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산 신용호 선생과의 인연
대산 신용호 선생과 나는 특별한 인연이 있다. 공식 석상을 제외하고 대산 선생을 독대한 것은 세 번. 다 선생의 제의로 만났다. 1980년대 중반, 태국 방콕에서 ‘UNFAO (국제식량농업기구) 아시아・태평양 유통・경제책임자’로 일하고 있을 때 중국 관계 일로 처음 만났고, 두 번째 만남은 1990년대 초 우루과이라운드UR, WTO 등 농민들이 큰 절망에 빠졌을 때 시민연대 상임집행위원장으로 대규모 반反 UR 집회를 하고 있을 때였다.
대산 선생은 “난 정치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우루과이 라운드에 대해 김 교수가 주장하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 잘 모른다. 하지만 농촌과 농민을 생각하고 위하는 마음만은 느껴진다.”며 “내가 농업·농촌 공익 재단을 만들테니 농촌의 교육과 문화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봉사하는 마음으로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대산농촌재단이 설립되어 기꺼이 참여했다.
대산 선생이 가슴 속 깊이 간직했던 꿈을 털어놓은 것은 내가 농림부 장관으로 재임하던 1998년, 세 번째 만남에서였다.
“내 삶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여생에 마지막으로 이 땅의 농촌, 농민에게 진 빚을 갚고 떠나고 싶다.”
“무슨 빚을 졌다는 것입니까?” 모범적인 기업가로서 한평생을 보내신 분인데 의아해서 묻자,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농민의 자손으로 여태껏 살아왔다. 교보생명의 밑바탕에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나를 키워주고 늘 마음의 힘이 되어준 농촌과 농민에 대한 애정이 있다. 원주시 문막에 있는 내 개인 땅을 농촌과 농민에 대한 사랑을 대대손손 길이 남길 수 있는 공익사업으로 사용하고 싶은데 좋은 아이디어를 좀 얻고 싶다.”
“그것이 어찌 선생만이 갚아야 할 빚이라고 생각하십니까?”라며 감히 그분의 뜻을 여쭈었다. 선생은 “짐승도 죽을 땐 고향으로 간다. 가지 못하면 머리라도 고향을 바라보고 죽는다. 내가 어찌 나를 키워준 고향이고 큰 힘이었던 농촌과 농업을 잊겠느냐?”라고 대답하였다.
나는 캐나다의 밴쿠버 아일랜드에 있는 ‘부차드 가든Butchart Garden’ 이야기를 했다. 원래 이곳은 석회광산 터였는데 시멘트업자인 로버트 핌 부차드Robert Pim Butchart와 부인인 제니 부차드Jennie Butchart가 석회암을 채굴해서 큰돈을 벌었다. 석회석을 실은 마지막 배가 항구를 떠나는 모습을 제니가 바라보고 있을 때, 누군가 슬며시 그녀의 손에 강낭콩과 꽃씨들을 쥐어 주었다. 제니 부차드는 그걸 정원에 심었고, 아름답게 핀 꽃들을 바라보면서 석회를 파내면서 아름다운 대자연을 무참하게 파괴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후 부차드 부부는 황폐해진 광활한 석회광산 터에 세계각지에서 모아 온 각종 씨앗과 꽃나무들을 심고 가꾸었다. 그렇게 해서 오늘날 세계적으로 공인된, 매년 200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1년 4계절 찾아오고 식물・화훼학자들이 모여 연구하는 세계 최대 최고의 정원으로 재탄생하게 된 것이다.
대산 선생은 “그런 곳이 있었느냐?”며 감탄했고, 나는 곧바로 현지에 부탁해 ‘부차드 가든’에 관한 비디오테이프를 구해다 드렸다. 그걸 보신 후 선생은 다시 나에게 부차드 가든 같은 정원 만드는 일을 맡아줄 수 있는지 물었고, 청년 시절부터 명예, 권력, 돈 중 명예의 길을 걷겠노라고 아버지에게 맹세한 나는 섣불리 답할 수 없었다. 적임자를 찾지 못한 대산 선생의 ‘한국적 부차드 가든’은 꿈으로 남았다.
대산 선생의 마지막 꿈은 아쉬움과 함께 당신 생애의 미완으로 남았다. 그러나 대산 선생의 농업, 농촌, 농민을 향한 특별한 사랑과 고매한 정신의 향기는 길이길이 온 누리에 퍼져나갈 것이다.
글 김성훈
※필자 김성훈: 중앙대 명예교수, 1998~2000년 제 50대 농림부 장관을 지냈고 상지대 총장, 경실련 공동대표를 역임했다. 저서로 『더 먹고 싶을 때 그만두거라』(2009,한국농어민신문),『워낭소리, 인생 삼모작의 이야기』(2014,따비) 등 다수가 있으며 지속 가능한 농업과 농촌을 위한 다양한 시민·집필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