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 농촌문화┃농촌 공동체, 다문화를 품다

우리의 농촌공동체는 오랜 침묵의 공간이었다. 인간들의 무분별한 살충제 남용으로 봄의 소리를 상실하고 더 이상 미래를 꿈꿀 수 없는 생태환경파괴의 실태를 묘사한 레이첼카슨의‘침묵의 봄’을 연상케 하는 시간들이 그곳에서 20여년 이상 지속되어왔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그치고 인간생태구조가 완전히 파괴되어 지속적인 발전가능성을 더 이상 그려 볼 수 없는 역피라미드 형태의 인구구조를 갖는 불모지대이었다.
그러한 농촌공동체가 서서히 그 침묵의 벽을 허물고 있다. 생명의 기운이 태동하며 이 마을 저 마을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울려나온다. 들녘에 외국인 젊은 여성들이 늘어나고 경운기를 운전하거나 시설하우스에서 비지땀을 흘리기도 한다. 농촌 거주민들의 삶이 역동치며 꿈틀대는 시골장터에 가족을 위해 찬거리를 고르느라 호기심 어린눈빛으로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외국인 여성들이 자주 눈에 띈다. 근대화 및 산업화와 함께 지속되어온 청장년층의 이촌, 남녀 성비의 불균형, 여성들의 농촌기피로 인해 농촌의 미혼남성들이 불가피하게 국제결혼을 선택하게
되면서 우리의 농촌공동체는 이렇게 변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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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공동체를 유지해 온 호혜성과 가부장제도

우리의 농촌공동체는 오랜 세월동안 상호협력과 공존을 중시하는 호혜성의 원리에 의해 유지되고 지탱되어왔다. 우리 전통사회의 미풍양속이라 할 수 있는 두레는 호혜성의 원리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이러한 공동체문화는 오늘날에도 명맥을 유지하며 전해져 오고 있다.
그러나 농촌공동체는 배우자 선택에 있어서 내국인과의 동질혼을 이념적인 가치 기준으로 삼아왔고, 그렇게 맺어진 가족들이 모여서 구성된 마을이나 촌락은 특정 성씨를 중심으로 형성된 일종의 혈연공동체이며 지역공동체이었다. 농업이 주요 생계수단이어서 가족의 역할과 경제적 역할이 결합되어 있는 농촌공동체 내의 개개 가족은 부계친의 가족주의가 반영되어 부자관계가 중심 축을 이루면서 부(父)를 최고 결정권자로 하는 가부장적인 질서와 가계계승의 원리에 의해 유지되었다. 그래서 가족이나 친족을 위한 개인의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으며 남존여비사상과 더불어 이러한 희생은 주로 여성들에게 가증되었다.
다행히 그동안 지속되어온 급속한 도시화와 산업화로 인해 개인주의 가치가 확산되면서 가족이나 공동체를 위해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며 이를 당연시해 오던 것이 개인으로서의 가치와 행복을 소중히 여기는 방향으로 변화하여 왔다. 그러나 우리사회가 지니는 관념으로서의 가치관은 여전히 전통적인 테두리 안에 머무르고 있어서 개인주의 가치의 확산이 이혼율의 증가나 가족의 해체와 같은 위기의 상황으로 연결되는 모순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농촌 다문화가족은 농촌공동체 발전의 원동력
안타깝게도 이러한 현실은 어려운 여건에서 국적의 장벽을 넘고 결혼하여 우리 농촌공동체에‘생명의 소리’를 선사한 다문화가족에게도 적용되었다. 그런데 농촌지역에 거주하는 여성 결혼 이미자들의 평균 44.3%가 친정국가에서 농업활동에 참여한 경험이 있고 베트남 출신은 이러한 경험을 갖는 자가 75.9%에 이른다. 동일한 표본집단에서 68.7%가 한국으로 결혼이민 온 이후에 농업활동에 참여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또한 여성결혼이민자들의 평균연령은 중국과 일본이 30대 중반, 베트남과 캄보디아가 20대 중반으로서 침체된 농촌사회에 활력을 불어넣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일본과 필리핀 여성결혼이민자들의 평균학력은 전문대학을 졸업한 수준으로서 농촌공동체의 유지와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 활용가능한 중요한 인적자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고령화와 저출산에 의해 인구가 감소하고 과소화된 농촌지역에서, 생산연령인구층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다문화가족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즉 이들의 행복한 삶과 안정적인 정착은 미래 농촌 및 농업의 지속적인 유지와 발전에 직결되어 있다. 따라서 이들의 안정적인 정착과 행복한 삶에 대한 관심은 국가적인차원에서 이끌어져야 한다.

농촌공동체가 다문화를 품어가는 새로운 삶의 방식
그러면 우리 농촌공동체의 이러한 현실안에서 농촌공동체는 어떤식으로 농촌의 다문화가족을 우리 안의 울타리에 수용하며 농업농촌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한 동반자적 관계를 형성해 가야 하는가? 필자는 농촌진흥청에서 수년간 이와 관련된 연구를 수행해 오면서 현장에서 경험한 여러 사례들을 통해 몇 가지 방안을 제안한다.

첫째, 서로 다름의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
여성결혼이민자들이 한국에 시집오게 된 배경은 매우 다양하여서 일련의 스펙트럼 구도로 이해해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배경이 스펙트럼선상에서 어디에 위치하느냐와는 상관없이 이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적응상의 어려움을 느끼게 하는 요인이 있다. 바로 한국에 오게 된 배경에 대한‘가난한 친정을 위해…’라는 식의 편견과‘ 다름에 대해‘잘못된 것 혹은 틀린 것’으로 폄하하는 현실이다. 이것은 농경문화속에 안주해 온 농촌공동체의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속성에서 비롯되었을 수 있다. 그러나 이제 글로벌한 지구촌 사회는 문화적 격차에서 표출되는 차이는‘틀린 것’이 아닌‘다른 것’으로 인식되기를 요구한다. 그들의 다름을 우리 안에 수용하고 역지사지의 자세로
그들의 눈높이로 바라보아야 한다. 여기에는 보다 근원적으로 인간을 평등하고 존엄하게 여기는 가치태도가 필요함을 내포한다. 혹자는 이와같은 주장을 다문화주의 모형의 표방으로 곡해할 수 있다. 그러나 다문화주의 모형이나 동화주의 모형은 차별적이거나 분리된 것이 아닌 동전의 양면과 같이 공존하는 불가분의 것이다. 우리의 다문화사회는 이민자들의 사회통합을 위한 정책으로 어떤 것은 동화주의적 모형을, 다른 어떤 것은 다문화주의적 모형을 선택적으로 적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것이야 말로 여러 야채와 소스들이 섞여 새로운 샐러드를 탄생시키
듯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며 성숙한 다문화사회로 나아가는 지름길일 것이다. 우리 농촌공동체가 간직해 온 상호협력과 공존의 호혜성의 원리를 이어가는 길일 것이다.

지구촌 사회는 문화적 격차에서 표출되는 차이는‘틀린 것’이 아닌‘다른 것’으로 인식되기를 요구한다. 그들의 다름을 우리 안에 수용하고 역지사지의 자세로 그들의 눈높이로 바라보아야 한다. 여기에는 보다 근원적으로 인간을 평등하고 존엄하게 여기는 가치태도가 필요함을 내포한다.

둘째, 꿈꾸는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사회이게 하자.
필자가 현장에서 만난 필리핀 여성결혼이민자와 결혼한 한국인 남편은 역이민을 고려하며 준비하고 있었다. 그의 고민은 자신의 아이들이 다문화가족의 아이라는 이유만으로 한국의 주류사회에서 배제되거나 성공하지 못할것이라는 불안감에서 시작되었다.
오늘날의 성공적인 삶의 의미와 산업문명중심의 사회에서의 성공의 기준이 다르긴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우리사회는 개천에서 용 날 수 있는 가능성을 잃어가고 있다. 꿈꿀 수 있는 희망마저 포기해 가고 있다.그러면 무엇이 그들에게 꿈꾸는 희망을 가질 수 있게 하는가? 노력하는 자들이 이 사회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원칙과 모델이다. 개천에서 용 날 수 있는 가능성이다. 공정한 경쟁의 정신이 이곳저곳에 깃들어 있는 사회이다. 구체적으로 농촌 다문화가족의 아이들에게 성공을 꿈꿀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며 그 꿈을 키워나가도록 해보자. 그들이 농촌사회의 리더로 성장할 수 있도록 성장의 길을 열어보자. 분명 꿈꾸는 희망을 가질 수조차 없었던 많은 다문화가족들이 이 땅의 품에서 삶의 의지를 일구어 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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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다양한 사회참여의 기회를 제공하자.

필자가 현장에서 만난 필리핀 여성결혼이민자는‘한국 땅에서 자신의 인생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로 21세에 시집와서 그동안 수없이 많은 가출을 경험하였다. 너무 속상해 집을 나섰지만 막상 갈 데가 없어 버스를 타고 무작정 종점과 종점 사이를 오가거나 터미널 주변을 배회하는 사소한 가출에서 부터 필리핀으로 아예 되돌아갈 작정으로 짐을 꾸려 수 일간 집을 떠나는 감당할 수 없는 고통스런 가출에 이르기까지. 그녀가 가출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다양했다. 전화를 받았지만‘여보세요’라는 말만 건네고는 끊게 되는 단절감과 그로 인해 생기는 자아상실감, 물위에 뜬 기름 같이 늘 서먹한 시부모와의 관계, 결혼 3년만에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해 99% 사망진단을 받은 남편, 천신만고 끝에 생명은 부지했지만 언제 회복될지 모르는 채 계속되는 치료, 설상가상으로 수입이 일정치 않은 시부모에게 아이들 우유값이며 양육비를 하나에서 부터 열까지 일일이 의존해야 하는 답답한 일상 등…….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길고 짧은 가출이 반복되었지만 뚜렷한 해결책이없어 무기력해 하던 그녀가 생활의 활력을 되찾게 되었다. 매일 아침 그녀는 간병인 일을 하러 시내병원으로 색다른 가출을 하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남편의 건강이 차츰 회복되어 가사일 정도는 할 수 있게 되었고, 어느 날 부부가 의논해서 역할을 바꾸어 그녀가 돈 버는 일을 하고 남편이 집안일을 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색다른 가출의 밀월은 그녀가‘어려움이 있어도 아이들을 위해 이겨내야 한다’는 의지를 다져가고 생활의 활력을 회복하는 분수령이 되었다. 일찍이 사회학자 레몬(Lemon)은 그녀가 경험하는 것과 같은 활동이 개인의 자아개념을 재확인하는데 필요한 역할지지를 제공한다고 하였다. 그녀의 색다른 가출경험은 그녀가 우리사회에서 인정받고, 우리안의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음을 확인하게 하는 장(場)이 되었을 것이다.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욕구인 인정받고자 하는 갈망, 존재가치를 확인받고자 하는 갈망이 충족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오늘 날 이 땅의 많은 여성결혼이민자들이 자신의 존재가치를 인정받고자 목말라 하고 있지는 않은지…. 안타깝게도 필자가 2008년에 농촌진흥청에서 수행한 연구에 의하면 농촌지역에 거주하는 여성결혼이민자들의 약 1/4이상이 교육을 포함하여 그 어떠한 사회활동도 경험한 바가 없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보다 많은 여성결혼이민자들이 이러한 활동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우리사회에 폭넓게 마련되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넷째, 농촌 다문화가족에 자립할 수 있는 영농기반을 제공하자.
필자는 현장에서 간혹 농업기반이 전혀 없으나 농촌에 정착하며 영농의 꿈을 일구고자 하는 여성결혼이민자들을 만난 적이 있다. 그들은 자기 가족의 이름으로 된 조그마한 땅뙈기라도 마련하여 씨를 뿌리고 그곳에 삶의 뿌리를 내리고 싶어 하였다. 그러는가 하면 소규모 가족농의 형태로 농업여건이 열악하여 부농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길이 요원하기만 하다고 푸념하는 이도 있다. 여성결혼이민자 자신은 상품성이 높은 농산물을 생산하여 돈을 잘 벌고 싶은데 남편의 농업기술이 부족해서 안타깝다고 하소연하기도 한다.
이러한 다문화가족에게 체계적이고 단계적으로 영농기술을 교육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교육이수 현황을 인적 데이터베이스화하여 관리하면서 이를 통해 중장기적으로 개인적인 역량을 강화하며 자활?자립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보자. 구체적으로 농지나 농기계 등 농업생산 및 산업화에 필요한 기자재나 시설을 임대하거나 농업종합자금을 우선 지원하는 방안을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농업기반구축 방안을 농촌진흥청에서는 농촌다문화가족을 위한 중장기 육성 방안의 일환으로 이미 농식품부에 제안한 바 있다.

필자가 현장에서 만난 필리핀 여성결혼이민자는‘한국 땅에서 자신의 인생을 바꿀 수 있을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로 21세에 시집와서 그동안 수없이 많은 가출을 경험하였다. 너무 속상해 집을 나섰지만 막상 갈 데가 없어 버스를 타고 무작정 종점과 종점 사이를 오가거나 터미널 주변을 배회하는 사소한 가출에서 부터 필리핀으로 아예 되돌아갈 작정으로 짐을 꾸려 수일간 집을 떠나는 감당할 수 없는 고통스런 가출에 이르기까지.

다섯째, 다문화의 자원적 가치를 개발하고 문화산업화하자.
글로벌한 지구촌 시대에 문화다양성은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원동력으로 인식된다. 다문화가족은 농촌의 문화다양성이 증가하고 대내외적인 경쟁력을 높이며‘우리’의 범주를 확장하는 계기를 부여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다문화를‘문화적 격차’나‘적응’의 차원으로만 바라볼 뿐‘개발 가능한 자원적 가치’나‘문화산업화’차원으로의 인식은 미진하다. 다문화적인 테마를 농업이나 비즈니스(business) 소재들과 융합해서 문화산업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다문화가족에게 사회적인 일자리나 창업의 기회를 제공하고 2·3차 산업으로 연계해서 새로운 미래성장의 동력으로 활용하는 창조성이 요구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농촌진흥청은 금번에 이와 관련된 모델 유형과 사업화 방안을 개발하였으며, 향후 현장컨설팅 지원도 가능할 것으로 본다.
글을 마무리하며 미국의 정신의학자 립튼(Lifton)이 가족을 바다의 변화무쌍한 적응의 신인 프로테우스(Proteus)에 비유하여 묘사한 것을 회상한다. 농촌공동체도 살아서 변화하는 유기체적인 속성을 지닌다. 하지만 그 변화의 내용이나 본질은 동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역할에 따라 달라지며 그 책임 또한 그들에게 귀속되는 것임을 다문화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필자 양순미: 농촌진흥청 국립농업과학원 농업연구사. 농촌진흥공무원으로 21년 동안 재직해 오면서 다문화가족, 조손가족 등 주요농촌사회현상에관한현장연구전문가로일해왔다.‘ 여성결혼이민자를위한적응정책모색’,‘ 농촌결혼이주여성의생활만족도에 사회참여활동태도가 미치는 효과’를 포함하여 다수의 논문 및 정책방안을 공표·제안하였고, 「농촌생활가이드」등을 발간하여 정부 부처·재외공관·현장에 지원하면서 선도적으로 다문화가족의 성공적인 정착을 돕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