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산 농산물이 우리 밥상을 점령한 지 이미 오래다. 그러고 보면, 세계 최고의 인구 대국에 사는 중국 사람들은 먹고사는 걱정은 없을 것 같다. 지금 중국에서는 굶는 사람도 별로 없다는데, 그 많은 이들을 먹이고도 음식이 남아돌아 이렇게 이웃 나라에 엄청나게 수출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래서 중국 농촌을 상상하면, 공중에서 내려다본, 끝도 없이 펼쳐진 대평원에서 트랙터가 옥수수를 수확하는 미국 농촌의 이미지를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아, 인구가 많으니 기계 대신 인해전술로?
여기서 질문 세 가지만 던져보자. 중국에도 귀농·귀촌인이 있을까? 생태적 농사는 지을까? 그곳에도 민간 사회운동 영역의 NGO 활동가와 자원봉사자가 있을까? 정답은 모두 ‘그렇다’이다. 이 질문을 엮다 보면 ‘신향촌건설운동’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신新향촌건설운동이라 했으니, 향촌건설운동이 먼저 있을법한데, 중국의 역사를 살펴보자. 올해가 2019년으로 3.1운동 100주년인데 이 굴곡 많은 동아시아 근대화 여정의 초입에 벌어졌던 이웃 나라의 이야기니 우리와도 무관하지 않다.
향촌건설운동, 아래로부터의 변화를 꾀하다
100여 년 전 중국에도 근대화를 고민하던 기라성 같은 선각자들이 있었는데, 그중에는 ‘마지막 유학자’로 불리는 량수밍梁漱溟(1893~1988) 선생이 있다. 그는 20대에 명문 베이징대학의 철학과 교수가 됐지만 그 좋은 자리를 박차고 농촌으로 갔다. ‘농민의 나라’ 중국은 농업을 기반으로 핵심 문화가 이뤄졌기에, 자각적 근대는 농민의 자각과 농촌의 변화를 통해서만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또 량수밍은 불교철학과 신유학의 대가다. 제諸 문명의 사상을 깊이 연구해 서구사상, 인도철학, 중국의 사유를 비교한 역저 『동서문화와 철학』을 남겼다. 그는 동양 고유의 정신과 문화, 제도와 사회구조를 기반으로 어떻게 중국의 근대를 만들어나갈 수 있을까 고민했다.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던 량수밍은 상아탑 안에만 안주하지 않고 직접 농촌으로 들어갔다.
그와 같은 중국의 지식인과 계몽 청년들은 향촌을 기반으로 저마다 중국의 전역에서 근대화 개혁 실험을 진행했다. 그 시작은 동아시아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특히 한국과 중국에는 통한의 시간이었던 1894년 갑오농민전쟁과 후속 청일전쟁 직후다. 굴욕적인 패전과 막대한 손실이, 중국인들을 움직인 것이다.
당시 대다수 지식인은 ‘부국강병’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위로부터의 계몽을 통한 서구적 민주와 과학의 근대 혁명을 역설했다. 반면 또 다른 일군의 지식인들은 아래로부터의 변화를 꾀하며 향촌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이들의 노력은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대부분 중단되었다. 일제의 패망, 국공내전을 거쳐서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했을 때, 량수밍과 같은 향촌건설운동 활동가들은 자연스럽게 새로운 국가 건설에 참여했다.
중국 공산당의 승리는 마르크스, 레닌이 서유럽의 상황에서 이론적으로 설파한 것과 달랐다. 도시 노동자가 주축이 된 것이 아니라, 농민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신향촌건설운동, 다시 농촌에서 꽃피는 변화
이제 현재형 중국 농촌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필자는 2015년부터 매년 중국 CSA(Community Supported Agriculture, 공동체지원농업) 대회를 참관했다. 한국의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한살림, 홍성의 풀무학교 공동체와 같은 단체들이 대회에 초청받도록 다리 놓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중국 각지에서 1,000여 명 이상의 국내외 농민과 활동가, 학자들이 행사에 참여했다. 이 대회는 이번이 10회차였고, 중국 최초 CSA 농장이라고 일컬어지는 베이징 교외의 ‘작은당나귀 농장’도 마침 설립 10주년을 맞았다. 국내에는 ‘채소 꾸러미’로 더 잘 알려진 CSA 개념을 실천하는 농장들이 중국 전역에 2,000개 이상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면 누가 이런 농장을 운영하고 있을까? 이들 대부분이 바로 중국에서 반향청년返乡青年이라 불리는 귀농 청년이다. 농장은 소농, 가족농장, 우리로 치면 영농조합법인 정도의 중소농 규모를 유지하고 있다. 소비자가 얼굴을 아는 생산자를 만나는 것이 CSA의 핵심 요건 중 하나임을 고려하면 당연한 결과다. 또 친구나 가족 같은 소비자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안전한 먹거리를 생산해야 한다. 그래서 이들은 생태농업, 즉 유기농과 자연농을 경작 방법으로 택했다. 이것이 바로 신향촌건설운동의 성과인 것이다.
그럼 대체 누가 왜 신향촌건설운동을 제창하고 참여해왔을까? 민간 조직의 NGO 활동가들과 함께하는 ‘깨인’ 생산자와 소비자들이다. 그리고 100여 년 전 향촌건설운동에 량수밍이 있었다면, 신향촌건설운동에는 인민대학의 원톄쥔溫鐵軍 선생이 있다. 그는 중국 삼농三農(농민·농업·농촌) 문제의 최고 권위자 중 한 명이며, 자신을 이 운동의 견결한 자원활동가로 칭한다.
원톄쥔은 중국 근대화에 대한 독창적인 분석으로 중국을 연구하는 전 세계 학자들에게 널리 알려진 지식인이다. 국내에도 그의 대표적 저작인 『100년의 급진』 등이 소개됐다. 그는 단순히 뛰어난 학자가 아니라, 량수밍이 그러했듯이 사회운동가로도 활약했다. 시진핑 시대에서 중국 지식인들이 관변화 되거나 독립적인 목소리를 잃어가는 가운데, 그는 정부와의 마찰은 피하면서도 사회의 진보를 위해 계속 노력하고 있다.
1980년대부터 현장을 발로 뛰면서 농촌 문제를 연구하다가 2001년 신향촌건설운동의 기치를 내걸었다. 대학에서 출발한 학자가 아니라 연구 관료 출신인 그는, 정책 제안을 통한 위로부터의 개혁만으로 목표하는 변화를 끌어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 원톄쥔은 대학생들과 함께 농촌으로 들어가서 농민과 연대하기 시작했다. 그는 청소년 시절 문화대혁명기의 상산하향上山下鄕(문화대혁명 당시 지식 청년을 농촌에 내려보내 청년 실업문제를 해결한 군중 운동) 경험을 통해 11년간 기층 농민의 생활을 체험한 적 있다. 이를 개인적 트라우마로 남기지 않고, 자기 수행과 사회 변혁의 재료와 동기로 삼아 향촌과 중국의 변화에 헌신하고자 했다.
바링허우 세대가 농촌으로 돌아간 이유
방학 기간 ‘농활’로 출발해 2003년 허베이성河北省성에 설립한 ‘옌양추농민학교’의 운영에 참여했던 ‘바링허우’(1980년대 출생) 대학생들과 이에 영향을 받은 젊은 농민들이 있다. 이들은 지금 중국 각지 농촌에서 유기농 농장을 운영하거나, 도시에서 학계, NGO, 사회적기업 활동을 통해 소비자와 생산자를 잇는 역할을 하고 있다. 신향촌건설운동에 매진하고 있는, 30대의 핵심일꾼들이다.
이들이 사명감으로 이 운동에 임하게 된 것은 중국 농촌이 90년대에 겪은 파괴적 변화를 경험한 당사자기 때문이다. 1978년에 시작된 중국의 개혁 개방의 시발점은 사실 우리가 상상하는 베이징이나 상하이가 아니라, 농가책임경영제(大包干)를 처음 실행한 안휘성 봉양鳳陽의 한 시골 마을이었다. 국가가 개별 농가의 생계를 책임지지 않는 대신 개인 노력의 성과를 인정해주겠다는 계약에, 18명의 농민이 수결로 합의했다. 생산성이 향상된 농업은 당시 농촌지역 공동체에 기반한 제조업체인 ‘향진鄕鎭 기업’ 육성과 함께, 농촌과 도시의 소득 격차를 줄이는데 기여하여 80년대 중국 농촌의 르네상스를 가져왔다.
하지만 1989년 인플레이션을 동반한 산업자본의 화폐화, 연안 지역을 중심으로 한 도시화, 수출 제조업 중심의 공업화, WTO 가입을 계기로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적극적으로 편입하기 위한 금융화 흐름이 진행됐다. 농촌은 환경 파괴와 더불어 인력과 자본의 심각한 유출로 공동체가 해체되는 순서를 밟게 된다. 국가 현대화의 비용을 농업, 농촌, 농민에게 전가하는 ‘삼농 문제’가 최악의 상태로 치달은 것이다. 결국, 앞서 언급한 젊은이들은 유년 시절 가난했지만 먹고살만했던 아름다운 농촌을 기억하는 동시에, 그 쇠락의 과정을 생생히 지켜본 마지막 세대가 됐다.
삼농 문제 해결, 선택이 아닌 필수
중국이 농민들의 지지 속에 성공한 공산혁명 후에도 농민과 농촌의 희생을 요구했던 것은 이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1949년 신중국 건국 직후 발생한 한국 전쟁의 참화 속에서, 중국은 적대국인 미국과 공산권의 라이벌 맹주인 소련에 맞서기 위한 전쟁 무기 생산 기술과 자본이 긴요했다. 마오쩌둥은 농민 노동력을 시초 자본 축적의 도구로 삼았다. 이때 량수밍은 공식 회의 석상에서 “농민을 배신하지 말라”며 마오쩌둥에게 항의했고, 때문에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게 된 것은 하나의 전설이 되었다.
21세기의 원톄쥔은 현대화를 추구하는 발전주의가 농민들의 삶과 농촌을 피폐하게 만든 것에 대해서 다시 문제를 제기했다. 이를 수용한 중국 공산당 정부는 2005년부터 중국판 새마을운동인 ‘신농촌건설’을 시작했다. 2012년부터 ‘생태문명건설’이라는 목표를 헌법에 명시했으며, 2018년에는 ‘향촌진흥’ 정책을 대대적으로 추진하게 된다. 이 안에는 생태 농업과 6차 산업 육성 등을 통한 농촌의 환경 및 경제적 삶의 질 개선 정책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중국 정부가 삼농 문제를 중시하게 된 것은 ‘농민혁명정부’라는 대의명분을 위함이 아니다. 환경오염 문제, 먹거리 주권과 안전 문제, 도시화의 문제가 체제의 안정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2007년 중국 정부는 중국의 제1환경 오염원이 도시나 공업이 아니라 농업임을 공식적으로 천명했다. 항생제와 촉진제, 그리고 첨가물 범벅인 중국의 농·축·수산물 문제는 더 이상 스캔들 축에도 들지 못한다. 중국의 도시화율은 60%에 이르고, 실제 생산에 참여하는 농민은 2~3억 명도 안 될지 모른다고 많은 이들이 걱정한다. 농기계, 화학비료, 농약 등 과도한 에너지 사용에 기반한 관행농이 아니면, 소수의 농민이 그 많은 인구를 어떻게 먹여 살릴 것인가? 이전 세기 서구 열강처럼 해외 식민지를 갖고 있지 않으면서, 한국같이 농민 인구가 5% 미만으로 줄어들거나, 식량 자급률이 20%대로 떨어지는 것을 감당할 수 있는 ‘강대국’은 역사 속에 존재한 적이 없다.
중국, 지속 가능한 발전을 향한 여정의 길동무
2018년 12월, 해외농업연수 사전답사팀은 이런 흐름 속에 놓인 중국 광동성과 푸젠성의 다양한 실천 현장을 방문했다. 귀농 청년들이 먹거리를 근심하는 소비자 친구들의 요청으로 만든 생태농장, 귀농인 생산자를 육성하는 유기농 소매 사회적기업, 이들이 함께 만들어나가는 식농교육농장, 생태학교와 생태마을 등을 찾았다. 젊은 활동가들은 마을 주민들과 연대해 아름답고 유서 깊은 향촌마을의 전통문화와 자원의 가치를 되살리고 있다.
열정적인 20~30대 중국 청년들이 주도하는 현장 속에서, 격동의 80~90년대 한국이 떠오른다. 답사팀이 돌아본 중국 농촌은 낯설면서도 어쩐지 익숙한 우리의 과거 혹은 현재의 모습과 닮아있어, 기시감마저 불러일으킨다. 이는 본디 같은 뿌리를 가진 소농, 가족농 중심의 수천 년 된 동방 농경문화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정치 체제는 달라졌지만, 질곡 많은 근대를 절룩거리며 걸어온 농민과 농촌의 사연 또한 동병상련의 정을 불러일으킨다.
다시 농업이 우리의 미래이고, 농촌이 우리의 희망이라는 대산농촌재단의 구호가 신향촌건설운동의 정신과 많이 겹쳐 보인다. 요즘 한국 사회 각 영역에서 후회 없는 다음 100년을 준비하려는 토론과 움직임이 매우 활발하다. 우리 밥상을 지배한 침략군의 얼굴로만 떠올리던 중국 농업도 다시 한번 살펴보면 어떨까. 농촌과 농업이 되살아나 농민이 행복한 나라, 농민뿐 아니라 우리 모두 지속 가능한 문화에 기반한 새로운 문명을 건설해나가는, 오래된 미래를 향한 여정의 길동무로 재발견해보자.
※ 필자 김유익: 화&동 청춘초당和&同 青春草堂 대표. 부지런히 쏘다니며 주로 다른 언어, 문화, 생활 방식을 가진 이들을 짝지어주는 중매쟁이 역할을 하며 살고 있다. 중국 광저우의 도시와 농촌이 공존하는 오래된 마을에 거주하고 있으며, 젊은이들이 함께 공부, 노동, 놀이를 통해서 어울릴 수 있는 작은 공간을 만드는 것이 꿈이다. 여생의 모토는 “시시한 일을 즐겁게 오래 하며 살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