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떤 농업 개방을 원하는가?

지금은 흔해빠진 싸구려 과일로 취급되는 바나나도 처음부터 이렇게 푸대접을 받은 건 아니었다. 한 송이에 무려 2,000원, 바나나가 한국에 처음 들어왔던 1980년대 가격이다. 라면 1개가 100원이었던 그 시대, 이 어마어마한 가격 덕분에 바나나는 아플 때나 소풍 갈 때 한 번 먹어볼까 말까 한 귀한 대접을 받았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 속 바나나 한 송이를 사이좋게 세 조각으로 나눠 먹는 가난한 선우네의 이야기는, 기성세대들에게 ‘아, 그땐 바나나가 정말 귀했지!’ 라는 따뜻한 추억을 불러일으켰다.

‘자유롭게 드나들거나 교류하게 한다’는 뜻의 ‘개방’은 원래 좋은 말이다. 우리가 해외로 여행을 가는 것이 새로운 세상과 교류함으로써 견문을 넓히고 삶을 풍요롭게 하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는 것처럼, 우리는 외국의 진귀한 과일과 채소를 맛보고, 한국의 풍토와 기후에서는 나기 어려운 커피나 차를 음미하며, 다른 나라의 전통음식과 식생활을 경험해 봄으로써 식과 관련한 삶이 풍요로워지는 경험을 한다. 바나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바나나는 한국의 농업 생산을 기초로 한 전통적인 식탁에서 귀하고 이색적인 것이었고, 바로 이런 특수한 지위 때문에 우리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했다. 1988년의 바나나를 기억할 때 우리의 가슴이 따뜻해지는 이유 중 하나도 이 때문일 것이다.

‘교류’가 아니라 ‘약탈’이 된 ‘개방’
바나나는 이제 어디에서나 쉽게 살 수 있는 흔한 과일이 되었다. 심지어는 단지 싸다는 이유만으로 상주 사과나 나주 배를 대신하여 우리 소비자들의 선택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우리 과일의대체재가 된 바나나는 더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지 않게 되었다. 2016년의 바나나를 기억할 때 가슴이 따뜻해지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바나나만이 아니다. 한때 너무나 귀했던 미국의 체리와 뉴질랜드의 키위, 칠레의 씨 없는 포도 등은 어디에나 있는 흔한 것이 되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는 것처럼, 이들은 원래 한국 농업이 자리하고 있었던 공간을 무서운 속도로 잠식했다. 한국에서 전통적으로 생산되어 왔던 농·축·수산물 또한 이들의 잠식을 피할 수 없었다. 고추, 마늘, 참깨 등 거의 모든 주요 농산물이 가까운 ‘중국산made in China’의 공습을 받았다. 미국·호주산 쇠고기, 프랑스산 돼지고기, 브라질산 닭고기를 빼놓고는 이제 축산물 이야기를 할 수 없게 되었다. 노르웨이산 고등어와 태국산 새우, 중국산 낙지는 당연한 일상이 되었다. 심지어는 최후의 보루였던 밥과 김치마저 이들의 공습을 피하지 못했다. 식당에서 나오는 김치의 90% 이상이 중국산이고, 미국산이나 중국산 쌀을 이용하여 밥을 짓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수입 농산물이 우리의 식탁을 점령하는 동안, 우리 농업은 소리 없이 쪼그라들었다. 식량 자급률은 지속적으로 하락했고, 논과 밭은 줄어들었으며, 농부는 가난하 게 늙어갔다. ‘개방’이 약속했던 ‘풍요’는 사라지고, ‘개방’은 곧 ‘약탈’과 ‘불안정’ 의 동의어가 되었다.

이렇게 수입 농산물이 우리의 식탁을 점령하는 동안, 우리 농업은 소리 없이 쪼그라들었다. 식량자급률은 지속적으로 하락했고, 논과 밭은 줄어들었으며, 농부는 가난하게 늙어갔다. ‘개방’이 약속했던 ‘풍요’는 사라지고, ‘개방’은 곧 ‘약탈’과 ‘불안정’의 동의어가 되었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모두 다 아는, 전혀 새로울 것 없는 지난 30년간의 한국 농업 개방의 이야기다. 그런데 2016년 다시 농업 개방이 문제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애당초 더 개방할 농업 공간이 남아있기라도 한 것일까?

국제통상 규범과 한국 농업 개방의 역사
우리나라는 1980년대 미국의 압박으로 일부 농산물 시장을 개방하기 시작한 후,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 농업협정의 발효와 함께 전면적 개방의 길로 나아가게 되었다. WTO 농업협정에서는 농업개방을 ‘관세화tariffication’라고 불렀다. 관세화란, 관세를 제외하고 농산물 수입 금지나 제한, 농업보조금 지급 등 농업 수출국 입장에서 수출에 저해되는 수입국의 모든 규제, 소위 ‘무역장벽’을 제거해 나간다는 의미였다. 더 나아가, 관세화는 관세마저도 낮춰 결국 제거한다는 의미도 담고 있었다. WTO 농업협정은, ‘예외 없는 관세화’라는 원칙 아래, 개발도상국들에 10년짜리 관세 인하 계획표(1995~2004년 양허표)에 따라 모든 농산물의 관세를 낮춰갈 의무를 부과하였다.

Ⓒ한국농어민신문

이에 따라 한국도 농산물 시장을 전면 개방하고,농산물 관세를 계획표에 따라 낮춰갔으며, 그와 동시에 국내 농업을 보호하기 위해 도입·유지했 던 기존 조치들을 없애나갔다. 이시기 김영삼, 김대중 정부는 비록농정의 성과가 아예 없었다고는할 수 없으나, 한국 농업에 대한철학과 획기적인 비전 없이 ‘시장개방으로 인한 농부들의 피해 보상’과 ‘규모화, 기계화를 통한 경쟁력 제고’와 같은 고비용의 단편적인 해결책을 남발하였다. 그 결과, 한국 농업은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외국산 농산물이 본격적 으로 우리 농업을 대체하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90년대까지만 해도 시장에서 수입 농산물을 찾아보기 힘들었던 것을 기억한다. 우리는 또한 우리가 어느 순간부터 수입 농산물로 가득 찬 시장에서 장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미국, 유럽 등 농업 수출국들은 여전히 ‘헝그리hungry’ 했다. 10년짜리 계획표는 이들이 원하는 수준의 농업 개방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이들은 당연히 다음 계획표를 마련하고자 했다. 그 계획표를 마련하는 장이 바로 도하개발아젠다DDA였다. 그러나 농업이 무너져간 지난 10년의 악몽을맛본 개도국들은 반발했고, DDA 타결은 계속 늦춰졌다. 미국과 유럽은 초조해졌고, 150여 개국 모두 다 동의해야 타결할 수 있는 WTO의 DDA협정 대신 2~3개 국가가 동의하여 무역장벽을 추가로 제거하는 협정을 맺는 방식으로 개방 압력의 방식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양자간 또는 다자간 자유무역협정FTA이다.

역대 한국 정부는 그 어떤 국가들보다도 앞장서서 FTA를 체결해왔다. 2004년 칠레와의 FTA를 발효시킨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2011년 유럽연합EU, 2012년 미국 등 전 세계 최대의 농업 수출국들과의 FTA를 잇달아 발효시켰으며, 2015년에는 중국을 비롯하여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베트남 등 남은 농업 수출국들과의 FTA를 마무리 짓고 발효시켰다. 그 와중에 한국 농업의 쇠락은 가속화됐고,수입 농산물의 비중은 더욱 높아졌다. 정부는 여전히 피해 보상과 경쟁력 강화라는 단편적인 해결책외에는 그 어떤 농업의 비전도 제시하지 못했다.

2016년은 쌀 관세화의 여파가 본격화되는 한 해가 될 것이다. 이는 그나마 쌀이 있어 23~24%(쌀을 제외하면 4% 안팎)를 유지해왔던 우리 식량 자급률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것이다. 또한 수십 년간 계속된 쌀값 하락에도 불구하고 쌀농사를 포기하지 않았던 고마운 농부들을 논에서 내쫓을 것이다. 정부는 2016년 여의도 면적 10배에 달하는 논을 없앨 계획이다.

2016년 한국 농업의 3대 개방 이슈_ 쌀 관세화, FTA, TPP
한국 농업의 역사에서 2016년은 시장 개방의 마침표를 찍는 해로 기억될 것이다. 크게 3가지의 큰사건이 2016년을 규정할 것이다. 쌀 시장의 완전하고도 본격적인 개방, 중국을 포함한 거대 농업 수출국들과의 FTA 발효 및 심화, 그리고 다가올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의 가입 움직임이 바로 그것이다.
1995년 WTO 농업협정 발효 이후 모든 농산물의 수출입이 자유로워진 상황에서 유일한 예외는 한국인의 주식 쌀이었다. 쌀은 일정량을 강제 수입하는 조건으로 관세화의 예외를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WTO 협정문과 양곡관리법의 모호한 규정을 이용하여 2015년 자발적으로쌀을 관세화(정부 허가를 받아야 쌀을 수입할 수 있도록 한 기존 양곡관리법상의 수입허가제를 폐지하고, 관세만 내면 누구나 쌀을 수입할 수 있도록 한 것) 하였고, 이를 WTO 협정의 내용으로 포함하기 위해 2016년 미국 등 쌀 수출국들과의 쌀 협상을 본격화 할 예정이다. 한국이 제시한 쌀의 관세율은 513%. 협상의 특성상 이를 그대로 관철하기는 어렵고 관세율을 낮추거나 다른 양보를 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미 정부는 쌀 협상을 위해 양보가 필요하다면서 국내 쌀 공급이 과잉인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2016년 밥쌀용 쌀을 추가로 수입하겠다고 나섰고, 심지어는 2016년부터는 남은 쌀로사료를 만들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이처럼 2016년은 쌀 관세화의 여파가 본격화되는 한 해가 될 것이다. 이는 그나마 쌀이 있어 23 ~ 24%(쌀을 제외하면 4% 안팎)를 유지해왔던 우리 식량 자급률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것이다. 또한 수십 년간 계속된 쌀값 하락에도 불구하고 쌀농사를 포기하지 않았던 고마운 농부들을 논에서 내쫓을 것이다. 정부는 2016년 여의도 면적 10배에 달하는 논을 없앨 계획이다.

다행인 것은 아직 무차별적 농업 개방에 대한 우려와 국가적 차원에서 농업을 지 켜야 한다는 기본적인 가치관 자체는 우리 국민 사이에서 큰 흔들림 없이 유지되 고 있다는 점이다. ‘국가는 국민의 식량안보를 위하여 최대한 농업을 보호하고 지킬 책임이 있다’는 의견이 93.5%, ‘농산물 시장이 이미 지나치게 개방되었다’는 문항과 ‘농산물시장이 더 개방되면 농가와 농촌경제가 더 어려워질 것’이라는 문항에 동의한다고 응답한 비율도 각각 75.7%와 87.4%였다.

또한  2016년은 바야흐로 미국, 유럽 국가들과의 FTA에 따른 시장 개방이 심화되는 와중에 중국,베트남,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과의 신규 FTA 발효로 수입 농산물의 한국 농업 ‘총공격’이 시작되는 한 해가 될 것이다. 가령, 2016년 발효 4년 차를 맞는 한·미 FTA는 발효 초기 단계에서부터엄청난 기세로 우리 농업을 잠식해 왔는데, 2014년 미국산 농산물 수입액은 78억 1,000만 달러로2013년의 59억 4,000달러에 비해 약 31.5% 증가하였다. 특히 쇠고기·치즈 등 축산물, 포도·체리등 과일류, 호두·아몬드 등 견과류의 수입이 대폭 증가하였다. 2016년 이러한 흐름은 더욱 깊어지고 빨라질 것이다.

마지막으로 2015년 말 전격적으로 타결된 미국·일본 주도의 다자간 FTA인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이 2016년 드디어 제1의 통상의제로 부상할 전망이다. 박근혜 정부는 이미 TPP 가입 협상에나설 것을 공식화하고 있는데, 한국이 TPP에까지 뛰어들면 우리 농업 개방의 역사는 획기적인 농업회생방안이 나오지 않는 한 파국으로 치달을 것이다.

우리 농업의 미래가 우리의 손에
언젠가부터 우리의 일상에서 농업 이슈는 거의 실종되다시피 하였다. 정치인들은 더는 농업에 대해 치열한 논쟁을 하지 않는다. 정부도 농업에 대한 비전과 철학을 가지고 농업을 위한 종합적 청사진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 2015년 말 중국과의 FTA라는 우리 농업의 엄청난 사건이 ‘상생협력기금조성’이라는 터무니없는 대책과 함께 흐지부지 국회를 통과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국내총생산GDP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2% 수준으로 줄었고, 농업 종사 인구가 줄어든 것이 일차적인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이유는 바로 우리 일반 국민의 농업에 대한 애착과 관심이 줄어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유권자인 우리가 관심을 가지는 일이라면 정치인과 관료 역시 관심을 가지지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이 실시한 「농업·농촌에 대한 2014년 국민의식 조사결과」에 따르면,

‘농산물시장 개방이 확대될수록소비자는 더 유리해진다’고 응답한 사람은 67.2%나 되었다. 가격이 비싸더라도 우리 농산물을 사겠다는 국산농산물 구매충성도는 2009년 37%에서 2012년 34.1%, 2014년 29.5%로 지속해서 하락했다. 농업·농촌의 공익적 기능을 인정하는 비율과 그것을 살리기 위한 추가적 세금 부담 의향도 각각 66.2%와 50.9%밖에 되지 않았다. 이처럼 우리 국민의 농업에 대한 소극적·부정적 태도가 확산된다면, 개방의 거센 파고를 맞닥뜨려가며 우리 농업을 위한 철학과 비전을 제시하고 행동하는 국가를 기대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다행인 것은 아직 무차별적 농업 개방에 대한 우려와 국가적 차원에서 농업을 지켜야 한다는 기본적인 가치관 자체는 우리 국민 사이에서 큰 흔들림 없이 유지되고 있다는 점이다. 위 조사결과에 따르면, ‘국가는 국민의 식량안보를 위하여 최대한 농업을 보호하고 지킬 책임이 있다’는 의견이 93.5%로 나타났다. ‘농산물 시장이 이미 지나치게 개방되었다’는 문항과 ‘농산물시장이 더 개방되면 농가와 농촌경제가 더 어려워질 것’이라는 문항에 동의한다고 응답한 비율도 각각 75.7%와 87.4%였다.

개방은 교류와 풍요를 의미하는 것이어야 한다. 약탈과 불안을 의미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어떤 농업 개방을 원하는가? 2016년 시장 개방의 최종 단계에서 마지막 숨을 가쁘게 내쉬고 있는 한국 농업의 명줄은 다름 아닌 우리의 손에 달렸다  .

※필자 노주희: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국제통상위원회 변호사. 한·중 FTA, 쌀 관세화, 일본산 수산물 잠정조치 등 우리 농업통상 관련 현안에 대하여 활발하게 활동해왔다. 변호사가 되기 전에는 <프레시안> 기자로 일하며 ‘한·미 FTA 뜯어보기’ 시리즈를 연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