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국내 농민단체에서 환영하는 성명이 잇따랐다. 12월 17일 미국 뉴욕에서 열린 제73차 유엔 총회에서 ‘농민과 농촌지역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권리에 관한 선언(이하 농민권리선언)’이 마침내 최종 채택되면서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이하 전여농)과 전국농민회총연맹(이하 전농)이 목소리를 낸 것이다. 전여농과 전농은 “1947년 유엔에서 세계인권선언을 채택했지만 소외된 많은 사람들이 있다. 농민, 특히 여성농민, 농촌노동자에 대한 권리가 이번 선언을 통해 기본원칙이 될 것”이라고 의미를 밝히면서 “모든 나라가 농업·농촌·농민의 가치를 새롭게 정립하고 정책을 펴야 한다”고 역설했다.
‘가족농’의 가치 재조명한 유엔
‘농민과 농촌지역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권리에 관한 유엔 선언’을 영문으로 쓰면 ‘UN Declaration on the rights of peasants and other people working in rural areas’다. 여기서 굳이 농민을 ‘farmer’가 아닌 ‘peasant’라고 한 것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farmer가 농업경영자 성격을 갖는다면 peasant는 사전적으로 소작농으로 번역되나 여기서는 가족농이라 해석하는 게 적합하다. 가족농은 농업생산자일 뿐 아니라 농촌 사회를 유지하고 지탱하는 농업의 중심축이기에 유엔에서 peasant의 권리를 규정한 것이다. 농정개혁이란 중소 가족농을 통해 농업·농촌을 지속 가능하게 하는 일이다.
유엔 농민권리선언, 18년 세월 딛고 탄생
유엔에서 농민권리선언이 최종 채택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무려 18년이다. 세계 농민단체 연대체인 비아캄페시나가 농민권리선언을 유엔에 공식 의제로 제출한 것은 2009년이지만, 비아캄페시나 소속 인도네시아농민연합(SPI)은 이미 2000년에 ‘농민 권리’라는 개념을 처음 만들고 국제 연대회의를 통해 공유하고 확산시켰다. 그로부터 18년이라는 세월을 거쳐 유엔까지 설득시킨 것이다. 세계 중소농들의 값진 승리다.
유엔 농민 농촌노동자 권리선언문의 구성 서문 |
기본권 빼앗긴 중소농, 극심한 착취까지
유엔 농민권리선언문은 서문, 국가의 일반적 의무, 여성농민과 농촌노동자의 권리, 종자, 소득 등 총 28조로 돼 있다. 농민권리선언이 왜 필요한지는 서문에 잘 나와 있는데 “농민과 농촌에 사는 사람들이 전 세계 인류 발전과 생물다양성 보존 및 증진을 위해 공헌해 왔음에도 현재 농민과 농촌노동자가 빈곤, 기아, 영양실조, 기후변화로 고통받고 있고” 또 “전 세계적으로 농민들이 고령화되고 청년들은 고된 농촌 생활로 갈수록 농업을 등지고 도시로 이주하고 있다”는 점, 아울러 “농민과 농촌노동자가 의존해왔던 천연자원 및 생산적 자원의 지속적 이용이 어려워지고 그들의 기본적인 권리마저 거부당하고 있으며 위험한 착취 조건에 처해 있기 때문에 이 선언문을 제정한다”고 밝히고 있다.
농민권리선언의 본론인 28개 조항은 농민과 농촌노동자들, 특히 여성농민·청년·아동들의 인권과 식량주권, 토지와 물 등 자원에 대한 권리를 깨알처럼 적시했다. 일부만 살펴보면, <2조> 국가의 일반적 의무 3항에는 법안 및 정책을 결정하거나 시행하기 전에 농민과 농촌노동자들과 성실하게 협의해 지지를 받아야 한다고 밝혔고, 5항에는 농민과 농촌노동자의 권리가 손상되는 것을 방지하는 데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4조> 여성농민 권리 1항에는 여성농민, 농촌노동자가 인권과 기본적인 자유를 완전하고 동등하게 누리며 농촌의 사회·경제·문화적 발전을 자유롭게 추구하고 참가해 혜택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돼 있다. <16조> 적절한 수입과 생계 수단에 대한 권리 3항에는 시장에 공평하게 접근하고 참여할 수 있도록 국가가 보장하고 가족들이 적절한 생활수준을 달성하게 하는 가격으로 생산품을 팔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담았다. 농산물 제값 받기와 농가소득 보장 항목이다.
그리고 농민권리선언에서는 “본 선언문 권리들의 완전한 실현을 점진적으로 성취하기 위해 입법, 행정 및 기타 적절한 조치를 신속히 취해야 한다”는 것을 국가의 의무로 규정하고 있다.
인권변호사 출신 대통령 있어도 농민기본권 ‘후진국’
우리 정부는 농민권리선언에 대해 이해당사자인 농민들의 의견을 듣는 자리를 단 한 차례도 열지 않았다. 전여농과 전농 등 비아캄페시나 소속 농민단체가 2016년부터 농식품부, 외교부 관계자들에게 농민권리선언의 필요성을 적극적으로 설명했지만 “국내 환경, 국내법과 상충 지점이 있다”는 틀에 박힌 답변뿐이었다. 초안보다 훨씬 완화된 문구로 선언문이 조절됐어도 검토해보겠다는 말로 대신했다. 농민권리선언 채택의 막바지 고비로 여겨지던 11월 유엔 인권이사회 제3위원회 결정을 앞두고 국회에서는 부처 간 엇갈린 답변을 듣는 촌극까지 빚어졌다. 오영훈 의원이 강경화 외교부 장관과 이개호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에게 농민권리선언에 대한 정부의 방침을 결정한 배경을 묻자, 이 장관은 ‘관계 부처와 협의했다’고 답변했고 강 장관은 ‘내용 자체를 잘 알지 못한다’는 상반된 답을 했다.
오영훈 의원은 유엔 농민권리선언의 중요성을 우리 농촌의 소멸지수와 연결하면서 정부의 긍정적인 태도 변화를 촉구했으나, 유엔 총회 최종 표결에서도 우리 정부는 농민권리선언 채택을 ‘기권’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인권변호사였고,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유엔 인권고등판무관실에서 근무했다. 하지만 농민 인권은 이들의 관심사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농업 지키기, 사회 안전망 구축하는 길
국제사회가 중소농의 권리문제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새롭게 방향을 설정하는 가운데 국내 농업정책은 여전히 규모를 늘리고 경쟁력을 높이는 것에 힘을 쏟는 구태를 보인다.
지난해 농민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던 ‘스마트팜 혁신밸리’ 공모 사업이 대표적이다. 전북 김제시와 경북 상주시가 논란 끝에 선정됐고, 올해 3월까지 2곳을 추가 선정한다. 이미 선정된 상주와 김제는 산을 70% 깎아야 하는 부적합지라거나 습지가 있어 보존해야 한다는 현장의 논란이 여전하지만, 조용히 묻히고 있다.
‘사람 중심의 농정’을 말하는 문재인 대통령의 올해 농정은 지금까지와는 달라야 한다는 것이 농업계 바람이자 중론이다. 대통령의 농업정책을 자문하는 ‘농어업·농어촌특별위원회’가 4월 25일경 출범할 예정이고, 직불제 개편안도 구체화한다. 농정개혁이라는 과제가 이제야 꿈틀 움직이는 중이다.
농업정책이 뒤늦게 변화를 예고하는 이때 상주에서 만난 한 농민은 “스마트팜을 말하면서 ‘자율주행 트랙터’를 개발한다고 하는데, 농민들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자율주행 호미’라는 것은 왜 생각을 못 할까. 농촌 살리는 일에 아등바등하면서 고향에서 25년을 살았는데, 좋아진 것도 많지만 나빠지는 속도는 더 빠르다”고 농촌 현실을 전했다.
오늘날 농정개혁이라는 것은 김영삼 정부 시절 만들어진 기계화, 시설화, 규모화로 집약되는 경쟁력 중심 생산주의 농정을 반성하고 새로운 농정의 틀을 만드는 것이지만, 생산주의 농정은 표지만 바꿔 다시 등장하고 있다.
지난 1월 초 여성농민들의 신년 간담회 자리에서 경남 남해군의 한 농민은 “공무원들은 일하다가 밥하러 집에 가지 않는다. 그러나 여성농민들은 농번기에 일하다가 때를 맞춰 밥하러 간다. 여성농민들의 가사노동을 줄여주는 일을 고민하는 것부터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농민들이 농사를 짓고 농촌에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일상에 차고 넘치는데, 농업정책은 너무 크고 원대하면서 정작 현실을 반영하지 않고 있다는 점도 개선돼야 할 사항이다.
FTA 선진국답게 온갖 식재료에서는 만국기가 펄럭이고 있다. 관세가 완전히 철폐될 때까지 수입농산물 피해는 예고편에 불과하고 기후변화는 일상이 됐다. 농업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며 대형마트보다 농민 장터에서 제값 주고 농산물을 사는 것을 당연시하는 사회, 농업·농촌·농민을 살리는 일은 곧 국민 모두를 위하는 길이라는 것이 상식인 사회를 만드는 일이 더 시급해졌다.
※ 필자 원재정: 한국농정신문 편집부국장. 농사를 짓지도 농촌에 살지도 않으면서 농업·농민·농촌 기사를 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매번 느끼고 있다. 밥 한 끼는 중요한 줄 알면서 농업 문제에는 둔감한 사람들이 농업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기사를 쓰고 싶다는 마음으로 국회와 농림축산식품부를 출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