팍팍한 현실 속 오히려 더욱 화려해지는 ‘음식 판타지’
팬데믹의 시대, 역설적으로 스크린 속에는 음식이 넘쳐난다. 물론 소위 선진국 이야기다. 코로나19와 기후변화가 맞물리면서, 전 세계에서 생명을 위협할 정도의 굶주림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수는 2019년보다 6배로 늘어났다는 보고도 있다(출처: 국제구호개발기구 옥스팜). 우리나라에서도 코로나19의 충격은 사회적으로 취약한 계층에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학교와 지역급식센터 등이 대면 운영을 멈추면서 많은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부실한 식품으로 끼니를 해결하게 되었다.
하지만 현실의 팍팍함을 덮어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텔레비전과 인터넷에는 전에 없이 화려한 음식의 향연이 펼쳐진다. 선뜻 바깥출입을 할 마음은 나지 않지만 집에서 요리할 자신도 없는 이들을 위해서, 집에서 요리하는 초보를 위한 ‘꿀팁’을 알려주는 방송들이 줄을 잇는다. 해외 여행길이 막혀서 아쉬워하는 이들이라면, 낯선 나라의 생소한 음식을 즐기는 방송을 보며 대리만족을 얻을 수 있다. 그림과 영상을 보는 것만으로는 마음의 허기를 달랠 수 없다면, 스마트폰을 집어 들고 배달앱을 연다. 대면을 꺼리는 시대가 되면서 음식 배달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했고 배달 음식의 종류도 놀랄 만큼 다양해졌다. 세계의 온갖 진미가 손가락만 몇 번 움직이면 우리 집 문 앞까지 날아온다. 직접 요리하는 즐거움까지 누리고 싶다면 밀키트(meal kit, 간편조리식)를 주문할 수도 있다. 멀어서 가보기 어려운 유명 식당이나 인스타그램에서만 보았던 요즘 뜨는 맛집의 음식들도 분량 맞춰 손질되어 조리법과 함께 배달되니 간단한 조리만 하면 바로 식탁에 올릴 수 있다.
이렇게 배달 주문한 음식들은 잠시 후 마법처럼 문 앞에 나타나 있다. 대면을 꺼리는 코로나19 시대, 배달해 주는 쪽이나 받는 쪽이나 마주치지 않는 편을 선호한다. 방송을 보고 배달을 주문하여 음식을 받을 때까지, 수많은 음식의 이미지가 스쳐 지나가지만 실제로 사람을 만날 일은 없다. 음식은 마치 저절로 만들어져서 저절로 문 앞에 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을 만들고 배달하는 과정에서 녹아 들어간 사람의 노동은 화면 뒤로 소거된다. 오랜 거리두기로 현실이 팍팍해지는 것에 비례하여 음식의 이미지는 더욱 화려해지고 판타지는 더욱 강해진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노동이 소거되었는지 과연 제대로 알고 있는가? 먹을거리를 생산하던 노동은 우리 눈에 보이다가 코로나19를 계기로 갑자기 보이지 않게 된 것인가? 아니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조차도 코로나19 전에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일까?
농촌의 목가적 풍경도 이제는 판타지
사실 오늘날의 먹을거리들은 놀랄 만큼 복잡한 경로를 거쳐 우리의 밥상에 올라온다. 그나마 경로를 쉽게 알 수 있는 것은 쌀밥 정도일 것이다. 최근 한국의 식량 자급률이 50%를 밑돌고 곡물 자급률(사료용 곡물 포함)이 20%대 초반에 머무는데, 쌀은 그중에서 사실상 유일하게 자급하는 농산물이다. 수치를 해석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간단히 말하면 쌀을 제외한 곡물은 거의 다 수입에 의존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 ‘밥’상에서 쌀밥의 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국민 1인당 하루 에너지 공급량으로 환산하면, 지난 반세기 동안 쌀이 공급하는 에너지 비중은 절반 아래로 줄어들었다(1965년 56.0%에서 2017년 23.1%, 출처: 통계청). 이 줄어든 몫은 고기, 과일, 유가공품 등 다양한 먹을거리들이 채우고 있는데(채소의 소비량도 늘어났지만 칼로리 면에서는 크게 기여하지 않는다), 이들의 공급은 수입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육류와 유가공품 생산을 위한 사료를 거의 전량 수입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국내산 축산물도 우리 국경 안에서 생산되기는 하지만 우리가 자급하고 있다고 하기는 어렵다. 이렇게 다양한 경로로 쌀의 수요가 대체되면서 사실상 식량 자급률은 계속 떨어지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쌀만 자급을 넘어 생산 과잉 상태이고 다른 작물들은 수입에 의존하는 상황도 이상적인 것은 아니지만, 벼농사 자체의 수익성도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다. 전체 작물 재배 면적 가운데 벼는 약 60%를 차지하지만, 농업소득 가운데서는 50% 정도를 점유하고 있다. 과수나 시설 원예처럼 생육 형태가 크게 다른 작물들과 면적 대비 소득으로 단순 비교하는 것은 좀 무리가 있지만, 벼농사가 다른 농사보다 크게 소득 면에서 유리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벼농사 위주 농가는 축산농가나 과수농가와 비교하면 평균 농가소득도 실제로 크게 떨어진다. 물론 축산농가나 원예농가는 상대적으로 영농 규모가 크기 때문에 이를 단순 비교하는 것도 주의해야 하지만, 평균이 아니라 농가 전체로 합산해 보아도 축산농가의 소득은 전체 농가 농업소득의 절반 가까이 차지한다. 벼, 채소, 과일, 화훼 등의 재배 소득을 다 합친 것이 축산 소득을 살짝 넘긴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농민이 벼농사를 선호하는 것은, 숫자로 따지는 소득만으로는 잡히지 않는 편익이 있기 때문이다. 벼농사는 사실상 100%에 근접할 만큼 기계화가 이루어져 있고, 따라서 농업노동자를 고용하기 어려운 형편의 소농들도 농사를 지속할 수 있다. 또한 계속 줄어들고는 있으나 이런저런 형태의 보조금을 비롯한 제도적 지원들도 여전히 벼농사를 떠받치고 있다.
이는 결국 한국 농업의 역사를 반영한다. 근현대 한국의 농업은 ‘굶주림에서 벗어난다’는 절박한 목표 하나에 모든 자원을 쏟아부었다. 통일벼의 개발과 보급 과정에서 드러나듯 벼는 무조건 생산량이 많은 것이 최고였으며, 벼 재배 면적을 최대한 늘리는 과정에서 작목 간의 균형 같은 문제도 뒷전으로 미루었다. 물론 그렇게 전심전력을 다 한 덕에 쌀 자급을 달성하고 ‘보릿고개’가 옛말이 되었으니, 그 성취를 평가하는 데 인색할 필요는 전혀 없다. 하지만 쌀 자급 하나만을 바라보고 내달린 ‘한국의 녹색혁명’은 부작용도 남겼다. 벼농사만을 앞세우는 바람에 맥류의 생산 기반이 사실상 무너졌으며, 화학비료와 농약 사용을 무제한에 가깝게 권장하다 보니 1980년대 이후 각종 약화藥禍 사고가 불거졌다. 또한 1970년대에는 추곡수매 제도를 통해 쌀값을 어느 정도(농민들에게는 만족스러운 수준은 아니었지만) 지지해 주었던 것에 비해 1980년대에는 자유주의적 농정으로 급히 방향을 틀면서, 다른 상품 작물들은 과잉생산 시 가격을 지지해 주는 안전망이 없어지는 바람에 주기적으로 가격 파동을 겪게 되었다. 국가가 권장한 작목에 너나 할 것 없이 달려들었다가 가격 파동으로 낭패를 보는 일이 작목만 바꿔 가며 거듭되었고, 그 손해는 고스란히 농가 부채로 남았다. 이러한 역사를 몸으로 겪은 농민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일관성 없는 농정 기조 아래에서 자신의 손해를 줄이고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행동하게 되었다.
물론 농가마다 사정은 천차만별이다. 고령의 1인 또는 2인 가구가 집앞의 작은 논에서 벼만 키우는 농가와, 최신 농학과 정보기술 등 첨단 지식으로 무장하고 야심차게 대규모로 스마트팜을 조성하여 다수의 이주노동자를 고용하는 청년 농가는 사실상 같은 산업에 종사한다고 보기가 어려울 정도다. 후자와 같은 농민에게 필요한 것이 금융 혜택이나 산학 연구 지원 같은 산업 정책이라면, 전자의 농민에게 더 필요한 것은 의료 지원과 같은 복지 정책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복잡하고 다양한 모습 그대로가 오늘날 우리의 농민과 농촌이며, 또 이것이 한 데 섞여 녹아들어 있는 것이 또 오늘날 우리의 밥상이다.
‘판타지 음식’의 이면에 가린 현실 속 음식
우리가 보지 않는, 또는 보려 하지 않는 사이에 농촌도 크게 변했고, 음식을 만들고 유통하는 양상도 크게 변했다. 방송에서는 미래 세계에서 날아온 것 같은 ‘식물공장’이며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는 스타 요리사의 유명 음식점들을 보여주지만, 현실 속 농가와 음식점이 모두 그렇게 될 수는 없다.
정작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농민의 식생활은 오히려 지속적으로 열악해지고 있다. 예전에 상상했던 ‘집에서 손수 만들어 광주리 가득 날라 온 새참으로 배를 채우는’ 농촌 풍경은 이제는 찾아보기 힘든 판타지에 가깝다. 무엇보다 농촌 인구가 크게 줄어들어 이제는 농촌에 새참을 만들 사람도, 만들 시간도 없다. 농촌에서도 배달음식이 일상이 되었고, 진하게 타서 얼음 넣은 믹스커피가 혈당을 올려주고 카페인을 채워주며 새참을 대신한다. 마을회관이 제구실을 하는 곳이라면 마을회관에 모여 함께 밥을 짓고 나누어 먹는 것이 그나마 제대로 끼니를 챙길 귀한 기회가 된다.
직접 뭔가를 만들어 먹거나 갖춰 먹는 것이 어려워지는 것은 도시도 마찬가지다. 각종 법제도의 개편에도 불구하고 1인 가구가 증가하면서 노동 시간은 길어지고, 장을 보고 재료를 손질해서 조리해 먹는다는 것은 쉽게 엄두를 내기 어려운 일이 되었다. 요리가 돈과 시간에 여유가 있는 사람들의 일종의 취미처럼 여겨지고 SNS의 자랑거리가 되어 가는 이면에서, 평균적인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평균적인 한 끼의 질은 점점 내려가고 있다.
밖에서 사 먹는다고 해도 사정이 크게 나아지지는 않는다. 음식업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규모의 경제를 기대하기 어려운 작은 식당들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작은 식당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많지 않다. 업주 자신의 노동력에 가치를 매기지 않거나, 더 오랜 시간 더 힘들게 일하거나, 저렴한 반제품 또는 완제품 구입을 늘리거나, 아예 대기업 본사와 프랜차이즈 계약을 맺는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대기업 본사는 제품을 가맹점주에게만 팔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에게 직접 팔 수도 있기에, 결국 반제품 또는 완제품 시장의 성장은 대기업이 주도하는 가정 간편식(HMR) 시장의 성장으로 이어질 수 있다. 최근 HMR을 데워 먹을 수 있도록 식탁을 갖춘 편의점들이 늘어나는 것은, 그곳 1인 가구들의 식생활이 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후라고 볼 수 있다.
쉬운 답은 없지만, 그것을 인정해야 시작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농민 사이의 격차는 커지고, 농촌이나 도시나 직접 만든 한 끼를 먹는 일은 점점 어려워지며, 우리에게 남은 것은 배달음식이나 간편식 제품을 사 먹는 것 정도다’라는 암울한 결론으로 치달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을 가능성을 함께 고민하기 위해 쓰는 글이니, 과연 이런 현실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보자.
첫째, ‘제대로 손수 만든 음식’이 귀중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집밥’을 절대적인 가치처럼 우상화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집밥의 신화화는 자칫 ‘어머니’의 전통적 역할을 그리워하면서 그 뒤에 깔린 가부장 이데올로기를 긍정하는 쪽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반드시 어머니가 밥을 짓고 된장찌개를 끓여 주셔야 집밥이 아니다. 아버지도, 아들도 손수 토스트라도 구우면 그것도 직접 만든 한 끼의 가치를 전할 수 있다. 또한 시간과 여건이 허락지 않아 집에서 음식을 만들기 어려운 이들도 많은데, 집밥만이 좋은 것이라고 강조하다 보면 이들에게 불필요한 도덕적 부채감만 심어줄 수 있다. 자기 여건에 맞게 각자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둘째, 농업 노동의 가치와 건강한 먹을거리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은 이제는 가정의 몫으로 넘길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챙겨 주어야 한다. 집밥 자체가 희귀해지는 시대이고, 심지어 사회경제적 여건에 따라 집밥의 질에 차이가 크다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미 많은 어린이들은 어린이집이나 학교의 급식을 통해 집에서 먹어보지 못한 다양한 음식들을 접하고 있다. 또한 앞서 썼듯 농촌에서도 고령의 농민들은 각 가정에서가 아니라 마을회관 같은 공동의 공간에서 식사를 나누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사회의 변화 방향을 따라 이런 공동 식사의 질을 높이고 이 공간을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현재 지자체마다 학교 급식 예산의 일정 부분을 친환경 농산물 구입에 사용하게 되어 있는데, 이 비중을 높이는 것도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에게 이로운 일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쉽고 명확한 한 가지의 답이 없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인정하는 데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농업과 식생활 문제는 오랜 역사를 통해 수많은 요인이 상호작용하여 구성된 것이므로 이를 한 방에 풀 수 있는 묘수 같은 것은 없다. 각자의 처지에 따라 수많은 답이 나올 수 있는데, 이 중 어느 것도 완전한 해답이 될 수 없겠지만, 동시에 어느 것도 ‘틀린’ 답은 아닐 것이다. 역사적으로 농農과 식食의 문제를 풀기 위해 유기농 운동, 자연농법 운동, 로컬푸드 운동, 생협 운동, 동물복지 운동, 채식 운동 등등 여러 선각자가 다방면으로 노력했다. 이 중에서 무엇이 최선의 운동 방향인가를 따지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일 것이다. 불완전해 보여도 각각의 답은 모두 의미가 있고, 무엇을 하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낫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결국 농업의 가치가 존중받고 농민이 대접받는 세상, 그리고 자연과 인간을 모두 살리는 건강한 먹을거리로 바른 음식을 나눌 수 있는 세상을 바랄 것이다. 당장 이룰 수 있는 꿈은 아니지만,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다른 수단을 택하는 사람들을 함께 안고 한 걸음씩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필자 김태호: 전북대학교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 조교수. 한국 근현대 과학기술사를 전공하여 ‘통일벼’ 개발과 보급 과정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근현대 한국 쌀의 사회사」(들녘, 2017) 등이 있으며, 현재 한국의 식품 산업 및 영양학과 과학기술의 역사적 관계를 연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