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와 자립으로 지속 가능한
슬로푸드 멜버른 파머스마켓

글․사진 김송희

손수 만든 예쁜 간판에 눈길이 간다. 오가닉 인증 마크와 로컬푸드 표지판을 걸어놓았다.
손수 만든 예쁜 간판에 눈길이 간다. 오가닉 인증 마크와 로컬푸드 표지판을 걸어놓았다.

12월이면 초여름으로 접어드는 호주는 대규모 상업농을 기반으로 수출이 왕성한 농산업 국가이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농업 지역 중 하나인 빅토리아주의 멜버른시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살기 좋은 도시로, 야라강을 끼고 아름다운 고층빌딩들이 늘어선 국제도시이자 도시농업 및 근교농업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달콤하고 맛있는 체리를 파는 농부는 농장의 탑차 앞에 작은 판매대만 간단히 놓았다. 차와 연결되니, 수납공간도 간판도 필요 없다.
달콤하고 맛있는 체리를 파는 농부는 농장의 탑차 앞에 작은 판매대만 간단히 놓았다. 차와 연결되니, 수납공간도 간판도 필요 없다.

다소 을씨년스러운 날씨에, 멜버른 외곽의 한적한 주택가에 도착했다. 오래된 도로와 건물들 사이에서 파머스마켓 알림판의 상큼한 주황색이 눈에 띈다. 큰길에서 약 5분 걸어가니, 교육농장으로 유명한 콜링우드 체험농장 옆 아보츠포드 수도원 건물 마당에서 파머스마켓이 열리고 있었다. 입구에서는 농장에서 바로 따온 신선한 오렌지와 즉석에서 착즙한 오렌지주스를 파는 농부들이 눈길을 끈다. 아이들과 함께 온 부모들, 젊은 커플들, 노부부들, 개와 함께 산책하듯 온 지역민들…. 익숙한 듯 장바구니를 들거나 작은 카트를 끌고 온 사람들이 눈에 띈다. 투박하고 견고한 수도원 마당에 펼쳐진 농민시장의 생생한 기운이 담 너머까지 넘친다.
드디어 왔다. 이번 연수에서 가장 기대했던, ‘슬로푸드 멜버른 파머스마켓Slow Food Melbourne Farmers’ Market.’

좋고, 깨끗하고, 공정한 파머스마켓
1986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패스트푸드점 맥도날드 개점에 반대하며 시작된 슬로푸드Slow Food 운동은 ‘음식, 먹거리’의 뿌리가 되는 소농과 생물다양성, 지구를 아우르는 철학을 가지고 전 세계에서 활동하고 있다. 호주의 18개 슬로푸드 지부 중 하나인 ‘슬로푸드 멜버른’은 1996년에 창설되었고 매달 넷째 토요일 오전 8시부터 오후 1시까지 파머스마켓을 열고 있다. 호주 국내 시장을 독식하다시피 한 2~3개의 대형 슈퍼마켓에서는 농산물이 공산품처럼 취급되며 적정가격을 못 받지만, 파머스마켓에서는 농민이 직접 결정한 가격으로 거래한다. 그래서 일반 슈퍼마켓보다 가격이 비싸지만, 슬로푸드의 철학인 Good 좋고, Clean 깨끗하고, Fair 공정한 산물들을 생산자로부터 직접 살 수 있는 시장이다.

비슷한 듯 다른 시장, 슬로푸드 멜버른 파머스마켓
반가운 마음으로 입구에 들어서니, 환한 미소의 청년이 길 한가운데 동그란 통을 놓고 앉아있다. 이 시장의 입장료 2달러를 내면, 시장에 공간을 제공한 수도원에 기부되는 형식이다. 입장료로 공간 사용료를 대신하는 구조인 것으로 짐작된다.

장바구니는 기본이고, 작은 카트를 끌고 온 손님들도 눈에 띈다. 고정적으로 열리는 시장이라 그런지 판매자와 손님, 그리고 손님 서로 간에도 친구처럼 반갑게 이야기 나누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장바구니는 기본이고, 작은 카트를 끌고 온 손님들도 눈에 띈다. 고정적으로 열리는 시장이라 그런지 판매자와 손님, 그리고 손님 서로 간에도 친구처럼 반갑게 이야기 나누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유기농·바이오다이나믹(생명역동농업) 방식으로 생산한 올리브농장의 다양한 제품. 자부심이 큰 부부와 젊은 아들, 2대가 함께 농사 짓는다.
유기농·바이오다이나믹(생명역동농업) 방식으로 생산한 올리브농장의 다양한 제품. 자부심이 큰 부부와 젊은 아들, 2대가 함께 농사 짓는다.

남녀노소 생산자들이 채소와 과일, 씨앗과 모종, 꿀, 달걀은 물론 햄, 소시지, 우유와 치즈, 견과류, 잼이나 오일 등의 가공품과 빵, 와인과 초콜릿, 해산물과 생고기에 털가죽까지 아주 다양한 품목들과 함께 즉석요리를 팔고 있었다.
장바구니를 들고 찬찬히 즐기러 오는 사람들, 정성껏 대화하고 밝게 인사를 건네는 생산자들. 그 자체로 아름다운 채소들과 스스로 준비해온 간판, 설명문들. 일회용품을 줄이기 위해서인지 비닐 봉투를 주지 않는 곳이 많다. 시장을 둘러볼수록 한국의 ‘마르쉐@’ 시장과도 비슷했으나 조리가 불가능하고 안정적인 공간 사용이 어려운 한국 농부시장의 형편과는 달리, 이곳에서는 늘 같은 장소에서 각자 준비해온 가스불을 자유롭게 사용하여 바로 요리해주고, 널찍한 판매대 공간 뒤편에 차를 대놓고 물건을 싣거나 냉/온장 가능한 탑차와 판매대를 연결하여 편리하게 사용하고 있는 점은 부러울 수밖에 없다.

각기 작은 채소가게처럼 널찍한 공간에 여러 가지 채소들을 진열해놓은 농부들, 예쁜 나무 제분기로 즉석에서 제분한 밀가루를 판매하는 히피 차림의 청년들, 체리 한 종류만 깔끔하게 놓고 여유롭게 인사하는 농부, 마늘 한 종류와 마늘소금을 놓고 위풍당당하게 서있는 농부, 차에 내장된 온장고에서 파이를 꺼내주며 세상 최고로 맛있을 거라며 웃는 요리사, 칠면조 소시지를 시식해

빅토리아 파머스마켓 협회가 인증하는 ‘로컬푸드 혁명의 일원’임을 알리는 표지판. 출점자의 70% 이상이 로컬푸드 생산자여야 협회에서 인증한 로컬푸드 시장이 된다.
빅토리아 파머스마켓 협회가 인증하는 ‘로컬푸드 혁명의 일원’임을 알리는 표지판. 출점자의 70% 이상이 로컬푸드 생산자여야 협회에서 인증한 로컬푸드 시장이 된다.

보고 가라며 두툼한 한 조각을 건네는 농부, 방부제 없이 지역 농산물로 만든 수제 반조리 식품을 판매하는 가족기업, 다양한 소고기와 함께 털가죽가방까지 판매하는 농장, 별도의 판매대 없이 작은 냉장트레일러에 양고기와 소고기를 진열한 농부, 풀밭을 자유롭게 노니는 닭과 그 닭들을 지키는 6마리 개들의 사진으로 시선을 끄는 달걀, 다양하게 믹스된 오가닉 초콜릿들, 바이오다이나믹 농장에서 만든 다양한 와인 등등….

찬찬히 시장을 한 바퀴 돌고 돌아와, 널찍한 자리에서 유기농, 바이오다이나믹 농법으로 키운 올리브 가공품을 파는 매대로 다가갔다. “당신이 키운 올리브인가요?” 짧은 영어로 물으니, 할아버지 농부가 웃으며 대답한다. “네, 맞아요.” 올리브유 종류도 다양하다. 꽤 긴 설명을 해주었는데, 농부가 본인의 농장과 직접 키운 올리브들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 전해졌다. 이렇게 시장에서 만난 농부들이 저마다 자부심과 자신의 이야기를 가지고 참여하고 있었다. 각기 자신들이 출점하는 다른 파머스마켓들의 홍보전단을 판매대에 올려놓은 것 또한 인상적이었다. 이렇게 여러 군데 시장을 나갈 수 있을 정도의 생산량과 여력을 지닌 소농들이라니!

호주 농촌의 힘, 자립하는 소농들
마켓에 오기 전 날 방문했던 페닌슐라 유기농장Peninsula Fresh Organics의 판매대도 보인다. 팜샵Farm Shop이 딸린 20헥타르 농장을 포함, 총 60헥타르(18만 평 정도) 규모의 페닌슐라 유기농장의 주인은 5대째 농사를 이어가며 40년 동안 농사를 지어온 ‘웨인’과 ‘타시’ 부부. 현재 빅토리아주 파머스마켓의 회장이기도 한 웨인은 농약 사용으로 가족들 건강에 이상이 생기면서 9년 전에 유기농으로 전환했다. 그 후 파머스마켓에 7년째 출점하며 그 경험을 바탕으로 4년 전부터 농장 바로 앞에 팜샵을 운영하고 있다. 도매시장에 60%를 내고 나머지 40%는 파머스마켓과 팜샵에서 판매하며, 일부는 수출도 한다. 15명을 고정적으로 고용한 농장이지만 호주에서는 ‘소농’이다.

즉석에서 제분한 밀가루를 담아 팔던 젊은 밀 농부들. 나무로 된 제분기가 참 예쁘다.
즉석에서 제분한 밀가루를 담아 팔던 젊은 밀 농부들. 나무로 된 제분기가 참 예쁘다.

이러한 소농의 현실을 보려면 호주의 특수한 상황도 함께 봐야 한다. 호주는 농업 수출국임에도 정부나 지자체의 직접 지원은 없고, 대부분 굉장히 큰 규모에 단일 재배를 하는 대량생산 농장들이 각각 하나의 개인 사업장으로 자립하고 있다. 전체의 20% 이하가 대농이고 나머지는 다 소농이지만, 소득보장이나 행정적 지원이 없어 소농들의 경제적 삶은 어렵다고 한다. 그러나 페닌슐라 농장을 방문해보니, 소농이기에 가능한 시도들과 함께 한국의 소농과는 비교할 수 없이 넓고 비옥한 땅 그 자체에서 호주 농촌의 힘을 볼 수 있었다.
각 판매대를 둘러보며 확 눈에 띈 것은 통일된 디자인의 ‘로컬푸드’ 표시. 자세히 보니, “나는 로컬푸드 혁명의 일부입니다. 이것은 제가 판매하는 농산물이 빅토리아농민시장협회의 인증을 받았음을 의미합니다.”라고 쓰여 있다.
빅토리아농민시장협회Victorian Farmers’ Markets Association, VFMA는 2004년 창립된 비영리단체이다. 빅토리아주에서 100km 이내의 농장, 혹은 대부분의 주요 원료를 빅토리아주에서 가져오는 식품 제조업체, 그리고 그러한 생산자들이 70% 이상 참여하는 파머스마켓이 가입할 수 있다. 생산자와 농부시장이 함께 지역 안에서 자립 기반을 만들어 운영하는 것이다. 소비자는 신선한 농작물 소비로 이러한 지역 농부들을 지원하고 지역 사회 안에서 경제가 순환되도록 하여 지역에 기반한 식량주권을 함께 지켜갈 수 있다. 이러한 연결을 가능하게 하고 확인하게 하는 것 또한 농부시장의 의미이다.

튼튼한 소농과 신뢰를 기반으로 자립하는 시장
슬로푸드 멜버른 파머스마켓은 정부의 지원이나 기업 후원 없이 60팀의 농부들에게 입점비 90달러, 일반 손님에게 시장 입장료 2달러를 받아 마켓을 운영하고 남은 돈으로는 농가를 지원하는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 이 자립구조는 넓고 비옥한 땅과 농업수출국인 호주의 특수한 환경 속에서 농장을 경영하며 자립하는 소농들 그리고 그런 지역농부들과 신뢰로 관계 맺는 소비자들에게서 나온다.

파머스마켓은 지역사회 안에서 경제가 순환되도록 한다.
파머스마켓은 지역사회 안에서 경제가 순환되도록 한다.
5대째 농사를 짓고 있는 웨인 씨는 파머스마켓 출점 경험에서 자신감을 얻어 농장 안에 매장도 함께 운영한다.
5대째 농사를 짓고 있는 웨인 씨는 파머스마켓 출점 경험에서 자신감을 얻어 농장 안에 매장도 함께 운영한다.

한국과 너무나 다른 농업·농촌 인프라 속에서도 소농의 자립과 소비자 연결이라는 비슷한 고민에서 출발하여 ‘신뢰’와 ‘자립’으로 지속 가능한 구조를 만들고 있는 슬로푸드 멜버른 파머스마켓을 떠나오며, 못 다 한 질문들이 남는다. 한국은 한창 농부시장에 대한 욕구들이 있고, 대부분 지원금을 받아 생겨나고 있다. 작고 사계절 뚜렷한 땅에서 힘들게 버티고 있는 농촌의 현실 위에서 아주 작은 소농들과 함께하는 한국의 농부시장은 어떻게 지속 가능한 구조를 찾을 수 있을까? 이제 그 답은 한국의 특수성 속에서 찾아야 한다.

33-3※필자 김송희: 서울에서 열리는 농부시장 ‘마르쉐@’를 운영하는 ‘마르쉐친구들’의 멤버이다. 엉성하고 게으르게 도시텃밭 농사도 짓고 있다. 어린 시절 산과 들에서 마음껏 뛰어논 기억을 소중하게 여기며 언젠가 돌아가리라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