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농민 곁에

이상대 전 경상남도농업기술원 원장

40여 년간 농민을 위한 지도와 연구에 힘써온 이상대 원장.
40여 년간 농민을 위한 지도와 연구에 힘써온 이상대 원장.

“농민은 농사짓기도 바쁘죠. 그런데 생산부터 가공, 유통까지 신경 쓰려니 너무 힘들어요. 잠도 못 자고 일하니까,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대요. 농민의 소박한 꿈이 뭔지 아세요? 본인이 생산한 농산물을 적정한 가격에 파는 거예요. 농사만 지어서 먹고살 수 있도록요.”
  이상대 전 경상남도농업기술원 원장(61, 제11회 대산농촌문화상 농업공직 부문 수상자)은 농민을 위한 ‘길라잡이’가 되고 싶다고 했다. 길라잡이는 여기가 어디인지 알려주고, 나아갈 방향으로 이끌어 준다. 무엇보다 함께 걸으니 의지가 된다.
  농민과 함께 걸어온 40여 년, 이 원장에게도 소박한 꿈이 있다. 우리 농민이 잘 먹고, 잘사는 것. 농민이 먹고살 걱정에 농촌을 떠나지 않도록, 조금 더 걷기 좋은 길을 찾는 것이다.

경관용 연 재배 연구 현장을 찾은 이상대 원장(맨 오른쪽)과 직원들. Ⓒ경상남도농업기술원
경관용 연 재배 연구 현장을 찾은 이상대 원장(맨 오른쪽)과 직원들. Ⓒ경상남도농업기술원

농민을 웃게 하는 연구자
“어릴 적에 아버지를 따라 쇠꼴을 베러 다녔어요. 제 몸집보다 훨씬 큰 소를 끌고 밭일도 했고요.”
농촌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 원장은 1980년 농촌지도사가 되어 10여 년을 농민 지도에 힘쓰고, 1992년 경상남도농업기술원에서 연구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가 맡은 첫 임무는 농산물 가공 연구였다. 당시 국내에는 가공 전문 인력이 없었기에,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제 전공이 아니어서, 처음에는 진짜 깜깜했어요. 자료 수집하러 일본에 무작정 다녀오고, 잘못된 설계 도면에 머리를 쥐어짜야 했습니다. 그래도 농민에게 좋은 일이니까 해내야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이상대 원장은 “농민에게 꼭 필요한, 농민이 진짜 원하는 연구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상대 원장은 “농민에게 꼭 필요한, 농민이 진짜 원하는 연구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농산물종합가공센터에서는 농민이 직접 가공식품을 만들 수 있도록 돕는다. Ⓒ경상남도농업기술원
농산물종합가공센터에서는 농민이 직접 가공식품을 만들 수 있도록 돕는다. Ⓒ경상남도농업기술원

  1996년, 전국 최초의 농산물종합가공센터가 세워지기까지, 그는 하나부터 열까지 새로이 공부해 전문가가 되어야 했다. 넘쳐나는 농산물을 처리하지 못해 헐값에 팔아야 했던 농민에게, 농산물의 부가가치를 올릴 수 있는 가공센터는 ‘신세계’였다. 이 원장은 그 공을 인정받아 2002년 제11회 대산농촌문화상을 수상했다.
  “수상 이후 신기술 개발부터 국내 종자 확보까지 농민을 위한 다양한 연구에 몰두했습니다. 10년 전 양파연구소장으로 발령 받았을 때가 떠오르네요. 당시 양파 농가가 노동력 부족, 인건비 상승 때문에 시름이 깊었습니다. 그때 우리 연구소에서 ‘양파 아주심기(정식) 기계화 기술’을 개발하여 노동력 94%를 절감시켰죠. 농민의 반응이 아주 좋았습니다.”
  이 원장은 어떤 질문에도 허허허, 사람 좋은 웃음을 짓다가도 ‘농민’ 이야기만 나오면 눈을 빛냈다. 그는 좋은 연구를 위해서 연구자가 농민과 더 가까이, 더 오랫동안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공무원은 반드시 현장을 찾아야 합니다. 현장에서 농민이 겪는 문제점을 파악하고, 기관으로 가지고 들어와야죠. 혼자 힘으로 할 수 없으니,여러 사람과 협력해서 방안을 찾고,다시 농가에 가서 방법을 제시해야합니다. 그리고 연구 내용을 내·외부에 잘 알리는 것도 중요합니다.”

좋은 연구를 위해 자주 현장을 찾았던 이상대 원장. Ⓒ경상남도농업기술원
좋은 연구를 위해 자주 현장을 찾았던 이상대 원장. Ⓒ경상남도농업기술원

차별화된 후배 양성 ‘기술’
경상남도농업기술원은 대산농촌문화상 수상자를 많이 배출한 기관이다. 특히 이 원장의 임기 동안 2명의수상자가 나왔다.
  이 원장은 후배들이 ‘전문성’을 가질 수 있는 여건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한 품목에서 제대로 된 연구가 나올 때까지 지원을 아끼지 않으면서도, 후배가 업적을 스스로 이뤄내기까지 묵묵히 기다렸다. 경상남도농업기술원에 농업 분야의 탁월한 전문가가 많은 이유다.

이상대 원장과 안재욱 연구사. 이 원장은 임기 내내 후배들의 전문성을 키우기 위해 노력했다.
이상대 원장과 안재욱 연구사. 이 원장은 임기 내내 후배들의 전문성을 키우기 위해 노력했다.

  “공무원이 전문성을 갖춰야 농가도 믿음을 주고 따라옵니다. 뛰어난 기술이 있어야 농민들이 손뼉을 치죠. 하지만 세상에 없는 걸 만들어내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려면 10년 넘게 연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3년, 5년마다 부서가 바뀌면 계획만 세우다 임기가 끝나요. 세계적인 전문가를 키울 수 있는 시간도, 예산도 필요합니다.”
  지난 12월, 이 원장은 후배가 건넨 한 마디로 40여 년 공직 생활을 기분 좋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후배 공무원에게 존경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참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동안의 노력과 시간을 인정받는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이상대 원장은 농민만을 바라보며 달려온 40여 년의 여정을 마치고 2019년 12월 27일 퇴임했다. ⓒ경상남도농업기술원
이상대 원장은 농민만을 바라보며 달려온 40여 년의 여정을 마치고 2019년 12월 27일 퇴임했다. ⓒ경상남도농업기술원

계속, 농민 곁에
공직 생활을 마친 이 원장은 고향인 울산으로 간다. 앞으로 가족이 먹을 만큼 농사를 짓고, 주변의 농가를 살피며 이웃과 더불어 살 생각이다.
  “저도 농촌에서는 청년이래요, 청년.(웃음) 진짜 청년이 농촌에 들어오고 싶은 마음이 생기도록, 주민들이랑 잘 살아봐야죠. 우리 마을에도 제값 못 받고 농사짓는 분들이 많아요. 그분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가까이에서 같이 고민하려고 합니다.”
  나침반의 지남철이 항상 떨고 있어도 결국 올바른 방향을 가리키듯이, 40여 년을 한결같이 살아온 이 원장의 ‘인생 2모작’도 기대해 봄 직하다.

경상남도농업기술원의 상징과 같은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 석상 앞에 선 이상대 원장과 부인 최미영 씨.
경상남도농업기술원의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 석상 앞에 선 이상대 원장과 부인 최미영 씨.

글·사진 이진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