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 농촌문화┃잃어버린 두레 그리고 자급 소농

우리는 여러 사람들이 모여 조화롭게 이루어 가는 협동생활을 아름답다고 한다.
모두 똑같은 것은 아니지만 특별한 강자도 없고 약자도 없이 엇비슷한 사람들이 힘을 모아 삶의 문제에 함께 대응하는 협동생활은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인간이 영위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들의 절박한 필요 때문이다. 협동생활을 제도화한 협동조합도 강자들의 틈에 끼인 약자들인 장인들과 소상인 그리고 노동자들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서구의 협동조합은 전통적 자연경제가 자본주의화 즉 교환경제(시장경제) 및 화폐경제로 대체되면서 발생했다. 그러나 이런 협동조합이나 협동운동의 전통은 서구 아닌 이 땅에도 일찍부터 있었다.
나이가 좀 든 이 땅 사람들에게‘두레’라고 하면, 대부분은‘아 그 품앗이 말이냐’는 반응을 보인다. 지난 성탄전야에 KBS주최 연예인들의 자선공연에 출연한 국무총리라는 사람이“우리 민족은 옛날부터 품앗이, 두레 등으로 서로 돕는 아름다운 전통을 갖고 있다.”는 내용의 발언을 한 것도 품앗이와 두레가 비슷한 것으로 이해한 결과다. 그러나 두레와 품앗이는 상당히 다르다. 품앗이는 주로 가족단위 생산에서 한 집의 1인 노동과 다른 집의 1인 노동을 1대 1로 맞바꾸는 노동형태로 요즘의 임금노동과는 물론 다르지만, 임금노동 전 단계의 교환노동형태다. 그런데 두레는 가족 단위의 생산 대신 한마을 전체의 경작지를 하나의 생산 단위로 잡고 각 집에 있는 16세 이상 55세 이하의 남성들이 모두 함께 모여 일하는 공동생산조직이자 모든 마을 대소사들도 주도하는 문화 및 자치조직이다.

두레와 품앗이는 상당히 다르다. 품앗이는 주로 가족단위 생산에서 한 집의 1인 노동과 다른집의 1인 노동을 1대 1로 맞바꾸는 노동형태로 요즘의 임금노동과는 물론 다르지만, 임금노동전 단계의 교환노동형태다. 그런데 두레는 가족 단위의 생산 대신 한마을 전체의 경작지를 하나의 생산단위로 잡고 각 집에 있는 16세 이상 55세 이하의 남성들이 모두 함께 모여 일하는 공동생산조직이자 모든 마을 대소사들도 주도하는 문화 및 자치조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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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그러나 이미 사라진 전통-마을두레

두레의 의무적 구성원의 자격인 16세 이상에서 55세 이하까지의 남성은 한 집에 1명 이상이 있을 수도 있고 한명도 없을 수도 있다. 각 집에 가진 경작지의 면적도 두레 구성원들이 소농이라 큰 차이는 없다 해도 꽤나 차이가 난다. 그런데도 이런 식으로 공동노동,공동생산하게 되면 불공평이 따르지 않겠느냐는 의문을 품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간단한 두레 산법으로 쉽게 해결된다. 두레 일꾼을 한 사람도 내 놓지 못하는 아녀자나 장애인 집의 경우에는 일정 면적 이하의 경작지는 그대로 (무상으로) 농사를 지어준다. 일정 면적이 초과할 경우에는 그 면적에 따라 추수 뒤에 일정량의 수확물을 두레기금으로 내 놓는다. 두레에 한 사람 이상의 두레 일꾼을 파견했다 해도 이 역시 정해진 면적이상일 때는 두레기금을 내 놓아야 한다. 그래야만 이 두레기금으로 농지가 없거나 일정 면적 이하인 두레 구성원집에 생계비로 분배할 수 있고, 나머지는 마을 공동기금으로 쓸 수 있는 것이다. 이게 전통 소농두레 속에서 자생한 상부상조의 차원을 넘어선 우리식의‘자치복지’또는‘자연주의복지’제도다.
이 같은 자생적인 공동생산과 부분적인 재분배 제도로서의 마을두레도 물론 원시 공동체 사회에 연원을 둔 오래된 전통이다. 그러나 이런 공동생산의 전통은 통일신라기부터 농경이 부족 또는 씨족 단위에서 가족단위로 개별화되면서 가족 단위로 해체되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와서 벼농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향도·향약 등의 이름으로 재구성되다가 18세기 조선후기에 본격적으로 도입된 수경이앙농법(水耕移秧農法)과동시에 우리가 지금 말하고 있는 형태의‘두레’가 등장한다.
첫째, 두레는 농촌마을에서 자생한 공동노동조직이다. 수리시설이 부족해서 주로 천수에 의존했던 당시의 수경이앙농법에서 비가 한꺼번에 내리면 마을에 여유 있는 몇 집에만 있는 농우로 한꺼번에 논물을 잡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때의 논물을 잡고 모심는 우선순위를 정하고 매어도매어도 끝이 없는‘잡초와의 전쟁’을 잡초 매는‘일놀이’로 만들어 마을의 농업 생산량을 최대로 높이기 위해서는 이 같은 마을 단위의 두레생산 밖에 다른 길이 없었다. 두레는 이처럼 일차적으로는 서구식의 협동조합과는 약간 다른 자생적 공동노동조직이었지만, 그것만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다.
둘째, 두레는 마을에서 자생한 문화 조직이기도 했었다. 그것은 두레와 우리 전통 농악과의 관계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농악은 놀 때뿐만 아니라 일하러 논밭으로 나갈 때도 길군악 장단 등으로 함께 가고, 두레꾼들이 일할 때도 북이나 장구 등 일부 농악수들은 일을 하는 대신 앞소리와 뒷소리의 장단을 맞추며 일과 놀이를 통일하는 역할을 한다. 또 농악은 농한기의 마을대동굿(추수 감사와 풍농기원굿) 등의 마을의례를 주도한다. 마을굿을 유교식 제의나 무당굿으로 하는 경우에도 지신밟기 등의 제의나 유흥은 역시 농악이 주도했다.
이밖에도 마을의 거의 모든 집단행사에는 풍물농악이 동원된다. 풍물패는 단순히 사물로 된 소리집단이 아니다. 풍물의 악기는 북, 장구, 꽹과리, 징에만 국한되지 않고 고동, 피리, 젓대, 소고, 날라리 등 거의 모든 전통 민속악기가 총동원된다. 그것은 이런 악기들과 춤과 소리와 시와 연극 등이 미분화된 상태의 종합예술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고 있는 거의 모든 민중문화 장르들의 모태는 풍물농악이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다. 그래서 이 풍물농악을 집대성한 두레는 마을문화단체이기도 한 것이다.
셋째로 두레는 자급·자치 민주주의의 한 전형이다. 민중들의 두레 시절에도 막강한 중앙집권적 조선 정부가있었다. 양반, 관료의 수탈도 오히려 극심했었다. 그래서 두레는 뺏기고 당하고만 사는 농민들이 스스로 살아남기 위한 자위 수단이기도 했었다. 비록 역부족으로 국가 등 외부로부터는 뺏기고 예속당할 수밖에 없었지만, 적어도 이런 두레를 통해 마을 안의 사람들 간에는 그런 수탈과 예속을 방지할 수 있었다. 두레는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자가 따로 없는 평등사회를 지향했었다. 외부의 수탈과 침략, 흉작, 질병 등으로 어쩔 수 없이 마을의 대다수 사람들이 굶주려 죽는 경우는 허다했지만, 그런 경우가 아닌 한 앞에서 말했듯이 소수의 마을 사람만 굶어 죽게 하는 불평등과 비정을 막는 마을 자치가 두레였다. 이런 두레 자치는 힘이 없어 외부에 뺏기기는 했을지언정, 남의 것을 뺏거나 의존하지 않는 물질적 자급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두레마을에서는 오늘날처럼 기득권자, 엘리트 등의 귀족들을 마을 대표로 선출하는 사이비 선거 민주주의는 없었다. 보수 없는 두레대표는 만장일치로 추대되었다. 의사결정을 하는 두레회의는 오늘날과 같은 다수결로 소수에 가하는 폭력이 아니고 모든 마을사람들이 빠짐없이 승복할 때까지 며칠이고 몇 달이고 제한 없이 계속 되었다. 두레의 전 과정이 의사결정과정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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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급·자치·평등의 두레-그 토대는 소농

이 같은 두레의 정착 계기는 노동집약적인 벼농사, 특히 수경이앙농법에 있다고 앞에서 말했지만, 그 물질적 기초는 어디까지나‘소농’이었다. 조선후기에 벼농사를 광작 경영했던 이른바 경영형 부농이나 양반 대지주들은 결코 두레의 구성원으로 들어오지 않았고 받아주지도 않았다. 두레는 마을에 함께 거주하는 자급적 소농들만 동참할수 있었다. 두레는 철저하게 소농들의 한계와 문제에 부응하기 위한 소농두레였다. 그러므로 소농사회를 회복하지 않는 한 두레의 복원도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 땅의 소농들은 두레에 뒤이어 이미 사라지고 없다.
지금 세상 돌아가는 꼴로 보아 소농사회로의 복귀는 영영 불가능해 보인다.
2009년 4월 15일의 신문들에는 현대 중공업이 연해주에 서울여의도 면적의 33배나 되는 9천9백 헥타르(2천9백70만 평)를 인수하고 2012년까지 5만 헥타르로 확장하여 연간 6만톤의 콩과 옥수수를 생산할 계획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그 엿새 뒤인 4월 21일자《조선일보》A34면의 고정칼럼란의 <최재천의 자연과 문화 – 연해주 농장>이라는 글에서는 그런 현대 중공업의“경영진의 혜안에 큰 박수를 보낸다. -이렇게 한 기업에 대놓고 노골적인 찬사를 보내는 까닭은 조만간 불어 닥칠 세계적인 식량 위기 때문이다.”라는 실로 낯 뜨거운 아부가 실려 있다. 현대중공업이 앞으로 닥칠 대한민국의 식량위기를 해결해 주기 위해 연해주 땅을 샀다는 말도 안 되는 얘기다.

아스피린과 제초제로 전 세계를 초토화시킨 몬산토사는 이보다 훨씬 앞선 1990년
대에 화학 사업을 정리했다. 그 대신 이 회사는 한국의 종묘사들과 전 세계의 중
소 종묘사들을 거의 다 사들여 작물의 씨앗을 독점하고 옥수수, 콩, 면화 등의 유
전자를 조작한 GMO 종자의 특허로 생명의 신비와 비밀까지 독점하면서 이른바
바이오 산업분야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다.

2009년 8월 15일자《조선일보》에도 이 신문의 당시 논설실장인 송희영의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기명칼럼이 실려있다. 일본의 대 화학회사인 미쓰비시케미컬의‘야채공장’진출을 소개하고 그것의 시장경쟁성과 자원효율성을 극찬했다. 뒤이어 세계적 다국적 화학기업이었던 듀폰사와 몬산토사가 바이오산업(농업산업)으로 전업한 사실을 고무적으로 소개했다. 아시다시피 듀폰사는 나일론, 스테판텍스 같은 석유화학제품으로 떼돈을 번 화학기업이다.
이 기업이 석유화학 섬유산업을 2004년에 접고 농업회사로 변신했다. 아스피린과 제초제로 전 세계를 초토화시킨 몬산토사는 이보다 훨씬 앞선 1990년대에 화학 사업을 정리했다. 그 대신 이 회사는 한국의 종묘사들과 전 세계의 중소 종묘사들을 거의 다 사들여 작물의 씨앗을 독점하고 옥수수, 콩, 면화 등의 유전자를 조작한 GMO 종자의 특허로 생명의 신비와 비밀까지 독점하면서 이른바 바이오 산업분야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다. 송희영은 이런 사실들을 소개하며 우리 농정도 지금까지의 개별농가나 영세한 영농조합법인에 대한 정부지원방식을 철회하고, 이런 대
기업의 농업 진출에 집중 지원해야 앞으로의 식량자원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희한한 주장을 펼쳤다.
이런 다국적 대기업의 농업회사는 송희영의 주장과 같은 명분을 내걸고‘공장야채’나 환경단체로부터‘프랑켄슈타인 식품’으로 질타 받는 GMO 농작물 등을 생산하여 인류 전체의 생명을 상대로 끔찍한 인체실험을 감행하고 있다. 과연 이들이 인류의 식량위기 해결을 위해 이런 무모한 실험을 감행하고 있을까? 기업의 목적은 자선이나복지가 아니라 자고로 이윤 추구에 있다. 제한된 석유 자원과 고유가로 석유화학 시대는 머지않아 저물어 갈 것이고 앞으로는 식량의 위기시대, 바이오시대가 될 것이다. 그 기회를 선점하여 다음 시대에도 이윤 추구를 계속 극대화하기 위해 농업회사로 전업했지, 특정 나라의 식량위기의 해소가 그들의 목적일 수는 결코 없다.
그 증거는 이런 대기업들의 대대적인 농업 진출에도 불구하고, 아니 이들의 농업 진출에 따른 투기자본들의 식량독점으로 오히려 식량위기는 날로 증대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은 석유 값의 불안한 안정(?)으로 일시적으로 좀 잠잠해진 것 같지만, 2008년에는 세계 도처의 빈국에서 식량 폭등이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세계식량기구(FAO)에 의하면 지금도 식량위기에 시달리거나 잠재적 위기에 처해 있어 당장 외부지원이 필요한 나라가 37개국이나 된다고 한다. 이들은 거의가 소수의 권력자에 의해 농지가 독점되거나 일찍부터 식민지주의나 외세에 의해 커피, 사탕수수, 코코아, 면화 등의 단작농업으로 소농들이 구조조정을 당한 나라들이다. 농업의 단작화, 화학화,첨단기계화, 자동화, 공장화를 통한 대기업의 독점은 아시다시피 자급소농의 소멸과 인간생명의 자본예속으로 귀결된다.

소농이 식량자급(안보)과 사회 안정의 근본이라는 사실은 소농을 가장 효과적으로
먼저 해체했던 현실사회주의국가의 말로가 웅변해준다. 소련을 비롯한 현실사회주
의 진영의 줄도산은 자본주의보다 한 발 앞선 자급소농의 완벽한 해체 때문이었
다. 특히 북한의 극심한 식량난은 소농사회가 가진 의미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소농이 식량자급(안보)과 사회 안정의 근본이라는 사실은 소농을 가장 효과적으로 먼저 해체했던 현실사회주의국가의 말로가 웅변해준다. 소련을 비롯한 현실사회주의 진영의 줄도산은 자본주의보다 한 발 앞선 자급소농의 완벽한 해체 때문이었다. 특히 북한의 극심한 식량난은 소농사회가 가진 의미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소련의 지원으로 건국한 북한은 전통 소농들을 즉시 해체하고 소련식의 집단 농장을 만들었다. 소련과 전혀 다른 좁은 땅이지만 소련의 지원이 계속되는 동안은 그런대로 그 체제의 유지가 가능했었다. 그러나 소련의 붕괴로 석유 등의 자원공급이 중단되자 기계화학적 집단농장들은 큰 타격을 받고 식량생산량의 급속한 감소로 식량위기에 봉착했다.
소농은 그 두레와 함께 식량자급의 근본일 뿐만 아니라 자급자치 민주주의 – 직접 민주주의의 뿌리이기도 하다. 민주주의의 근본이 자원독점 아닌 평등이라면 자급소농 이외의 다른 평등의 길은 없다.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제퍼슨도 산업주의를 자급농민을 공장노동자로 만들고 가족들을 독립적인 생산단위에서 고립적인 직업을 가진 소비자로 해체하는 반공동체적 반민주적인 체제로 보았다. 이에 비해 소농공동체는 스스로 자급함으로써 스스로 주인이 되게 하는 민주주의의 초석이라고 했었다. 미국의 농부 시인 웬델 베리도 자급 소농 없는 민주주의는 허구라고 했다. 중국의 경제학자이자 향촌재건운동가인 원 티에츈(溫鐵軍)도 기업농이야 말로 근대산업주의와 함께 전형적인 식민주의의 산물 즉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없는 민주주의의 적으로 보았다.
석유로 상징되는 제한된 지하자원 – 재생순환이 불가능한 지하자원을 탕진하여 쓰레기를 만드는 이 산업주의,시장주의 문명은 누가 봐도 지속이 불가능하다. 대체 에너지, 대체 자원은 물론 개발되겠지만 그것도 땅 위가 아니면 공기 중이라는 역시 제한된 공간에서 나올, 더 제한된 비싼 자원일 수밖에 없다. 파괴와 종말로 질주하는 산업, 시장주의 문명으로부터 우리의 유일한 삶의 터전인 이 지구를 지키는 파수꾼도 재생순환과 생산 및 소비가 통일된 자급소농 두레밖에 다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

※필자 천규석: 한살림대구 이사,《 소농 버리고 가는 진보는 십리도 못가 발병난다.》(실천문학사 2006년),《 천규석의 윤리적 소비》 (실천문학사 2010년) 등의 저서를 통해 소농두레 세상의 재구성을 꿈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