러운 음악과 함께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너만을 위해 만든 여권이야.’라고 수줍게 웃으며 말할 생각이었는데…. 대산농촌재단 해외농업연수에 선정되면서 그 계획은 물거품이 됐다. 하지만 덕분에 정말 많은 걸 배우고 왔으니, 나의 로맨스는 이제 그만 고이 접어 보내리라.
국토가 오염되지 않도록 아름답게 보호하는 유럽의 농민들
독일에 도착하기 직전, 비행기 창문 아래로 바라본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다. 숲이 많고, 또한 풍성했다. 연수의 거의 모든 날에 새들이 노래했고, 방문한 곳마다 자연과 환경을 ‘지키는 것’을 자랑으로 말했다. 타고난 자연의 힘도 있겠지만, 계획을 세우고 관리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게다가 지역의 문화와 전통까지 자연과 어우러지도록 보존하고 있었다.
연수 기간 동안 배운,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농업에 대한 철학. 농민에 대한 존중과 농민 스스로 가지는 자부심. 그리고 그것을 지켜주는 국가의 교육과 정책들. 연수 초반에는 연수생들이 부러움을 넘어 ‘우리 세대에 조금이라도 따라갈 수나 있을까?’라는 절망감을 느낄 정도였다. 그래서 조금 생각을 바꿔보기로 했다. 숫자와 통계에서 벗어나 보기로. ‘미래가 있는 농촌, 지속 가능한 농업’의 기본은 이렇게 포기하지 않는 것에서 시작하지 않겠는가.
우리 지역의 발전은 우리의 손으로!
독일의 튀링겐주 동부에 있는 잘레-홀즈란트 지역개발협회는 유럽연합EU 리더LEADER 프로그램의 지원을 받는다. 리더 프로그램이란, ‘농촌 경제 발전을 위한 활동 연대’라는 의미다. 1990년 유럽연합의 농업정책이 생산 중심에서 벗어나며 생긴 정책이라고 한다. 사람과 사람, 마을과 마을, 그리고 지역 간의 협력과 협동이 지역개발협회의 기본이다. 중요한 점은 위에서 틀을 짜서 아래로 내리고, 거기에 따라야만 기금을 지원해주는 형태가 아니라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방식이란 것이다. 지역민들이 지역의 문제를 자발적으로 진단하고, 목표를 세워 계획과 전략을 세우는 것. 유럽연합은 지역의 특징에 맞는 창의적이고 특색 있는 전략인지, 농업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를 골고루 고려했는지, 구성원의 참여도는 어떤지를 파악해서 기금을 지원한다. 이런 방식의 리더 프로그램이 독일 전체에 퍼져 있다.
잘레-홀즈란트 지역개발협회의 목표는 ‘살고 싶은 마을, 정착하는 마을’이다. 목표를 향한 다양한 방법들(2014~2020년 지역개발 계획)은 70페이지에 달할 정도로 섬세하며, 다양하고 계획적이다. 이것은 크게 네 개의 기준으로 나뉜다.
①남녀노소의 구분 없이 삶의 질을 높이는 것 ②지역의 자연을 기반으로 한 휴양과 지역 상품을 개발하는 것 ③지속성이 있는 지역의 자원을 활성화하는 것 ④에너지와 기후 변화 문제에 대비하는 것.
이것은 지역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하나하나 개별적으로 만들어 모은 느낌이라기보다 구성원들과 문제를 진단한 후에 통합하여 하나의 목표를 정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 후에 목표에 대한 ‘균형적인 발전 계획’을 다시 세운 것이다. 만약 각각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개별적으로 찾았다면, 이렇게 균형적인 발전 계획이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나의 문제에만 빠져버려서 다른 문제들을 통합적으로 바라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협회는 집행위원회, 자문위원회, 전문가 그룹 등으로 나뉘는데 인상적인 것은 청소년 위원회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지역의 14~18세 청소년 대표들로 이뤄져 있고, 아이들이 마을과 지역에 대한 의견을 모아서 지역개발협회에 정식으로 제안할 수 있다. 쓰임새가 떨어지는 마을의 전화 부스를 책을 나누는 자율적 공간으로 활용하고, 아이들이 아이디어를 내서 학교의 벽을 꾸미는 것은 최근에 청소년 위원회에서 제안하고 ‘실제로’ 진행한 것들이라 한다.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면 우리나라라면 어땠을지 상상해보자. 애초에 기회가 없었을 것이고, 무시당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에 하나 똑같은 일들을 실행했다고 한다면, 아마도 어른들끼리 생각해서 시키거나 결정했을 것이다.
이곳은 아이들이 대화하고 고민하고 행동하게 한다. 스스로 이 공동체의 구성원이고 주체임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다. 청소년 위원회의 연간 자치 활동비가 16,000유로라는 점에서도 진심이 전해진다. 놀라운 건 청소년 위원회가 처음부터 있었던 게 아니라 2015년에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이들도 처음부터 가능했던 일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목표를 이루기 위한 더 나은 환경을 위해, 구성원들과 끊임없이 대화하고 고민했을 과정이 그려진다. 자발적으로 문제를 진단하고 목표를 세우는 이들의 지혜로운 태도와 힘은 여기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함께 살아가기 위한 마을 사람들의 지혜와 행동
오스트리아 티롤주 살라하탈 지역에 위치한 살펜델 지역 농민 공동 직판장은 마을 주민들이 2001년에 만들었다고 한다. 이 지역은 아름다운 문화 경관으로 해마다 휴양을 즐기러 많은 방문객들이 오는 곳인데, 이런 경관을 가꾸고 보호해주는 농민들에게 고마움을 느껴서 마을 주민들이 힘을 모아 만든 것이다. 농산물 가격 하락으로 힘들어하는 농민들이 마을을 떠나거나 농업을 포기하지 않도록, 조금이라도 돕는 것이다. 자연을 가꾸고 지역의 먹거리를 만드는 농민들이 있기 때문에 자신들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이들은 잘 알고 있다.
직판장은 매우 작고 아기자기한데, 지역에서 유일하게 동호회 형태로 운영되는 곳이라고 한다. 실제로 규모가 작아 세금이 거의 없다. 2~3명의 판매 전문 직원만을 고용하고, 직판장의 협회장은 3년에 한 번 마을 사람들 중에서 선출해 자원봉사 형태로 일한다. 농산물과 직접 만든 가공품, 수제품은 농민 스스로 가격을 정한다. 이곳의 판매 수수료는 18%인데, 다른 마켓의 판매 수수료가 50%인 것에 비해 매우 작은 편이다.
작은 규모와 낮은 수수료 덕에 매출이 크지 않아 운영에 어려운 점이 있지만, 약 90명의 회원이 연회비 45유로를 내서 부족한 부분을 채워준다고 한다. 또한 마을의 식당이나 숙박업소에서도 직판장을 통해 식자재를 구입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지역의 농민들이 만든 먹거리를, 지역에서 구할 수 있다’는 것에 매우 만족한다고 말한다. 그곳에서 우연히 살펜델 직판장을 방문하는 마을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웃음을 가득 머금은 얼굴로 직원과 안부를 묻고 대화를 나누는 모습에서, 이곳을 ‘행복하게’ 이용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는 몇 줄의 글과 몇 마디 말로 압축해서 살펜델 직판장이 만들어진 이유를 들었고, 어려움을 이겨내며 힘을 모아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도 들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이 작은 공간을 유지해온 세월이 무려 16년이다. 우리라면 가능했을까? 생각조차 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여기에 얼마나 많은 사람의 진심과 노력이 깃들어있을까. 함께 살아야 한다는 상생의 가치가 너무도 당연하고 아름다운 것이기에, 구성원들이 수없이 대화하고 고민해왔기에, 가능한 일 아니었을까.
모두를 위한 가치 있는 목표를, 함께 고민하는 것이 시작이다
잘레-홀즈란트 지역개발협회와 살펜델 지역 농민 공동 직판장은 전혀 다른 형태지만 서로 닮아있다. 각기 조금씩 달라 보이는 목표들 속에 공통적으로 숨어있는 메시지는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분명한 가치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국민은 이것을 분명히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경쟁 대신 협동과 상생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서로를 이해하고 마음을 모으기 위해 끊임없이 대화하고 고민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포기하면 안 된다는 것을.
글·사진 도상헌
※필자 도상헌: 경남 진주에 있는 지역먹거리 협동조합, 진주텃밭에서 일하고 있다. 사랑이 있어야만 가능한, ‘태양과 추수와 연애와 노동’이란 말을 좋아한다. 따뜻한 시선으로 세상을 살피고 그 온기를 전할 수 있는 사람으로 커가길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