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
농촌공동체 복원을 위한 대안

농촌지역 사회적 경제 발전의 방향과 과제

식민지 시대를 거쳐 광복, 남북 분단과 6·25전쟁,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 과정을 지나면서 한국 농촌의 전통적 사회질서는 철저히 해체되고 계·두레·품앗이·향약 등 농촌공동체의 협동조직은 대부분 사라졌으며 농촌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가족농 체제도 자체 내 노동력 재생산이 불가능할 만큼 심각한 붕괴 위기를 맞고 있다.
우리의 경제생활은 시장경제영역과 정부활동뿐 아니라 자발성 및 상호부조원리에 기초하는 사회적 경제(Social Economy)의 영역을 포함해 이루어진다. 전통 사회에서 사회적 경제의 지배적 형태를 이루었던 지역공동체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발전과정에서 그 토대를 상실해가는 대신 사회적 기업, 비영리 조직, 커뮤니티비즈니스 등 새로운 사회적 경제의 영역이 형성·발전되어 왔다. 우리나라는 정부 주도의 산업화·도시화 과정에서 사회적 경제의 실체가 뚜렷하게 나타나기는 어려운 상황에 있었다. 지금은 개발 연대의 정부 주도 발전 방식이 한계에 이르렀지만 아직도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한 민간주체의 역량 축적이 미흡한 수준에 있으며 급격한 고령화와 과소화를 겪고 있는 농촌 사회는 한층 심각한 상황에 놓여있다.
이 글에서는 전통적 농촌공동체의 해체와 농촌 지역의 활력 상실에 대응할 대안으로서 주목받는 사회적 경제 영역의 실태와 발전을 위한 과제들을 다루어보고자 한다. 먼저 우리나라 전통 사회 농촌공동체의 특성과 역할 및 해체 과정을 살펴본 후, 자본주의 경제 발전 과정에서 나타난 선진제국의 사회적 경제의 전개를 개관한다. 이어서 외환위기 이후 대두하기 시작한 우리나라 사회적 기업의 특질과 2000년대에 들어 추진되어온 다양한 농촌지역 활성화 시책을 중심으로 현재 상황을 정리해본다. 마지막으로 변화된 여건 아래서 농촌 지역의 공동체 기능 복원을 위한 대안 논의의 핵심 과제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마을 또는 동리(洞里)는 단순한 행정단위가 아니라 자연취락인 동시에 공동체 생활의 단위로서 그 자체가 주민의 생활권을 형성하였다. 특히 농업 중심의 전통 사회에서는 마을은 자족적인 생활단위를 이루었고 마을사람들은 대면적 상호관계를 지녔으며 마을 자체가 자치체의 성격을 지녔다.

전통사회 농촌공동체의 기능과 그 해체 과정
일반적으로, 공동체는 개인이 그 안에서 태어나 부모·교사·이웃으로부터 배우면서 규범과 역할을 익혀가는 지역사회인 동시에 전승받은 문화를 후손들에게 전달하는 사회조직의 단위이다. 요컨대 공동체는 특정 공간과 시간 속에서 사람들의 사회·문화·경제생활이 이루어지는 자연 단위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전통사회에서 공동체는 마을·촌락으로부터 고을·군 또는 도, 영·호남 등 지역이나 국가에 이르기까지 차원이 매우 다양하지만, 가장 기본적인 것이 마을 공동체였다.
마을 또는 동리(洞里)는 단순한 행정단위가 아니라 자연취락인 동시에 공동체생활의 단위로서 그 자체가 주민들의 생활권을 형성하였다. 특히 농업 중심의 전통 사회에서는 마을은 자족적인 생활단위를 이루었고 마을사람들은 대면적 상호관계를 지녔으며 마을 자체가 자치체의 성격을 지녔다. 동리자치행정의 책임자들은 매년 정월의 대동회(大洞會)에서 선출되어 동리의 각종 공유재산과 계(契)조직 및 공익사업 관리책임을 졌다. 동리 공공시설의 유지관리비 배분과 노역부과나 두레·품앗이 등 협동관행도 평등관계를 전제로 하였다. 따라서 동리라는 지역집단은 주민 상호 간에는 공동 운명체로서의 ‘우리’ 집단이 되고 외부사람들에 대해서는 자기의 신원을 나타내는 준거집단이 된 것이다.
일제의 식민지배체제 구축을 위한 기초 작업은 토지조사사업과 지방행정제도개혁이었다. 부·군·면·동리를 대폭 통폐합한 식민지 시대의 지방행정구역 개편에도 생활공동체로서의 지역구조는 조선시대의 동리단위 그대로 지속되고 있었다. 토지조사사업을 거치면서 동리주민들의 공유경지가 크게 축소되었으며 종래 공동이용 임야의 대부분이 국유화 또는 사유화되었다. 식민지 시대 후기 전시체제 하의 농산물 공출과 지역 자율성 상실에도 동리주민들의 협동과 연대의식을 바탕으로 한 공동체 기능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광복 이후의 산업화·도시화 과정에서 우리 농촌 사회는 엄청난 인구 이동을 겪으면서 대규모의 향도 이촌과 피난민 유입 등으로 주민 구성의 이질성이 심화되었다. 특히 1960년대 이후의 산업화 과정에서 주민 연령구성이 바뀌고 가구 수와 인구 수가 크게 감소하는 고령화·과소화 현상이 급진전되어 왔다.
도시 지역과 비교할 때 농촌 마을은 아직도 약간의 동리 공유재산을 보유하며 길흉사나 농사일에서 품앗이 등으로 협동하는 관행에서 생활 공동체의 성격이 약간 남아있지만 급속한 고령화와 과소화의 영향으로 그 기능은 크게 약화되었으며 경제 사회적 환경의 변화로 전통적 형태의 공동체 복원은 거의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렀다.

1970년대 이후 대량 실업과 사회적 배제 현상이 심화되고 신자유주의 정책의 등장으로 사회 보장제도의 기능이 후퇴함으로써 새로운 대안으로 사회적 경제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게 된다. 예컨대 정부가 제공하지 않는 사회 서비스의 발굴, 지역 사회 차원의 다양한 활동, 노동시장에 진입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일자리 제공 등의 역할이 주목받게 되었다.

선진제국에 있어서의 사회적 경제의 전개 과정
자본주의경제 발전 과정에서 전통 사회의 공동체 활동 영역이 대부분 붕괴된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공통된 현상이다. 유럽은 봉건적 보호 시스템이 작동하던 농업 사회로부터 산업사회로 이행하면서 개별화된 노동자들이 사회적 위험에 대처하기 위한 운동으로서 19세기 후반에 농업협동조합·신용협동조합·소비자협동조합·노동자협동조합 등이 조직되었다. 20세기 복지국가의 등장으로 이들 사회적 경제의 상당한 부분이 사회보험 시스템 속에 통합됨으로써 그 의미가 크게 퇴색되었다.
1970년대 이후 대량 실업과 사회적 배제 현상이 심화되고 신자유주의 정책의 등장으로 사회보장제도의 기능이 후퇴함으로써 새로운 대안으로 사회적 경제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게 된다. 예컨대 정부가 제공하지 않는 사회 서비스의 발굴, 지역 사회 차원의 다양한 활동, 노동시장에 진입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일자리 제공 등의 역할이 주목받게 되었다.
미국에서는 강력한 중앙집권에 반대한 시민의식을 기반으로 19세기 후반에 등장한 자발적인 비영리 조직(Non Profit Organization, NPO)이 활발한 기부 문화를 토대로 형성·발전되어 사회 서비스 공급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으며 오늘날에는 많은 사회 서비스 공급을 정부가 직접 담당하기보다 비영리 조직과 파트너 관계를 맺고 있다. 미국의 고용에서 비영리 조직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높아 1998년에는 그 규모가 취업자 1,100만인, 총취업자 중 비중이 7%에 각각 이르고 있다.
유럽의 사회적 경제와 미국의 비영리 조직은 의사 결정 및 수익배분원칙에서 약간의 차이점을 지니지만, 조직 원리에서는 ①보통 법인격을 지닌 공식적(formal) 성격 ②정부 또는 정부 관련 조직과는 별개의 민간(non-governmental)의 성격 ③자체규칙과 자발적(voluntary) 참여 등 공통점을 지닌다.
일본의 경우는 1990년대 버블 붕괴로 나타난 도시 공동화에 대응한 지역사회 활성화 논의 과정에서 커뮤니티비즈니스(Community Business, CB) 개념이 등장했다. CB는 지역 활성화를 위한 주민주도의 사업으로 종래 대기업이나 정부 주도 방식과는 달리 주민 스스로 추진주체가 되는 지역의 당면과제 또는 주민 삶의 질 향상을 위한 사업을 가리킨다. CB의 대상 영역은 복지·환경·정보·관광·교통·식품가공·지역 가꾸기·상가 활성화·전통공예·안전·금융 등 매우 다양한 범위를 포괄한다.

우리나라 사회적 경제 관련 정책의 특성과 한계
권위주의체제하의 산업화 과정에서 민간의 자발성을 토대로 하는 사회적 경제의 영역은 매우 취약 할 수 밖에 없었으며 1990년대까지는 정부의 사회복지 정책도 미약한 수준에 있었다.
최근 사회적 경제에 대한 논의가 크게 활발해지고 있는 현상은 시민사회의 성장과 일자리 창출 등 복지 시책의 강화가 맞물려 나타난 시대적 산물이며 그 흐름은 고용노동부, 안전행정부, 보건복지부, 농림축산식품부 등 각 부처 주도의 사회적 기업 지원 시책으로 구체화 되고 있다.
이들 정부지원 시책을 통해 사회적 기업에 대한 시민사회의 관심과 활동이 늘어난 긍정적 측면도 있지만, 관련 조직·단체들이 정부 지원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점에서 사회적 기업 활동의 지속 가능성이나 사업 본질의 왜곡 가능성 등 우려되는 측면도 적지 않다.
외국은 사회적 목적·비영리성·이익 분배의 제한 등 기본 요건을 충족하면 사회적 기업으로 인정하는 폭넓은 개념을 적용하고 있으나 우리나라의 현행 지원체계는 일자리 제공·사회 서비스 제공·지역사회 공헌 등으로 사회적 기업을 유형화하고 취약 계층 고용 비율을 엄격하게 규정하는 등 경직성을 나타내고 있다. 사회 서비스의 범위에서도 특정 영역 이외에 지속 가능한 지역개발을 위한 사업이나 환경보전과 경관유지 등 다양한 활동과 다양한 계층의 주민 참여가 어렵게 되어 있다. 또한 인증 사회적 기업에 대한 지원이 사실상 인건비와 4대 보험 부담분에 편중되어 있어 운영주체의 역량강화 등 경영체의 지속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측면에서는 매우 미흡하다.
농촌지역에 대해서도 2000년대 들어 농식품부, 안전행정부, 환경부, 문화체육관광부, 산림청, 농촌진흥청 등 각 부처가 다양한 사업을 추진해왔으며, 농식품부는 2011년부터 지역주민의 자발적 참여로 지역의 인적·물적 자원을 활용해 소득 창출과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토록 한다는 목적 아래 농어촌공동체회사 육성에 착수하였다. 이 시책은 농식품사업·도농교류·지역개발·사회복지 서비스제공 등 다양한 유형의 기존 경영조직을 대상으로 하는 제품 및 디자인 개발, 마케팅 등 활동과 구성원의 역량강화 교육, 컨설팅 등 소프트웨어 지원 사업이다.

농촌지역 활성화를 위한 사회적 경제 영역의 발전 과제
사회적 경제의 발전에 관한 논의에 앞서 농촌지역 활성화를 제약하는 전반적 환경 여건부터 살펴보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현행 농촌지역 개발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이다. 각종 정부 보조가 농업인들의 정부 의존과 도덕적 해이를 심화시키고 주체성과 자율성을 약화시킨다는 부정적 인식이 일반 국민뿐 아니라 농업 내부에서도 확산하고 있어 보조사업 축소나 관련 예산의 상대적 감축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처럼 역설적인 현상은 농업·농촌 활성화 사업의 중요성이 낮기 때문이 아니라 정책 추진 방식이 지역의 자율성과 주체성, 창의력 발휘를 기초로 하기보다는 정부 주도로 이루어지는 데서 연유한다는 사실이 올바로 인식되어야 한다.
둘째, 농촌 활성화를 위해서는 지역 내 경제순환과 지역 구성원의 공생을 위한 지역순환경제 시스템의 확립이 긴요하다. 농촌지역 활성화나 지역공동체 복원문제는, 정신적으로는 구성원간의 배려와 존중의 자세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며 경제적으로는 지역 내에서 발생하는 부가가치 증대와 함께 부가가치의 지역 내 순환을 확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 농촌지역 활성화의 주체가 될 인적자원 확보 방안이 강구되어야 한다. 지나치게 과소화·고
령화된 상황에서 농촌 내부의 인력만으로는 지역 발전을 담당할 주체의 확보가 어려우므로 기존 인력의 역량 강화와 함께 새로운 인력 공급 방안이 모색되지 않으면 안 된다. 최근 귀농·귀촌이 크게 증가하고 그 성격도 적극적인 가치추구형으로 전환되고 있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지만 이들 귀농·귀촌 인력이 지역 활성화의 새로운 주체로 적극 참여하도록 하는 다각적 노력이 필요하다.
끝으로 농촌지역의 사회적 경제 영역의 발전에 핵심을 이루는 몇 가지 과제에 대해 논의하고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먼저 제도적 측면에서 지역 주민이 지역 자원의 보전·관리를 책임지도록 하는 제도혁신이 필요하다. 지역 활성화를 위해서는 지역 자원의 효율적 활용이 중요하며 그 보전·관리의 권한과 책임을 지역 주민에게 부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자원환경보전·경관유지와 같은 공익적 활동에 대해 상호준수의무(cross-compliance)를 조건으로 지역 주민 참여를 제도화함으로써 다양한 사회적 경제 활동영역이 개발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기업 등 사회적 경제를 둘러싼 생태계 조성이 이루어져야 한다. 지난해12월부터 협동조합기본법이 시행됨으로써 협동조합에 대한 각계의 관심이 크게 높아졌지만 이들 조직에 대한 생태계 조성 없이 사회적 경제 활동의 정착은 불가능할 것이다. 구체적인 예로 사회적 기업 육성을 위한 우선구매제도의 강화, 사회적 경제 지원을 위한 ‘사회투자지원기금’과 ‘농촌공동체 활성화기금’의 설립을 들 수 있다.

농촌지역활성화를 위해서는 지역주민이 지역자원의 보전·관리를 책임지도록 하는 제도혁신이 필요하다. 지역 활성화를 위해서는 지역자원의 효율적 활용이 중요하며 그 보전·관리의 권한과 책임을 지역주민에게 부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셋째, 일반 기업에 비해 경영기반이 취약한 사회적 기업이나 마을 공동사업체를 뒷받침해줄 ‘중간지원조직’(Intermediary)의 육성이 시급하다. ‘중간지원조직’이란, 비영리조직 등을 키우는 보육기능이나 필요한 자금·시설 등을 제공하는 곳과 그것을 필요로하는 곳 사이의 매개 역할을 하는 조직을 말한다. 사회적 경제나 지역공동체사업에 소요되는 자금·인재·경영 노하우 등 경영 자원의 조달을 도와주는 제도금융기관이나 컨설팅 조직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중간지원조직’의 육성은 반드시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그동안 여러 정부 부처가 분산적으로 시행해온 다양한 마을·권역 개발사업을 통해 조성된 생산·유통시설, 도농교류 프로그램, 주민조직 등 각종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들을 효율적으로 연계·활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정부 주도로부터 주민 주도 방식으로 농촌개발의 방향이 근본적으로 전환될 때 비로소 가능한 일이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116※필자 정영일: 서울대 명예교수, 농정연구센터 이사장. 40년간 서울대학교 경제학부에서 농업·농촌문제를 연구·강의해왔다. 한국농업경제학회장, 한국농촌경제연구원장, 양곡유통위원장, 농어촌발전위원회사무국장, 농어업·농어촌특별대책위원, 국민경제자문회의위원 등을 역임했다. 다솜둥지복지재단의 초대 이사장으로 농어촌집고쳐주기 운동을 이끌었으며 현재 농정연구센터와지역재단의 이사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