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멜버른 시 공동 텃밭,
베지 아웃Veg out
글ㆍ사진 신수경 편집장
우리나라와 적도 반대편에 있는 호주는 9~11월이 봄, 12~2월이 여름, 3~5월이 가을 ,6~8월이 겨울로 계절도 우리와 반대다. 두꺼운 코트 대신 핫팬츠에 빨간 모자를 쓴 산타 복장으로 ‘한여름의 크리스마스’를 맞는 곳이기도 하다.
호주 멜버른 시는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에 매년 이름을 올린다. 화려하고 세련된 도시 환경과 풍성한 문화, 도심을 무료로 다닐 수 있는 전차tram를 비롯한 편리한 생활환경, 도시를 살짝 벗어나면 양들이 구름처럼 모여 있는 넓은 초원과 햇살이 부서져 반짝반짝 빛나는 황홀한 바다를 만날 수 있는 그곳은, ‘가장’인지는 모르지만, 살기 좋은 곳임에는 틀림없었다.
놀이공원 옆 시민정원
호주 멜버른 시 외곽 세인트 킬다St. Kilda 지역에 있는 루나 파크. 1912년에 설립된 이 놀이공원은 호주에서 가장 오래된 궤도 열차로 이름이 나 있다.
보통의 롤러코스터는 하늘을 향해 천천히 오르다가 엄청난 속도의 급강하와 회전. 그리고 거기서 더 진화되면 360도 회전, 후진, 급강하와 같은 위험천만한(?) 사태에 넋이 나간 비명들이 난무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아름다운 해변 포트 필립베이를 끼고 달리는 이 궤도열차를 눈으로 따라가다보면 믿기지 않는 광경을 보게 되는데, 열차 한가운데 떡하니 있는, 조형물이 아닌 진짜 사람의 모습이다. 안전요원으로 추정되는 그는 철로의 굴곡과 경사를 따라 미동도 없이 늠름하게 서 있다. 환호성인지 비명인지 구분이 모호한 탄성이 간간이 들리는 것 외에는 평온하기 이를 데 없는 광경. 그 신기한 장면을 구경하며 걷다보면 지척에 ‘베지 아웃Veg out’을 만나게 된다.
6m² 남짓한 작은 텃밭들이 200여 개 모여 있는 공동 텃밭 베지 아웃은 ‘St. Kilda Community gardens & Art studio’ 라는 별칭도 있다. 1881년 이전부터 주 정부의 땅이었고 20여 년 전까지는볼링 클럽이었던 이곳. 지금은 시 공유지를 시민에게 텃밭으로 분양하여 시민들이 자연스럽게 교류하고 참여하는 도심 속 녹색공간으로, 또한 농업과 환경에 대한 시민들의 의식을 높여주는 공간이 되고 있다. 독일의 시민 정원 ‘클라인 가르텐’과 닮았지만, 구획이 깔끔하게 나누어지지 않았고 규모도 매우 작다. 그리고 한껏 개방적이다. 연 50AUD, 우리 돈으로 약 4만5천 원의 임대료만 내면 텃밭의 주인이 된다는 것도 큰 매력이다.
아기자기한 텃밭들의 자유로움
누구의 소유도 아닌 이 공간에서 도시 사람들은 꽃을 키우고 감자를 키우고 토마토를 키운다.가끔 심지 않은 작물이 밭 한쪽에 자리를 잡는 ‘횡재’를 맞기도 한다. 이웃의 채소밭에서 날아온 씨앗들이다.
시민 정원이면서 ‘아트 스튜디오’라는 이름에 걸맞은 이곳, 아기자기한 텃밭들의 자유로움이란. 텃밭 주인의 개성과 취향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다양한 모양의 작은 밭들을 둘러 보았다. 며칠간 우리나라 소농과는 ‘사이즈’가 다른 호주의 소농들을 만나며 낙담(?)했던 일행들은, 드디어 소농다운 소농을 만났다며 반가워했다.
이곳에선 음식물 쓰레기와 폐자재를 이용해 유기질 비료를 만들고, 빗물을 저장해 농사짓는 데 사용하며 지속 가능한 저비용 농업을 지향한다. 개인 밭 외에 공동 구역은 일벌Working Bee라 부르는 자원봉사자가 관리하여 정원 전체가 정돈되고 유지될 수 있도록 협력한다.
작은 텃밭들을 지나 중앙으로 들어가면, 널찍한 잔디밭과 음식을 조리하고 나눌 수 있는 커뮤니티 공간이 나오는데, 바로 여기가 중요한 소통의 공간이다. 사람들은 필요에 따라 공간을 나눠 쓰고 함께 교육도 하고 음식을 나누기도 한다. 이곳에서 열리는 가장 큰 행사는 텃밭의 주인들이 모두 모여 함께하는 크리스마스 파티라고 했다.
작은 텃밭에서 지구의 변화를 느낀다
때마침 손녀 손자와 함께 밭을 가꾸는 워커 씨를 만났다. 그의 일곱 살 손녀 타시는 수줍음을 많이타 말을 붙이기도 어려웠지만, 먼 나라에서 온 손님들이 사진을 찍을 수 있게 포즈를 취해주었다. 타시의 개구쟁이 남동생과 퇴비장에서 퇴비를 만들고 온 워커 씨의 아내까지, 온 가족이 밭에 모이니 작은 텃밭이 꽉 찼다. 워커 씨는 베지 아웃 근처에 살다가 몇 달 전에 6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이사를 갔지만, 텃밭을 포기하고 싶진 않아 이곳에 자주 온다고 했다. “이 밭은 매우 작지만 생산성이 아주 높아요. 물론 수익은 마이너스입니다(웃음). 이곳에서 작물을 키우며 지구 온난화와 기후 변화를 느끼고 있어요.”
베지 아웃veg out은 ‘느긋하게쉬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농민에게는 고되고 바쁜 노동이 이 곳에서는 느긋함으로 치환되는것이 아이러니다. 하지만 그 느긋함은, 작은 텃밭에서 생명이 움트고 자라 열매 맺는 것을 바라보게 하고, 그것을 위해 땅과 하늘과 바람과 물과 햇볕, 그리고 사람의 정성이 만들어내는 협력의 중요성을 알게 한다. 그리고 그 느긋함을 경험한 도시민은 농부의 고단함과 정성을 이해하고, 인증마크보다 농민을 신뢰하며, 지속 가능한 농업과 농촌에 적극적인 지지를 하게 된다.
호주 멜버른 시가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인 비결 중 하나는, 그들이 지켜가는 이러한, 혹은 이것과 비슷한 다양한 형태의 ‘상생’의 힘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