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농촌,
휴식과 치유의 공간

22-1

유럽의 농촌에서 모델을 찾다
내가 사는 산청의 간디숲속마을에는 예쁜 정원을 가꾸면서 개인천문대를 운영하는 친구가 있다. 주말마다 도시손님들이 많이 찾아온다. 그녀와 대화 도중 귀가 번쩍 뜨이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귀촌 초반, 한 단체에서 주관하는 프랑스농촌 연수를 다녀왔는데, 그곳에서 보고 배운 것이 체험시설 운영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다. 아, 그런 연수도 있구나! 나도 한번 가보고 싶었다.
2월, 페이스북에서 대산농촌재단의 유럽농촌연수 공모를 보았다. 간절히 원하면 기회가 오는구나! 연수의 신청조건을 보고는 잠시 망설여졌다. 내가 과연 농업인인가? 일단 지원서를 쓰다 보니 나는 이미 시골사람이었고, 시골에서의 꿈도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올 초 나는 비폭력대화 전문가라는 이유로 마을 부대표가 되어 주민들 간의 의사소통을 돕게 되었고, 마을운영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그리고 정부의 공모사업 계획서를 준비하면서 주민들의 꿈과 내 꿈을 합쳐 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도시계획을 전공하고 연구자로 살던 나는 자유로운 삶을 찾아 2년 전 직장을 그만두었다. 자유에 대한 욕구가 충족되자 회복과 치유의 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오래된 꿈이 마을에서 서서히 자라났다. 유럽의 농촌에서 나는 그런 모델을 보고 싶었다.

독일 람사우교회와 가족묘지. 묘지 앞 한 뼘의 공간은 정성이 깃든 정원이다.
독일 람사우교회와 가족묘지. 묘지 앞 한 뼘의 공간은 정성이 깃든 정원이다.

휴식과 치유가 있는 유럽의 농촌
대산농촌재단의 유럽연수단에 합류하여 10일간 독일, 오스트리아의 국도와 고속도로를 달렸다. 들판에는 5월의 노란 유채꽃과 푸른 초원이 넘실거렸다. 영화에서나 보는 멋진 경관의 연속이다.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이곳 농업의 가치 중 하나가 농촌경관이라는 말이 실감 난다. 조상이 물려준 아름다운 경관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지금 이대로 후손에게 물려주자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란다. 그래서 곧은 길보다는 구불구불하고 좁은 길을 기꺼이 받아들인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흔한 비닐하우스는 보이지 않았다. 제철에 나는 것만 먹어도 충분하다는 것, 과일도 크고 작고 잘생기고 못생기고 구분 없이 모두 귀하게 먹자는 것이 이곳 먹거리 철학이라고 한다. 그런 먹거리 철학이 농촌의 자연경관을 지켜준 것인지, 자연경관을 보존하기 위해 그런 먹거리 철학이 생겨난 것인지 궁금하다.
알프스 지역에서는 하얀 벽과 나무 벽을 바탕삼아 심어놓은 나무들이 자주 보였다. 그렇게 심어 놓으니 나무 한 그루도 작품이다. 식당이나 농가에는 손으로 만든 자연의 작품이 늘 보였다. 자연에 사는 즐거움 중 하나는 지천으로 널린 자연의 재료를 이용하는 만들기다. 삶에 여유가 있어 보인다.
오스트리아 티롤지방에서 방문한 농가에서는 안주인이 가꾼 아름다운 텃밭과 마당의 장식이 눈에 들어왔다. 집안 곳곳이 깔끔하고 예술적이었다. 이곳 농촌 여성 중에는 ‘농촌가정경영학교’를 나온 사람이 많다. 농촌에서 살아가기 위한 다양하고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이른바 전문가들이다. 농촌의 삶을 풍요롭고 격조 있게 가꾸는 데는 이들이 큰 역할을 하는 것 같다.
농촌마을 한가운데 교회 안의 묘지도 인상적이었다. 묘비 앞의 한 뼘 공간은 가족의 정성이 깃든 작은 정원이었다. 소를 몰고 씨 뿌리는 모습이 새겨진 묘비에서는 농부로 사셨던 부모님을 존경하는 자식의 마음이 읽힌다. 부모의 무덤을 가까이에 두고 자주 찾아와 정성스레 가꾸면서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삶은 어떤 것일까. 연중행사로 찾아가는 우리네 삶과 한참 다를 것 같다.

오랜 인연으로 찾는 농가 민박
이틀 밤을 머문 알프스 농가민박 주변은 온통 초원이다. 농가에 딸린 텃밭도 아주 작다. 알프스 고원지대는 기후가 추워서 풀농사만 가능하다고 한다. 풀을 먹는 동물들에게 풀은 귀한 먹거리이다. 영양가 있는 풀도 따로 있단다. 아침부터 들판에는 풀 베는 트랙터 소리가 들린다. 여기저기 베어 놓은 풀도 보인다. 겨울에 소에게 먹일 건초를 장만해두는 것이다. 이렇게 관리하니 풀과 잡목이 우거진 들판은 없다. 골프 좋아하는 사람이 온다면 국토가 온통 골프장이라 여길 만큼, 잘 가꾸어진 초원이 드넓게 펼쳐져 있고 낮에는 그 초원 위에서 소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다.

클라인가르텐은 다양한 이웃과 친밀감을 높이는 사회적 기능이 더 의미가 있다.
클라인가르텐은 다양한 이웃과 친밀감을 높이는 사회적 기능이 더 의미가 있다.
괴리스리드 마을 숲에선 보고 듣고 만지고 냄새맡고 맛보는 오감체험 장치가 더 없이 훌륭했다.
괴리스리드 마을 숲에선 보고 듣고 만지고 냄새맡고 맛보는 오감체험 장치가 더 없이 훌륭했다.

초원에서 천천히 풀을 뜯는 소와 말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평화롭다. 좁은 우리에서 사육당하지 않고 자유롭게 노니는 것이 동물들에겐 복지일 것이다. 동물복지라는 말을 이곳에서 처음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선 개들도 짖지 않고 고양이도 사람을 피하지 않는다. 사랑을 듬뿍 받고 커서 두려움이 없는 걸까?
농가민박은 집과 연이어진 우사 안에서 소를 키웠다. 그런데도 소똥 냄새가 나지 않는다. 풀만 먹여 그렇기도 하고, 앞뒤로 통풍이 잘되니 그럴 것이다. 게스트실은 더없이 깔끔하고 아늑하다. 민박경력 25년. 5월에서 9월까지의 성수기에는 오랫동안 인연 맺은 손님들이 일주일 이상 머물다 간다고 한다. 이곳 농촌은 하루 머물고 떠나는 관광지가 아니라 휴식의 공간, 고향처럼 찾아와 조용히 쉬다 가는 곳이란다. 작년 여름, 에어비앤비Airbnb를 통해 우리 집에 머물렀던 가족이 생각났다. TV, 인터넷도 없는 집에서 책 읽고 뒹굴며 보낸 삼일이 너무나 좋았다고 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자연 속에서 온전한 휴식이 되는 휴가를 원하고 있었다.
마을가꾸기 경진대회에서 금상을 받은 괴리스리드 지방자치단체. 전통의상을 입은 군수의 안내로 오랜 시간 돌아본 그곳의 마을 숲에선 보고 듣고 만지고 냄새 맡고 맛보는 오감체험 장치가 감동적이었다. 이곳 인구의 4분의 1이 아이들이라는데, 아이들을 위한 생태체험공간으로 더없이 훌륭했다. 이 모든 것을 70 넘은 건축가가 주민 3명의 도움으로 10년간 가꾸었다고 한다. ‘나무를 심은 사람’처럼 한 사람의 커다란 힘을 보았다.

독일국민의 50%를 행복하게 하는 ‘클라인가르텐’
연수지 중 유일하게 도시에 있는 도시텃밭 클라인가르텐. 모든 도시는 도시계획을 세울 때 반드시 넣어야 하는 곳, 병원의 병상 수를 줄이고 독일국민 50%를 행복하게 한다는 곳이다. 4년 마다 열리는 경진대회에서 11번이나 금상을 받았다는 칼스루에의 클라인가르텐협회와 인근의 단지를 방문했다. 클라인가르텐은 환경적 기능보다 땀 흘리며 일하면서 다양한 이웃들과 친밀감을 높이는 사회적기능이 더 의미 있다고 한다. 각자 개성껏 꾸민 90평의 정원들이 모여 멋진 공간이 되었다. 사는 곳에서 5분 안에 녹지가 있다는 독일의 도시일지라도 내 손으로 가꾸는 작은 땅이 의미 있고 소중하다는 걸 이곳에서 본다.
마을 한가운데 있는 교회안의 묘지, 클라인가르텐 모두 작은 땅의 주인이 개성껏, 정성껏 가꾼 조각들이 커다란 모자이크 작품을 만든다. 아름다운 조화를 만들어내는 보이지 않는 힘이 경이롭다. 의미 있게 다가온 건 클라인가르텐이 시작된 이야기다. 1800년대 말 산업화시기에 닥터 슈레버 박사는 찾아오는 환자들에게 “햇볕을 쬐고 맑은 공기를 마시며 흙에서 푸른 채소를 가꾸라”는 똑같은 처방을 내렸고, 슈레버 박사의 사위인 게셀이라는 초등학교 교사가 슈레버 광장을 만들고 어린이가 농장실습과 놀이를 할 수 있게 실습농장을 만드는 작은 실험을 하면서 클라인가르텐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작은 실험, 작은 실천이 세상을 바꾼다는 말이 떠올랐다.

황홀함과 절망감, 그리고 희망
독일, 오스트리아의 정돈되고 아름다운 농촌환경을 보는 일은 황홀하기도 하고 절망스럽기도 했다. 우리의 어수선한 농촌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도 오랜 시간을 들여 늪지대와 덤불밭을 아름다운 초원과 숲으로 가꾸어 왔을 것이다. 괴리스리드 마을숲과 클라인가르텐이 만들어진 과정은 그래서 희망을 준다. 바로 한 사람의 울림으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마을 뒤편에는 10여 년간 방치된 마을 숲이 있다. 올 초부터 그 곳을 한 가구당 300평씩 나누어 가꾸기로 했다. 나도 그 땅에 허브정원을 만들기 시작했다. 연수를 떠나기 전날까지 매일 서너 시간을 그 숲에서 보냈다. 칡덩굴이 무섭게 자라나고 모기가 기승을 부리는 요즘도 일주일에 이삼일은 그곳에 들른다. 며칠만에 잡초가 점령하는 모습을 보면 암담하기도 하지만 10년간 할 일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
오는 7월 22일, 우리 간디마을에서는 청년들을 위한 비폭력대화워크숍이 열린다. 숲가꾸기의 원년에 나의 오랜 꿈인 힐링캠프가 열리는 것이다. 아직은 시설도 불편하고 덜 가꾸어진 마을에서의 캠프이지만, 10년쯤 뒤에는 아름다운 마을길과 숲길을 거니는 힐링캠프가 될 것이다. 시골 교회안의 묘지들이 아름다운 공원을 이룬 것처럼, 도시속의 클라인가르텐처럼, 한 조각, 한 조각 맞추어 가다보면 언젠가는 아름다운 큰 그림이 되어 있을 것이다.

25-2※필자 윤인숙: 도시계획을 전공하고 신도시를 만드는 회사에서 연구원으로 일했다. 2년간의 주말 시골살이 후 회사를 그만두고 2년 전 산청의 생태마을로 귀촌했다. 박하 밭을 가꾸는 일과 비폭력대화를 이웃에게 전하는 두 가지 일을 하고 있으며, 휴식과 치유가 있는 힐링마을을 만드는 게 꿈이다. 저서로는 주말 시골살이의 즐거움을 담은 ‘마음을 정하다’(2014,한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