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이했지만, 송구영신送舊迎新이라는 말을 하기에는 우리들의 삶이 매우 팍팍하다. ‘헬-조선’이라는 말이 아무렇지도 않게 쏟아져 나오고, 청년뿐만 아니라 세대를 불문하고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이 이 나라에서는 낯선 일이 되어 버린 듯하다.
농촌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봄부터 늦여름까지 농민은 가뭄과 사투를 벌이다시피했지만, 건져 올린 수확물은 쭉정이가 대부분이었다. 그 와중에 결실을 거둔 농작물도 제값을 받지 못했고, 초가을부터 지루하게 이어진 건들장마는 농민들의 생활을 또 한 번 망가뜨렸다. 그리고 초겨울에 접어들면서 TV에 연일 등장하는 한·중 FTA 홍보 영상은 그런 농민들의 마음을 밤마다 후벼놓았다.
‘먹방’, ‘쿡방’의 변신
TV를 틀면 튀어나오는 ‘먹는 방송(이하 먹방)’과 ‘요리방송(이하 쿡방)’도 농민들 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기는 마찬가지였다. 지상파, 케이블, 종편방송을 불문 하고, 먹거리나 요리를 소재로 웃음거리 를 만들어내는 것에 치중하다 보니 먹거리의 의미성은 애당초 고민의 대상도 되지 못했다.
먹방과 쿡방은 대부분 ‘농’이 없는 ‘식’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면서 먹거리에 감춰진 다양한 문제들에 대한 의문은 제기하지 않는다. 개중에는 음식에 깃들어 있는 지역의 문화, 그 음식과 결부된 사람들의 이야기나 우리 선대 어른들의 삶을 녹여내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프로그램은 맛있어 보이는 음식을 시청자들에게 보여주는 것에 치중할 뿐 오늘 우리의 농업과 먹거리가 처해 있는 현실에 대한 본질적인 접근은 하지 않는다.
예전에는 인기 없는 대표적인 TV 프로그램 중의 하나가 요리 관련 프로그램이었다. 주로 여성 요리사가 나와서 음식을 만드는 법을 가르쳐주는 요리프로그램은 시청률이 낮은 시간대에 편성된 대표적 프로그램이었다. 이 프로그램을 진행한 요리사들은 요리 프로그램 자체보다는 요리학원 원장또는 감미료나 가공식품의 광고모델로 더 유명했을 정도로 요리 관련 프로그램은 그다지 사회적 관심에서 멀어져 있었다. 그러나 먹방 혹은 쿡방 프로그램은 적은 제작비로 안정적인 시청률을 확보할수 있고, 이 프로그램을 ‘교육 오락물Infotainment’이라는 측면을 강조해서 책이나 잡지 등으로 연결하면 부가적인 수익을 창출할 수 있다는 점에서 방송사에 매력 있는 콘텐츠로 부상했다. 여기에 종합편성 채널의 등장 등으로 인한 프로그램 과포화 상태, 프로그램의 양극화(극단적인 정치 지향적인프로그램 vs 탈정치 프로그램) 등이 적은 제작비와 부가수익창출 등과 엮어져 먹방·쿡방 전성시대를 맞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먹거리 방송에는 없는 것
그런데 문제는 이들 프로그램 대부분이 ‘농農’이 없는 ‘식食’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면서 먹거리에 감춰진 다양한 문제들에 대한 의문은 제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개중에는 음식에 깃들어 있는 지역의 문화, 그 음식과 결부된 사람들의 이야기나 우리 선대 어른들의 삶을 녹여내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프로그램은 맛있어 보이는 음식을 시청자들에게 보여주는 것에 치중할 뿐 오늘 우리의 농업과 먹거리가 처해 있는 현실에 대한 본질적인 접근은 하지 않는다. 최근 등장하고 있는 귀농 관련 프로그램도 현재 농민의 현실에 관해서는 눈을 감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들 프로그램 대부분은 먹거리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속성, 함께 나눠 먹는다는 관점도 없다. 만 65세 이상 노인의 평균 영양섭취량은 권장량의 50% 미만에 불과하고, 급식지원을 받는 결식아동이 40여만 명에 이르는 현실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먹거리의 소비를 개인의 취향, 그리고 드러내놓지는 않지만 개인의 능력이라는 지극히 한정된 영역에서 접근할 뿐 먹거리가 식탁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이나, 그리고 먹거리의 분배나 먹거리 정의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다. 먹거리와 관련한 사회적 고민을 발견하기 어렵다.
먹방이나 쿡방이 황금시간대를 점령하고, 구글Google 등 포털사이트의 검색트렌드에서 먹방이나 쿡방이라는 용어의 검색이 급격하게 증가하는 동안 ‘농’과 관련된살림살이는 크게 악화되었다. TV 속 진수성찬에 빠져 넋을 놓고 있는 동안 우리의 농업과 농촌의 위기가 심화되었다. ‘농’의 가치에 대한 고민이 없는 쿡방과 먹방이 ‘농’에 대한 관심마저 밀어내 버렸다.
‘먹방’의 범람 속에 외면당하는 우리의 농업
그런데 한국에서 먹방이나 쿡방이 황금시간대를 점령하고, 방송 소재로 등장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이에 우리의 농업과 농촌의 위기가 심화되고 있는 것은 우연일까? 구글Google 등 포털사이트의 검색트렌드에서 먹방이나 쿡방이라는 용어의 검색이 급격하게 증가하는 동안 ‘농’과 관련된 살림살이는 크게 악화되었다. TV 속 진수성찬에 빠져 넋을 놓고 있는 동안 우리의 농업과 농촌의 위기가 심화되었다. ‘농’의 가치에 대한 고민이 없는 쿡방과 먹방이 ‘농’에 대한 관심마저 밀어내 버렸다.
농가의 살림살이가 편한 적은 거의 없었지만, 최근에는 형편이 말이 아니다. 농가를 농가라고 할수 있는 이유는 농가소득에서 농업소득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기 때문이고, 또 그래야만 농업의 지속가능성도 담보할 수 있다. 농가소득에서 농업소득이 차지하는 비중은 2006년에는 37%를 넘었지만, 2012년 이후에는 30% 이하로 낮아졌다. 농사지어서 벌어들이는 소득이 전체 소득의 30%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농업소득은 경지규모가 커짐에 따라서 증가하는 것이 당연하고, 그렇게 되면 농업소득으로 가계비를 충당하는 비율이 높아지기 마련이다. 198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평균적으로 볼 때, 가계비의 80% 정도를 농업소득으로 충족할 수 있었지만, 2007년 이후 40% 아래로주저앉았다. 특히 2012년 이후로는 10ha 이상의 경지규모를 가지고 있는 농가조차 농업소득만으로는 가계비를 충족하지 못하는 참으로 이해하지 못할 일이 농촌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다. 범람하는 먹방 속의 한국 농업의 현주소다.
먹방이 범람하기 시작한 2011년, 우리나라의 농림축수산물 수입액은 역사상 최초로 300억 달러를넘어선 이후 2014년에는 361억 달러로 크게 늘었다. 최근 10년 사이에 농림축수산물 수입액이 3배가까이 증가했다. 또한, 곡물 자급률도 2011년에 역사상 최초로 25% 이하로 내려간 이후 회복되지 않고 있다. 2014년 곡물 자급률 잠정치인 24%도 95.7%의 자급률을 기록한 쌀 덕분에 유지될 수 있었다.
보리쌀의 자급률도 2010년에 역사상 최초로 30%이하로 떨어진 이후 25%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곡물의 수입도 소수의 국가에 의존하고 있다. 2014년 기준으로 우리나라는 126만 톤의 대두를 수입했는데, 이 중 48%를 미국에서 수입했다. 375만 톤을 수입한 밀의 경우에도 미국에서 34%, 호주에서 27%를수입했다. 1,022만 톤을 수입한 옥수수의 경우도 이 중 53%를 미국에서, 15%를 브라질에서 수입했다. 국지적인 기상이변이 전 세계 여러 지역에서 빈발하는 상황에서 소수의 수출국에 의존하는 안일한 시스템에 한국의 먹거리가 놓여있다. 불안한 국제곡물시장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방법은 우리 스스로 자급력을 높여야하는 것이 첩경이지만, 정부는 지난 12월, 10만ha에 이르는 농업진흥지역을 보완 정비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안 그래도 농지전용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상황에서 그동안 정부가 막대한 예산을 투여해서 조성한 우량농지인 농업진흥지역을 비농민들의 투전판으로 만들 작정을 하고 나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안전하지 못한 먹거리의 범람
이처럼 우리나라는 먹거리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것이 더욱 어려워지는 상황에서 안전한 먹거리의 확보도 어려워지고 있다. 연간 1,600여만 톤에 이르는 곡물 수입량 중 상당량은 안전성이 담보되지 못한 GM(유전자조작) 곡물이라는 점이다. 농촌진흥청이 제출한 국감 자료에 의하면 2011~2014년 사이에 수입된 GM 곡물은 3,600여만 톤에 이른다. 2014년에는 총 수입곡물 1,586만 톤 중에서 GM 곡물이 1,082만 톤에 달했다.
GM 곡물의 안전성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지만, 어쨌든 최근의 세계적인 흐름은GM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몬샌토를 비롯한 GM 종자 개발업체들의 반격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유럽의 경우 GM 작물 재배금지가 확산되고 있다. 지난해 10월 3일까지 EU위원회에 GM 작물 재배금지를 공식적으로 통지한 국가는 이탈리아, 독일, 스코틀랜드, 오스트리아, 아일랜드, 프랑스, 그리스, 폴란드 등 14개 국가에 이르는데 이는 유럽 인구의 65%, 경지의 66%에 해당한다. 가까운 대만의 경우에도 GM 작물의 학교급식 사용을 금지하는 법안이 최근 의회를 통과했다.
최근의 세계적인 흐름은 GM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지난 해 10월 3일까지 EU위원회에 GM 작물 재배금지를 공식적으로 통지한 국가는 14개국에 이르는데 이는 유럽인구의 65%, 경지의 66%에 해당한다. 가까운 대만의 경우에도 GM작물의 학교급식 사용을 금지하는 법안이 최근 의회를 통과했다. 이런 흐름과는 반대로 한국에서는 GM 곡물의 상업재배에 한발 성큼 다가서는 행태가 연출되고 있다.
이런 흐름과는 반대로 한국에서는 GM 곡물의 상업재배에 한발 성큼 다가서는 행태가 연출되고 있다. 농촌진흥청의 GM 벼 안전성 심사가 그것이다. GM 작물의 시식회장, 박람회장이 되어버린 한국에서 GM 종자 개발업체나 GM 농산물을 원료로 사용하는 식품제조업체에 빌미만 제공할 우스운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국내 농업을 담보하지 않는, 그리고 국내 소비자들의 안전을 배려하지 않는일련의 행태들로 인해서 우리의 농업과 먹거리는 추락의 길로 접어들고 있는 건 아닌지 우려된다. 국내에서 GM 작물의 상업재배가 어떤 형태로든 이루어지게 되면 국내산 농산물의 우위는 완전 붕괴될 수밖에 없다. 사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캐나다의 유채 밭에서 일어났던 몬산토의 특허침해소송의 대상자가 우리 한국 농민이 될 수도 있다.
지금 당장 걱정스러운 것은 지난 연말에 발효된 한·중 FTA로 문호가 활짝 개방된 중국산 농산물의 관리이다. 중국의 미승인 GM 작물들이 한·중 FTA를 계기로 쓰나미처럼 밀려들어 올 개연성이매우 높아졌다는 것이다. 중국 흑룡강성의 경우 대두 농가의 약 10%가 GM 콩을 불법으로 재배하고있다고 언론은 전하고 있다. 중국에서 GM 콩의 재배는 불법이지만, 농가들은 인터넷을 통해서 구입한다고 한다. 흑룡강성은 중국에서 세 번째로 많은 콩을 생산하는데, 주요 수출국은 한국과 일본이다. 중국 정부도 관리를 못하는 미승인 GM 콩이 한국의 식탁을 이미 점령했는지도 모른다. 2011년에는 중국에서는 이유식과 쌀국수에서 허가를 받지 않은 GM 쌀이 발견되기도 했다. 싼 가격을 앞세운 중국산 농산물에 더해서 정체불명의 GM 작물들로 우리의 농업과 식탁이 흔들리지 않을까 걱정해야 할 판이다.
먹는 것에 대한 관심을 ‘농과 식’에 대한 사회적 관심으로
먹방과 쿡방 열풍에 인스턴트식품의 매출이 급증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시간이 부족한 현대인에게 쉽게 만들 수 있는 레시피와 노하우를 전달하는 예능성 프로그램은 기다림의 과정이 생략된결과물로서의 먹거리에 치중하도록 유도한다. 음식을 구경하는 프로그램에 익숙해 진 시청자들은 식자재가 누구에 의해서 어디에서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대한 관심을 두기 어렵다.
그런데 최근 우리 사회에는 ‘로컬푸드’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는 사실에서 ‘농’과 식’의 분열된 관계를 회복시킬 수 있다는 조그만 희망을 보게 된다.
단순하게 지역에서 생산된 먹거리가 직거래 되는 시스템이 아니라, 지역의 농민과 소비자가 함께 만나는 소통의 매개물로 로컬푸드의 역할이 커지고 있다. 대도시의 소비자들도 ‘얼굴 있는 먹거리’를 찾아 나서고 있다. 로컬푸드를 통해서 만들어지는 농민과 소비자의 상생의 과정들을 먹방의 형태로 풀어내는 프로그램을 기대하는 것은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의 몽상일까? 돈 되는 것이어야 움직이는 천박한 사회에서는 불가능한 것일 수 있지만, 그래도 새해에 희망을 담아 몽상이 아니기를 기원해 본다.
※필자 윤병선: 건국대학교 경영경제학부 경제학전공 교수. 한국농어촌사회연구소 부소장과 사람과경제(구. 충북사회적경제센터) 상임대표를 역임했다. 세계 농식품체계에 대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대안운동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농업과 먹거리의 정치경제학」(2015, 울력)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