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의 의미, 찾는 게 아니라 만드는 것

‘농촌’이라는 이미지
농촌이라는 말을 듣게 될 때, 사람들은 무엇을 연상할까? <6시 내고향> 같은 TV 프로그램을 떠올리는 사람이 적지 않을 테다. 늙은 농민들이 사는 곳이지만, 따스한 인심人心이 아직 남아 있는 장소라 여길 만하다. 그런데 ‘따스한 인심’의 이미지도 어릴 적에 농촌에서 성장한 사람의 기억일 뿐, 모두가 공유하는 일반적인 것은 아니다. 1970~1980년대에 청년일 때 고향을 떠나와 도시에 자리 잡은 중년에게 농촌은 여전히 질곡桎梏의 땅이다. 어느 시인에게 농촌은 인심 넘치는 따뜻한 장소가 아니다. 병들어 신음하는 고통의 장소다.

“어서 가그라 내 아들아 / 맘 약해진다 돌아보지 말고 / 어서 가그라 내 아들아 / 산들도 주저 앉아 신음을 허고 / 벌판도 농약 먹고 뻗어버렸다 / 메말라 비틀어진 고향의 마을 (중략) 명절이라고 내려오지 말고 / 독허게 살아라 내 아들아 / 고리채 잡부금에 등이 휘었고 / 신경통 해소병에 속이 곯았다 / 통곡과 자살기도 술주정의 고향 / 돌아보지 말고 / 어서 가그라” <배웅>, 김해화

  한편, 서울에서 나고 자라면서 서울 밖에서 이틀 넘게 지내본 적이 없는 젊은이에게 ‘농촌’의 이미지는 막연하다. 우리나라를 ‘서울/지방’의 분법分法으로만 헤아리도록 은연중에 배웠기 때문이다. ‘도시/농촌’이라는 구도는 실감 나지 않는다. 제주도는 ‘감귤이 나는 지방’이지 ‘감귤 농사짓는 농촌’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대구광역시나 경상북도 봉화군이나 지방이기는 매한가지다. ‘대구는 도시고 봉화는 농촌’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농촌이란 무엇일까?”라고 물으면, “글쎄요. 농사짓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인가요?”라는 뻔한 질문이 되돌아온다.
  ‘농촌은 이런 곳이다’라고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누군가 ‘농촌은 이런 곳이다’라 고 말할 때 그 바탕에 깔린 저의底意를 알아채는 게 더 중요하다. “맨손으로 송어 잡기, 뗏목 놀이,물총 놀이 등 물에서 할 수 있는 체험은 물론, 부모님들의 추억을 떠올리는 수박서리 체험 놀이 등등 시원함과 짜릿함이 가득!”이라는 어느 농촌체험마을의 홈페이지에 게시된 글에서, 농촌을 ‘상업적 가치’로 환원해 이익을 보려는 상략商略이 보인다. 어느 농부의 편지글에서는, 능동적 주체인 농민과 농촌 주민이 삶을 이어가는 장소로써 농촌을 부각하려는 소망이 드러난다.

“봄이 되자 동리 앞 신작로新作路로 관광버스가 뻔질나게 지나다닙니다. 화사하게 차려입으신 구경꾼들이 마냥 즐거운 표정으로 주마走馬 대신 고속버스로 간산촌看山村하시며 지나갑니다. (중략) 이 땅에서 하루빨리 관광버스가 없어지고 순례자들의 행렬이 생겨나기를 바랍니다. 순례자들은 그들이 지나는 신작로가 어떻게 해서 생겨났으며, 그들이 지나가는 옆 동리의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지 생각할 겁니다.”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전우익

  ‘농촌은 ~이다’라고 말할 때, 두 가지 용법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지시designation를 내포하는 용법이고, 다른 하나는 현시manifestation를 내포하는 용법이다. 지시는 특정한 이미지를 농촌과 연결한다. ‘농촌은 인심 좋은 곳’이라거나 ‘농촌은 고통스러운 곳’이라고 지시할 때, 그게 참인지 거짓인지를 따지는 게 중요해진다. 다른 한편, 같은 말이라도 지시가 아니라 현시의 목적으로 쓸때는 농촌을 말하고 표현하는 주체와 명제가 연결된다. 욕구와 신념의 언표言表를 통해 말하는 주체가 스스로를 드러낸다. 농촌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표현한 시에서는, 고통과 질곡을 걷어낸 농촌을 그리는 시인의 바람을 읽을 수 있다.
  지시는 그 자체로 농촌을 바꿀 수 없고, 현시는 농촌을 바꾸려는 의도를 내포한 언어 행위다. 그러므로 “농촌이란 농업에 종사하는 농업인이 주로 모여 사는 지역 또는 마을로 제2․3차 산업 종사자가 밀집한 도시에 대응되는 말이다”1)라는 식의 무미건조한 지시작용은 사실 쓸 데가 별로 없다. 누가, 어떤 욕구와 신념에 기초하여,“농촌은 이러저러한 곳이다(이어야한다)”고 말하고 있느냐를 살펴야 한다. 현시가 있고 나서 수많은 활동과 도전이 뒤따르면, 실재實在하는 농촌이 바뀔 것이고 그에 따라 농촌을 지시하는 명제도 수정될 것이다. 우리는 농촌을 무엇이라고 현시할 것인가?

서울 밖에서 이틀 넘게 지내본 적이 없는 젊은이에게 ‘농촌’의 이미지는 막연하다. 우리나라를 ‘서울/지방’의 분법分法으로만 헤아리도록 은연중에 배웠기 때문이다. ‘도시/농촌’이라는 구도는 실감 나지 않는다. “농촌이란 무엇일까?”라고 물으면, “글쎄요. 농사짓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인가요?”라는 뻔한 질문이 되돌아온다.

농촌, 개인적 소비가 아니라 공동체적 생산의 장소
우리는 “끊임없이 한 사무실에서 다른 사무실로, 한 집이나 아파트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 다니면서 ‘장소’에 대해, ‘장소’의 상실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나 느낌이 없는”2) 일상을 산다. 간혹 어떤장소에 의미를 두더라도, 대개는 원자화된 개인들atomized individuals의 소비적 목적에 부합하는 한에서 그렇다. 최근 일주일 동안 일상에서 머물렀던 장소들을 떠올려보라. ‘어떤 음식점에서 생선회를 사 먹었는데 맛이 있었다’거나, ‘어떤 극장에서 재미있는 영화를 보았다’거나, ‘어떤 쇼핑센터에서 마음에 드는 옷을 저렴한 가격에 구매했다’는 식의 연상이 일어나지 않는가?
  어떤 곳을 의미 있는 장소로 만들려고 다른 이와 함께 의논하고 공동으로 노동하는 ‘장소화場所化의 실천’이 ‘소비의 실천’보다 더 두텁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작은 차이들이 뿜어내는 ‘꼴’과 스타일을 향해서 자본이 개인들을 변덕스럽게 몰밀어가고, 많이 먹게 만들고, 다르게 입게 만들고, 소문난 곳을 향해 내달리게 만들고, 모든 것을 팔고 모든 것을 사며, 소비를 자아실현의 일종으로 격상시킨 이데올로기가 나온 지도 오래된”3) 지금, 특히 도시에서, 장소는 편익/비용의 셈법 속에서만 다루어질 뿐이다. 우리는 장소를 소비하며 의미를 부여할 뿐이지, 장소를 만들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많이 쇠퇴했다고는 하지만, 농촌은 여전히 ‘소비가 아닌 생산의 장소’다. 도시 사람들 중에는 농촌을 소비의 대상으로만 보는 이가 적지 않겠지만, 정작 농민의 눈앞에는 거의 모든 것이 생산활동에 쓸모 있는 자원이거나 생산 활동의 결과다. 아니, 농촌이라는 장소 자체가 생산 자원이자생산물이다. 농사짓는 기반이 되는 농경지는 말할 것도 없고, 춘삼월이면 농사일로는 다 충족하지 못한 ‘경작 본능’을 달래기라도 하려는 듯 집 앞마다 마을 안길마다 나무와 꽃을 심는 손길이자연스럽다. 도시에서는 영화, 연극, 음악 공연을 감상-소비하러 다니지만, 농촌에서는 주민 스스로 합창단을 또는 연극단을 먼저 만들어야 공연을 감상할 수 있다. 도시에서는 음식점에서 매식買食하면 될 일을, 변두리 농촌 마을에서는 회관에 모여 밥을 짓고 반찬을 만들어 먹는다. 농촌에서는 무엇 하나 손쉬운 게 없다. 간단한 구매-소비 행위로 충족되지 않는 게 너무 많아서다. 웬만하면 직접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농촌의 일상은 고단한 만큼이나 생산적이다. 그리고 생산적인 만큼이나 농촌 곳곳에서 ‘의미들’을 만난다.

농촌은 여전히 ‘소비가 아닌 생산의 장소’다. 도시 사람들 중에는 농촌을 소비의 대상으로만 보는 이가 적지 않겠지만, 정작 농민의 눈앞에는 거의 모든 것이 생산 활동에 쓸모 있는 자원이거나 생산 활동의 결과다. 아니, 농촌이라는 장소 자체가 생산 자원이자 생산물이다.

  이제는 많이 사라졌지만, 마을[里] 공동 소유의 상여가 아직 남아 있고, 누군가 돌아가시면 마을 사람들이 상부상조相扶相助하여 장례를 치른다는 곳도 더러 있다. 그런 마을에서는 상여를 메고 나면 마을 공동체의 어엿한 구성원으로 인정받게 마련이다. 공동으로 해야 하는 일에 기꺼이 한몫 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도 일회적인 참여가 아니라, 이 시골 마을에서 사는 동안 오래도록계속 성실하게 참여할 것이라는 믿음을 줄 정도가 되어야 인정받는다.
  내가 살았던 시골 마을에서 읍내로 이어지는 몇 km 거리의 신작로 가에는 행렬이라도 하듯 코스모스가 줄지어 피어나곤 했다. 그것은 어떤 공동체적 장소화의 기억이다. 중학생 때 마을 4-H활동으로, 4월 어느 일요일 아침에 모인 우리는 먼지 날리는 신작로를 따라 걸으며 하루종일 코스모스 모종을 심었다. 귀찮았지만, ‘우리 집 일도 아닌데 이 일을 왜 해야 하는 거지?’라고 의문을 품거나 따져 묻는 친구는 없었다. 여름에는 수동식 분무기를 등에 지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재래식 화장실에 살충제를 뿌리고, 매주 일요일 아침 6시에 모여 마을 안길을 쓸곤 했다. 그것은 분명 새마을운동의 동원 체제에 속한 농촌 청소년들에게 부과된 의무였지만, 당사자였던 우리는 오히려 ‘귀찮기는 했지만, 하고 보니 나름대로 마을에 기여하는 보람을 느낄 만한 일’이라며 자발적 참여의 의미를 부여하고 마을 공동체에의 소속감을 확인했던 것이다.
  왜 농촌에서는 개인이 아닌 공동체의 원리가 중요하게 작동하는가? 일상생활의 터전을 공동의노동과 협력으로 가꾸지 않으면, 그곳이 앞으로도 계속 의미 있는 장소로 남기 어렵기 때문이다. 즉, 커먼즈4)commons가 아주 중요하기 때문이다. 마을에 붙어 있는 저수지가 내 소유가 아니라고 해서, 낚시꾼들이 아무렇게나 버리고 간 쓰레기를 안 치울 수 있는가? 여름철 불어난 물에 들판을 가로지르는 수로水路가 쓸려 나갔는데, 내 것이 아니라면서 복구하지 않아도 되는가? 여름철 마을 안길, 도로변, 수로 옆에서 벌어지는 ‘잡풀과의 전쟁’에 나 홀로 불참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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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이라는 가능성의 ‘사건’

농촌을 두고 예찬하는 사람도 있고 걱정하는 사람도 있다. 어느 쪽이든 납득할 만한 일리一理를 품고 있다. 다만, 예찬이나 걱정일랑 일단 괄호 안에 넣어두고, ‘가능성’이라는 관점에서 농촌을새롭게 말하자고 덧붙이고 싶다. 앞에서 농촌을 이런저런 특징 있는 ‘장소’로 이야기했지만, 실은 ‘가능성으로서 장소’를 말한 것이다.
  농민도 마찬가지이지만, 농촌은 고정된 실재가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사건들’에 가깝다. 아직 온전히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의 사건 말이다. 축구 경기장에서 페널티 킥을 차려고 공격수가 뛰어가는 사건, 상대편 골키퍼가 몸을 던지는 사건, 공이 망을 흔들고 심판의 손이 올라가는 사건,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우리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 사건 계열’로서 어렵지 않게 생각해 볼 수 있다. 그 같은 ‘가능성 사건 계열’이 현실화될 때, 비로소 득점이라는 ‘의미’를 지니게된다.
  물론, 다른 계열을 이루는, 무득점 또는 실점의 가능성도 있다. 가령, 농약과 화학비료로 뒤범벅된 환경, 옆집에서 누가 죽어도 모르는 고독사孤獨死의 풍경, 빈곤과 소외로 상처받은 환과고독鰥寡孤獨의 심경 등 앞에서 언급한 것과는 아주 다른 가능성 사건 계열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아직은 모두 가능성으로 존재한다는 점이다.

25※필자 김정섭: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연구위원. ‘마을학회 일소공도’의 운영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농촌의 지속 가능성을 화두 삼아 공부한다. 적게 먹고, 삼천 권의 책을 읽고,산책하며 살고 싶지만 삶이란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배우며 산다. jskkjs@krei.re.kr

 

 


1) 인터넷 두산백과사전(www.doopedia.co.kr)에서 ‘농촌’으로 검색했을 때 나오는 뜻풀이다.
2) 리 호이나키,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 김종철 옮김, 녹색평론사, 2009, 122쪽.
3) 김영민, 〈상인과 장인〉, 경향신문(2014년 1월 10일자).
4) “한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접근할 수 있는 문화적 자원이나 자연 자원 따위를 넓은 의미의 ‘커먼즈’라고 한다. 공기, 물, 야생 동식물 따위를 그 예로 들 수 있다. 좁은 의미로는, 개인적․집합적 편익을 위해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어 관리하는 자원을 커먼즈라고 도 한다. 즉, 모든 사람들이 접근할 수는 없고 특정한 사람들만이 접근할 수 있는 경우로 한정하는 것인데, 이런 유형의 커먼즈를 따로 일러 ‘공동풀자원’common pool resource이라고도 한다. 커먼즈는 사람들이 공동으로 보유하고 이용하지만 사적으로는 소유할 수 없는 것을 말한 .”(김정섭, “농업인인가, 농민인가”, 「마을 – 농민과 주민은 누구인가」, 마을학회 일소공도, 2019, 1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