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어-탯말이란?
탯말은 무엇인가? 탯말은 우리 고향말, 다시 말해 표준어의 대칭 개념에 있는‘사투리’라는 말을 우리가 바꿔부르기로 한 신조어이다.
여기서‘우리’란 농촌이었던 고향을 사랑하고 고향이 우리에게 남겨준 유산인 향토어와 우리의 정체성을 지키려고 모인 일단의 사람들로, 우리는 탯말을 지키기 위한 목적으로‘탯말두레’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탯말이란 어떤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이 쓰는 언어가 아닌 바로 민초들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이 탯말두레의 구성원은 먼저 전라도 출신의 문인, 화가, 교사, 방송작가, 언어치료사와 우리의 취지에 찬동하는 평범한 네티즌, 주부, 학생들이었다. 이후 경상도 출신의 같은 계통 사람들이 모이면서 전국적으로 활성화가 됐고 이를 모태로 해서‘전라도 우리탯말’과‘경상도 우리탯말’(소금나무 발행)이 순차적으로 책으로 출판돼 나왔다.
탯말은 고향의 말
그럼 왜 하필‘탯말’일까? 우리는 어머니의 자궁 속 태(胎)에서 태어났다. 나 역시 어린 시절 목격했지만 아기들이 태어나면 아버지는 아기가 물고 나온 태를 조그만 독(항아리)에 넣어 집 마당 한 켠에 묻곤 하셨다. 내 태 역시지금 고향집 마당의 한 켠에 묻혀있다. 늘 고향이 날 부르는 이유도 이 때문일 거나. 고향집 마당에 묻혀있는 내 몸의 한 부분이 나를 그리워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세상의 햇빛을 보기 전 어머니의 태속에서 꿈을 꾸고 있을 때 우리는 어머니의 음성을 들었다. 어머니의 행복한 웃음소리와 흥겨운 노랫소리, 그리고 한숨소리하며 이웃사람들과 오순도순 얘길 나누며 살아가는 소리.
“어야, 새댁! 새댁 집이 있능가?”
“아니 아짐이 뭔일이시다요?”
“잉… 아침 일찍 장에 강께 숭에가 많이 나왔는디 참말로 싱하대. 폴딱폴딱 뛰드랑께. 그것을 봉께 새댁 생각이
젤 몬차 나대야, 그래서 한 마리 사왔응께 푹 과서 묵소!”
“아이고! 왜 나 생각이 나라?”
“아따! 애기를 스면 잘 묵어사 애기도 실하제 이. 이것 푹 과서 묵고 으차그나 떡두깨비 같은 아들 한나 나소!”
“오메, 참말로 으채사쓰까 이. 너무 아심찮하요.”
우리는 어머니의 뱃속에서 어머니와 이웃 집안 형님이 나누는 이런 정겨운 얘기를 들으며 자랐다. 이것은 어느 지역에서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바라바라, 새댁 집에 있나?”
“누가 찾아오셨능교?”
“내다. 내 목소리도 모리나? 퍼특 나와서 이것 좀 봐라.”
“야? 그기 뭔데예?”
“앞산 언덕빼기에 올라가니께네, 하이고, 산딸기가 천지비까린기라. 그래 내 새댁 줄라꼬 따왔다 아이가?”
“하이고, 지 줄라꼬예?”
“하모하모, 얼라를 스면 신 것이 땡기는 거 내도 잘 안다. 많이 묵고 이삔 얼라 퐁 노으소.”
“이걸 우예 합니꺼? 참말로 고맙심니더. 잘 묵을께예.”
미국 플로리다 의대 연구팀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평소 자궁 밖에서 72데시벨(dB)로 들리던 임산부의 목소리는 자궁 내에서 77.2dB로 측정됐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3dB 차이는 소리 크기의 두 배를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머니가 조그많게 속삭여도 우리는 뱃속에서 어머니의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태교가 중요하다고 하는 것이다. 아무튼 이처럼 우리가 태아였을 때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듣고 배운 고향의 말이자 영혼의 말, 이것을 우리는 탯말이라고 정의한 것이었다.
우리가 태아였을 때부터 어머니의 뱃속에서 배우기 시작한 탯말은 유년 시절은 물론 죽을 때까지 자기의 정체성을 이룬다. 그리고 이 탯말은 언제 들어도 정겹고 편안하다.
“워따메! 이것이 누구당가?”
“니 누꼬? 문디 아이가?”
사람들이 서로 말을 이렇게 주고받는 것을 보면 우리는 그 순간 그 사람들이 태어난 고향을 짐작하게 되고 그 고향의 바람과 흙과 나무와 강 등 그 지역의 공동체 정서를 느낄 수 있게 된다. 만약 이 말을‘당신, 누구시던가요?’라고 이른바 표준말로 표현한다면 너무 차갑고 사무적이며 이 말 속에서는 어떤 정감도 정체성도 느껴지지가않는다.
제주도가 제주도다운 것은 사람들이 제주도 말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제주도 사람들이 제주도 말을 사용하지않고 표준말을 사용한다면 제주도는 더 이상 제주도가 아니고 서울과 똑같아질 것이다.
표준어에 가려진 향토어의 가치
그런데 이 아름답고 보석 같은 우리 고향말, 탯말이 언젠가부터 우리 곁에서, 심지어 고향에서도 점차 사라지기시작한 것은 일제 때부터였다. 1921년 조선총독부는 이른바 사투리를 없애기 위해‘현대 경성어’를 조선의 표준말
이처럼 표준어에 치어 오랜 세월 동안 우리 탯말은 홀대를 받아왔고 사람들도 탯말을 쓰는 것을 촌스럽고 부끄럽게 생각해 사용하려 하지 않았으며 다투어 표준말을 배워야 했다. 곤궁했던 지난 1960년대, 먹고살기 위해 서울로 식모살이를 떠나야 했던 농촌의 처녀들은 촌티를 벗기 위해 몇날 며칠이고 표준어 연습을 해야 했다.
로 정해 사용하도록 했고, 1933년 제정된 어문규정은‘현대 중류사회에서 쓰는 서울말’을 표준어로 정했다. 이 어문규정은 50여 년 동안 지켜져 오다가 왜 중류사회 사람들이 쓰는 말만이 표준어가 되어야 하느냐는 반발에 부딪치자 표준어의 정의를 1988년‘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로 규정한 것이다. 이처럼 표준어에 치어 오랜 세월 동안 우리 탯말은 홀대를 받아왔고 사람들도 탯말을 쓰는 것을 촌스럽고 부끄럽게 생각해 사용하려하지 않았으며 다투어 표준말을 배워야 했다. 곤궁했던 지난 1960년대, 먹고살기 위해 서울로 식모살이를 떠나야했던 농촌의 처녀들은 촌티를 벗기 위해 몇날 며칠이고 표준어 연습을 해야 했다.
“어머? 그랬어?”
“이랬니? 저랬니?”
특히나 특정 지역의 탯말을 쓰는 사람들이 배척을 받던 시절도 있었다. 위정자들에 의해 유난히도 지방색이 강조되면서 이들은 불이익을 받았고 그래서 탯말 사용을 기피해야 했던 불행한 시절이 있었던 것이다.
탯말이 사라져가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시대가 변했고 세상도 바뀌었다. 인터넷을 비롯한 미디어의 발달로 지방과 지방간에 원활한 정보 전달과 소통이 이뤄지고 지역감정이라는 케케묵은 유물에 관심이 없는 젊은 세대들이 여론을 주도하는 영향력있는 세력으로 등장하면서 기성세대들이 만들었던 벽을 허물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전라도 사람이 경상도나 강원도에 가서 탯말을 써도 누구나 스스럼없이 대해주고 마찬가지로 경상도 사람이 전라도에 가서 탯말을 써도 극히자연스러운 세상이 됐다.
그런데 보다 중요하고 심각한 것은 이 탯말조차도 이제 변질되거나 사라져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아직도농촌의 나이든 노인들은 전래의 탯말을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아이들이나 젊은 세대들의 경우 젖을 먹기 시작하면서부터 텔레비전을 보고 자랐기 때문에 표준어에 길들여진 데다 유치원과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도 표준어로 수업을 받기 때문에 갈수록 탯말에서 멀어져가고 있다. 또 가정과 친구들 사이에서도 탯말을 사용하기는 하나 그것은 제대로 된 탯말이 아니라 표준어와 탯말이 뒤섞인 형태이며 이것은 전국 어느 지방이나 마찬가지 현상일 것이다. 심지어 발성구조상 탯말을 한 번 배우면 쉽게 고치기가 힘든 경상도 지방의 아이들조차도 억양만 그대로일 뿐대부분 표준어를 구사하고 있을 정도이다.
실제로 탯말두레의 활약으로 탯말이 주목받기 시작하면서 TV방송사가 어린이들의 탯말 사용도를 알아보기 위
지금은 문화다양성이 존중되는 시대다. 사고나 언어 등의 다양성 속에서 문화가 꽃피고 그 가치를 더 인정받는 시대다.
없는 특산물은 열심히 만들어 내면서 왜 이보다 더 소중한 정신적 문화적 자산인 우리 탯말은 지키지 못하는가.
조정래의 태백산맥이나 최명희의 혼불, 박경리의 토지도 그 문장에 있어서 다 마찬가지다. 그러나 앞으로 이처럼 탯말을 사용한 시나 소설의 문학작품과 드라마 등의 방송작품도 더 이상 나오지 않는 시대가 조만간 오게 될 것이다.
해 전라도와 경상도 오지 지역을 찾아가서 취재했지만 그곳에서도 탯말을 사용하는 어린이들을 찾아보기 힘들어프로그램 제작이 어려웠다고 PD가 고백했을 정도다. 이는 탯말 사용을 억제하고 표준어 사용을 장려해 왔던 그 동안의 국가정책에는 부응할지 모르지만 이로 인해 지방 고유의 탯말이 점차 사라지고 있음은 문화적 차원에서 볼때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만약 이 같은 추세가 계속 이어져 2,30년 후 지금의 장년층과 노년층의 세대가 표준어를 구사하는 젊은 세대로 교체되면 탯말은 더 이상 들어보기가 힘들게 될 것이 틀림없다.
표준어규정집은 우리나라에만 있다
그렇다면 외국의 사례는 어떤가.
전 세계 어느 나라를 보더라도 성문화된 표준어 규정집을 만들어 놓고 그것에 따르도록 하는 나라는 없다. 왜‘아비’는 표준말이고 그보다 훨씬 더 많이 쓰이는‘애비’는‘아비의 잘못’인가?
미국만 하더라도 아빠는‘pop’, ‘papap’, ‘poppa’, ‘pa’, ‘dad’, ‘daddy’ 등으로 다양하게 부르지만 오직 하나만 있 어야만 하고 그것이 옳다는 규정이 없다. 어떤 한 가지 사물, 혹은 사상을 표현하는 단어가 한 가지여야만 한다는 법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스페인은 4개의 각 지역 언어를 표준어로 채택하고 있으며 스위스는 4개의 외국어를 공용어로 쓰고 있다. 50개 인종이 모여 사는 중국은 각각의 언어를 인정하고 또 싱가포르는 전체 인구의 77%가 중국인이지만 불과 7%의 인도네시아인과 14%의 말레이시아인을 타밀어와 말레이어를 영어와 함께 공용어로 채택하고 있다.
캐나다만 해도 인구의 25%가 불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영어와 공존하며 살고 있지만 이들 나라가 우리나라보다
국민통합이 안 된다는 징후가 그 어디에도 없다. 특히 전라도나 경상도 말은 외국어가 아니지 않은가.
지방 토속어 전승은 다양한 문화가치의 존중
지금은 문화다양성이 존중되는 시대다. 사고나 언어 등의 다양성 속에서 문화가 꽃피고 그 가치를 더 인정받는
시대다. 없는 특산물은 열심히 만들어 내면서 왜 이보다 더 소중한 정신적 문화적 자산인 우리 탯말은 지키지 못하는가.
거기다가 표준어의 정의라는 것이‘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이라니! 그럼 탯말을 쓰는 사람들은‘교양이 없는’사람들이란 말인가? 이에 우리 탯말두레 회원들은 2006년 5월 이‘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쓰는 현대 서울말’을 표준어로 정한 것은 지역어 사용을 제한할 뿐 아니라 지역에 대한 차별대우로 행복추구권과 평등권, 교육권을 침해해 헌법에 위배되기 때문에 이를 시정해 달라고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전국의 거의 모든 언론이 이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만약 우리가 이긴다면 우리나라어문정책의 근간을 바꿔야 하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그런 만큼 헌법재판소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리고 2년 5개월이 지난 2008년 11월 헌법재판소는 탯말두레와 문화관광부 양측의 변호사, 학자들을 불러 공개변론을 열었다. 그런 다음 또 1년이 지난 2009년 5월 헌번재판소는 현행 표준어 규정을 지키는 것은 합헌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헌법재판관 9명 가운데 2명의 재판관은 특정 지역어를 표준어로 정하면 그 밖의 방언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언어생활이 상당히 위축되고, 매스컴 발달 등으로 전국적인 방언의 차이가 의사소통에 별 어려움을 주지 않을 만큼 약화했음에도 과거 기준을 엄격하게 고수하는 것은 오히려 언어 발달을 저해한다며 위헌 의견을 냈다. 두재판관은 지역어도 누대에 걸쳐 전승된 우리 모두의 문화유산임에도 표준어에서 배제해 해당 지역민에게 문화적박탈감을 주는 것은 표준어 선정의 합리적인 방법이 아니고 서울말만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한 표준어 기준으로 삼기에는 지나치게 좁고 획일적이라고 강조했다. 우리는 아쉬움이 많았지만 여기서 만족하기로 했다. 탯말은 점점사라지고 있기 때문에 정부의 정책이 바뀌지 않으면 언젠가 다시 헌법소원을 낼 것이며 그 때는 우리가 옳다는 것을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뭐라카노, 저편 강기슭에서/ 니 뭐라카노, 바람에 불려서/ 이승 아니믄 저승으로 떠나는 뱃머리에서/ 나의 목소리도 바람에 날려서/ 뭐라카노 뭐라카노/ 썩어서 동아줄은 삭아 내리는데(박목월- 이별가 일부)
오매 단풍 들것네/ 장광에 골 붙은 감잎 닐러오아/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 보며/ 오매 단풍 들것네/ 추석이 내일모레 기둘리니/ 바람이 자지어서 걱정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매 단풍 들것네(김영랑-오매 단풍 들것네)
이 두 시만 보더라도 탯말이 아니면 시어가 주는 이런 애틋한 감흥을 어찌 맛볼 수 있을 것인가. 조정래의 태백산맥이나 최명희의 혼불, 박경리의 토지도 그 문장에 있어서 다 마찬가지다. 그러나 앞으로 이처럼 탯말을 사용한 시나 소설의 문학작품과 드라마 등의 방송작품도 더 이상 나오지 않는 시대가 조만간 오게 될 것이다. 탯말을 제대로 구사할 줄 아는 시인이나 소설가, 방송작가가 없기 때문이다. 참으로 안타깝고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탯말을 사랑하는 것은 나를 사랑하는 것이요, 내 고향을 지키며 살았던 어머니와 아버지, 조상을 사랑하는 것이며 고향의 흙과 바람과 구름과 물과 나무를 사랑하는 것이다. 탯말 속에 우리가 잊고 사는 고향이 있다.
※필자 박원석: 방송작가. 출판사 소금나무 대표. KBS 등에서 20여년 동안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통일 외교 분야의 각종 특집과 주요일일프로그램을 집필했으며 특히 농협중앙회에서 지난 80년대부터‘도농나들이’,‘ 양액재배’,‘ 이스라엘 농업을 가다’등 농업 및 농촌계몽, 교육홍보프로그램을다수집필했다.『 전라도우리탯말』(공저),『 아버지의신발』등다수의책을집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