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함께 농사를

– 독일·오스트리아에서 만난 가족농

30

2014년, UN이 올해를 ‘가족농의 해’로 정했다고 들었다. 처음엔 좀 뜬금없다 싶었고, 그러면 무엇이 달라질까 하는 기대가 슬며시 커졌다. 그 후로 다시 그 말을 들을 수 없었다. 어디에서도.
  내가 속한 가톨릭 농민회 열매지기 분회의 농민들은 모두 ‘가족농’이고 ‘소농’이다. 우리 소유의 농지가 거의 없거나 대부분 빌린 농지에, 외부 자재의 투입 없이(비료, 농약, 제초제, 비닐, 종자 등) 사람의 힘으로 자연의 힘을 북돋워 농사짓겠다는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어, 그리 어렵지 않게 공동체를 이룰 수 있었다.
  이 정도 규모의 농사만으로는 생계유지가 쉽지 않았다. 시행착오 끝에 함께 할 수 있는 공동 가공을 시작했고, 모두가 참여하여 8년째 열매지기 생강차를 만들고 있다. 알면 별것도 아니나 몰라서 헤맸던 온갖 규제와 원칙과 제한들에 여전히 치이는 중이기도 하다.
  이렇게 소규모 가족농의 삶이 팍팍한 건, 그렇게 떠들썩했던 ‘가족농의 해’ 이전과 이후가 똑같다. 그렇다면 세계적인 주목을 필요로 했던 그 선포는 어떤 의미였을까? 그렇게 전 세계가 호들갑스럽게 집중하는 ‘가족농’이 왜 유독 한국에서는 찬밥인가? 이런 현상이 한국에만 국한된 것이라면, 다른 나라는 무엇이 다를까? 스스로 풀어낼 수 없었던 궁금증을 안고, 지난 5월 소규모 가족농의 일원으로서는 큰 결심이었던 길고 먼 여정에 올랐다.

쉴트 씨의 농가민박. 농가민박 등의 부업은 농업소득만으로 부족한 농민의 가계를 지탱하는 ‘제2의 다리’가 된다. ⓒ박경선
쉴트 씨의 농가민박. 농가민박 등의 부업은 농업소득만으로 부족한 농민의 가계를 지탱하는 ‘제2의 다리’가 된다. ⓒ박경선

두 다리로 굳건하게, 당당하게 선 가족농
지난 5월, 대산농촌재단이 주최한 9박 11일의 해외농업연수는 독일·오스트리아·스위스에서 ‘미래가 있는 농촌, 지속 가능한 농업’을 기치로 진행되었다. 연수지 곳곳에서 소규모 가족농을 만날 수 있었고, 반가웠다. 그들을 만나며 많은 궁금증이 풀렸고, 새로운 숙제를 받았다.
  독일 남부를 거쳐 오스트리아로 들어서니 지나는 들판과 언덕마다 감탄을 자아내는 단정하고 우아한 풍경들이 펼쳐졌지만, 농부였기 때문에 뒤따르는 안타까움을 감출 수 없었다. 논도, 밭도 안 될 저 척박한 언덕에서 이곳 농부들은 어떻게 생활할까.
  오스트리아 엘마우의 농부 쉴트 씨는 12ha의 초지와 20ha의 숲을 상속받았고, 거기에서 10마리의 젖소를 키워 유기농 우유를 생산해 판다. 하지만 물보다 우유가 싼 지역인 만큼 수익이 높을 수 없고, 동물의 복지를 위해 1ha당 소 1마리만을 허가하는 규칙 때문에 무작정 우유 생산량을 늘릴 수도 없다. 또한 농부는 물, 공기, 땅을 오염시키지 않고 아름다운 문화경관을 유지하며 국민에게 건강한 농산물을 적정한 가격에 공급해야 하는 등, 농부의 자격이나 농부가 지켜야 할 규칙들이 아주 세세하고 까다로웠다. 오스트리아 소농인 쉴트 씨의 사정도 우리보다 나을 것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농지에 따른 보조금과 농촌 경관 보조금, 조건 불리 보조금 등 자세하게 조건을 나누고 거기에 맞추어 지급되는 보조금이 그들의 농촌 생활을 안정시키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었다.

피르흐너호프 농가의 발터 클라이들 부부는 정년퇴직하고, 아들 발터 클라이들 주니어가 농장을 이어받았다. 아들이 마이스터 과정을 마치고 농가를 계승, 농가 경영의 구체적 계획이 담긴 논문을 제출하면 EU에서 1만 유로를 지원받는다. ⓒ송예슬
피르흐너호프 농가의 발터 클라이들 부부는 정년퇴직하고, 아들 발터 클라이들 주니어가 농장을 이어받았다. 아들이 마이스터 과정을 마치고 농가를 계승, 농가 경영의 구체적 계획이 담긴 논문을 제출하면 EU에서 1만 유로를 지원받는다. ⓒ송예슬

  오스트리아 티롤주의 피르흐너호프 농가는 직접 생산한 밀로 빵을 만들고, 소를 키워 요구르트를, 마당 안의 열매와 꽃으로 잼과 과일 증류주를 만들어 소규모로 키운 닭이 낳은 계란과 함께 농가 한편의 판매장에서 직판한다. 작은 집에서 농사와 가공, 판매를 모두 해내고 있었다. 특히 전통적인 방식으로 만든 빵은 오스트리아 농업프로젝트협회Agrar Projekt Verein가 주관하여 지역 특산 식품(빵, 생선, 치즈, 과일, 생육가공품 등) 가운데 전국 최고의 제품을 선정해 인증하는 ‘맛의 왕관Genuss Krone’을 5차례나 받았다. 공인된 빵 맛과 인증에 따른 유명세를 기반으로 규모를 늘리거나 대량 생산을 고민해 볼 법하지만, 그들은 가족의 노동력으로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생산한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이들도 농가 민박이나 가공, 판매 등을 통해 부족한 농업 소득을 보전하고 있었다. 이를 통해 농민은 안정적인 소득을 얻으며 나만의 색깔을 가진 농촌 생활을 그릴 수 있고, 소비자는 획일적이고 무감각한 공장형 식재료 대신, 이야기가 있고 사람이 보이는 안전한 먹을거리를 접하며 품격 있는 휴식과 다양한 생활방식을 경험할 수 있다. 따라서 국가는 촘촘한 보조금 체계와 더불어, 농업 소득과 함께 농가가 단단하게 서기 위한 “제2의 다리”로 농가부업을 적극 권장하고 있다고 한다.

지원과 교육으로 가족농의 지속가능성을 높인다
유럽의 다른 나라들처럼 오스트리아도 소규모 가족농에 대한 특별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농가 부업에 관한 지원과 규제에서도 소규모 가족농과 소위 대농, 기업농 간 철저한 차등을 두고, 가족 노동력을 수치화해서 계산한 수입과 농산물 수입을 합해 연간 농업소득 33,000유로까지는 ‘농업적 농업’으로, 그 이상일 경우 기업형 농가로 구분해 각각 세제와 지원을 달리 한다고 한다. 그러니 애써 농사 규모를 늘리고 생산성을 높이는 일이 농가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다만, 각 농가의 특색을 살리고 전통을 담아, ‘우리 것’을 유지한다는 자부심이 그들 각각의 기준이 되는 것 같다. 이렇게 그들은 자랑스럽게 농부로 대를 이어가고 있었다.
  가족농을 중심으로 단단한 농업 기반을 지속시키기 위해, 독일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은 두 개의 축을 다져왔다. 첫 번째는 앞서 농가들의 예에서 보았듯이, 농가의 소득을 직접 보전하는 정책이다. 두 번째는 세대를 이어갈 수 있도록 후계를 교육하는 농업 교육에 집중하는 정책이다. 정부는 근대화의 과정에서 농업이 다른 산업에 밀리지 않도록 뚝심 있게 지켜나갔던 저력으로, 상대적으로 생산성도 낮고 변화가 더디고 그 가치가 아주 크지만 중요하다고 여겨지지 않는 ‘농사’가 우리 모두의 바탕으로 남아야 한다는 필요성을 국민에게 교육하는 일도 빼놓지 않았다.
  독일 바이에른주 켐프텐 농업직업학교의 농민교육은 복잡한 변수가 많은 ‘농사’의 특성에 맞게, 농민이 되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영농 방법부터 축산, 화훼, 온갖 가공 방법을 비롯해 목공, 용접, 원예에 이르는 다양한 기술과 농사 철학, 계약서 작성법 등을 가르친다. 그렇게 농민들은 전문가로 길러진다. 온 국민의 안전한 먹을거리를 책임지는 주체로서, 온 나라의 경관과 환경을 지키고 그로 인한 관광 소득에 큰 역할을 하는 조력자로서, 농촌과 농촌 공동체를 지키고 문화와 전통을 풍성하게 이어나가는 원동력으로서 농민의 역할은 국가와 국민들에게 인정받는다.

피르흐너호프 농가 발터 클라이들 씨의 빵 작업대. 작고 소박한 이 작업대에서 최고의 인증 ‘맛의 왕관’을 받은 전통 빵이 만들어진다. ⓒ박경선
피르흐너호프 농가 발터 클라이들 씨의 빵 작업대. 작고 소박한 이 작업대에서 최고의 인증 ‘맛의 왕관’을 받은 전통 빵이 만들어진다. ⓒ박경선

우리의 ‘가족농’, 행복한 농민을 위해
‘농촌’을 지키고 ‘농사’를 이어가는 ‘농민’이 되는 일은 더 이상 개인의 책임이어서는 안 된다. 연수에서 돌아오는 길, 독일의 끝없는 유채밭, 초지, 알프스의 아찔한 위용은 없었지만 그들 못지않게 풍성한 한국의 가로수, 울창한 산림, 다정하게 정돈된 논과 밭, 종의 다양성은 걱정 없을 만한 풀밭이 새롭게 보였다. 가지고 있는 자원은 우리도 그들 못지않아 뿌듯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는 있고 우리에게는 없는 것-EU라는 든든한 울타리와 국가의 적극적인 농업정책-은 당장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조건임을 아프게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들에게 있고 우리에게도 있어야 하는 것-‘농사, 농촌, 농민’의 자긍심, 그리고 그에 대한 국민의 긍정적 인식-은 이른 시일 안에 효과적으로 만들어 내거나 되살려야 한다.

요구르트, 햄과 치즈 등 피르흐너호프 농가에서 만든 전통 빵과 함께 차려진 농가의 식탁. ⓒ남창우
요구르트, 햄과 치즈 등 피르흐너호프 농가에서 만든 전통 빵과 함께 차려진 농가의 식탁. ⓒ남창우

  우리가 만난 유럽의 가족농은 모두 농업을 몇 대째 이어오고 있는 점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하지만 우리 농촌의 가족농은 유례없이 큰 위기 앞에 맨몸으로 맞서있다. 농민의 생활이 지속 가능하지 않은 상황에서, 농민을 기르고 교육하는 환경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황에서, 국민의 먹을거리를 책임지며 식량 안보라는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는 농민이 전문가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 상황은 우리 농촌이 지속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던진다.

켐프텐 농업직업학교는 실제 농기계를 구비하여 작동법에서 수리까지 모든 과정을 가르친다. ⓒ박경선
켐프텐 농업직업학교는 실제 농기계를 구비하여 작동법에서 수리까지 모든 과정을 가르친다.  ⓒ박경선

  나는 우리 아이와 밭에서 춤추듯 농사짓고 싶다. 농사는 내가 기쁘게 선택한 일이고, 힘들지만 후회 없이, 기꺼이 하고 있는 일이다. 우리 아이는 엄마 아빠가 택한 짐을 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택한 직업으로 농사를 짓게 되길 바란다. 체계적이고 안정적인 교육기관에서 풍성하게 농사일을 배우고 농민이 되는 과정을 책임감 있게 거치기를 바란다. 농사를 소중히 여기고 앞으로의 삶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선배 농민들과 함께 농사를 익히며 행복한 농민이 되기를 바란다. 그곳, 독일 농업직업학교에서 만난 아이들처럼.

34-3※필자 박경선: 14년차 여성농민. 합천군 가회면에 귀농하여 남편과 세 아이와 함께 땅이 내고 하늘이 돋우고 사람이 키우는 씨앗들을 지키며 산다. 일은 혼자 해도 농사는 혼자 할 수 없다 생각하여 가톨릭농민회에서 공동체와 함께 공부하고 행동하는 일을 놓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농사가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할 수 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