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라서, 참 좋습니다”

권혁기 농업회사법인 왕산종묘 대표

강원 강릉시 왕산면, 흰색 꽃이 만발한 감자밭에 선 권혁기 농업회사법인 왕산종묘 대표와 부인 조희주 씨.
강원 강릉시 왕산면, 흰색 꽃이 만발한 감자밭에 선 권혁기 농업회사법인 왕산종묘 대표와 부인 조희주 씨.

6월의 끝자락, 강원 강릉시 왕산면에는 감자꽃이 절정이었다. 누군가 꽃으로 수놓은 듯, 산자락이 온통 꽃으로 뒤덮였다. 권혁기 농업회사법인 왕산종묘 대표(58, 제28회 대산농촌문화상 농업경영 부문 수상자)는 하얀 꽃들이 지평선을 이루는 널따란 감자밭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감자꽃이 참 예쁘죠? 속이 하얀 감자 ‘단오’는 꽃도 흰색이에요. 컬러감자 ‘홍영’과 ‘자영’은 각각 분홍색, 자주색 꽃이 피고요. 감자꽃만 봐도 땅속에 어떤 감자가 자라는지 알 수 있어요.”
  감자 이야기를 하는 내내, 권혁기 대표의 눈이 빛났다. 부인 조희주 씨는 “남편은 자다가도 감자, 하면 벌떡 일어난다”며 웃었고, 권 대표는 “그만큼 감자가 재밌다”며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감자 속이 하얀 ‘단오’는 꽃도 흰색이다.
감자 속이 하얀 ‘단오’는 꽃도 흰색이다.

감자와 40년, 전문가가 되다
권혁기 대표는 40년간 감자와 함께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를 도와 주말마다 틈틈이 농사지은 것이 시작이었다.
  “어깨너머로 배운 농사는 한계가 있어요. 농사가 안되면 하늘 탓만 했지요. 새로운 농업을 위한 비전 제시, 이런 건 엄두도 못 냈어요.” 
  2009년, 권혁기 대표는 현장 경험을 뒷받침할 이론 공부를 시작했다. 아내와 함께 강원농업마이스터대학 감자학과에 지원해 생산부터 유통, 육종까지 치밀하게 배워나갔다. 그는 “부족했던 부분을 보완하면서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고 말했다.
  3년 뒤, 권혁기 대표는 농업회사법인 왕산종묘를 설립하고, 정부와 동일한 시스템을 구축하여 안정적인 씨감자 공급 체계를 갖추었다.
  정부 보급종(5가지) 외에도 농촌진흥청 고령지농업연구소가 개발한 ‘새봉’(2기작 품종), ‘홍영’, ‘자영’ 등 총 13가지 씨감자를 생산해 농가와 소비자의 선택 폭을 넓혔다.

육종을 위해 분리해놓은 감자꽃 수술.
육종을 위해 분리해놓은 감자꽃 수술.

  육종에 관심이 많았던 권혁기 대표는 보급종 ‘수미’를 대체할 국산 신품종을 개발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고, 농민으로서 ‘단오’, ‘왕산’, ‘백작’과 같은 우수한 신품종을 만들어냈다. 특히 ‘단오’를 찾는 사람들이 크게 늘어서, 올해 생산량은 이미 완판되었다.
  “수미는 미국에서 들어온 감자예요. 옛날에는 우리나라에서 수미가 잘 자랐는데, 지구온난화 때문에 그 기세가 많이 약해졌어요. 감자는 저온성 작물이라 고온과 가뭄을 겪으면 수확량이 확 떨어지거든요. 수미의 자리를 단오가 메우고 있어요. 단오는 뿌리가 튼튼하고, 가뭄에 강하고, 수확량이 많거든요. 물론 맛도 괜찮고요.”

‘단오’ 감자는 뿌리가 튼튼하고, 가뭄에 강하고, 수확량이 많아 농민들에게 인기가 좋다,

“정직하게 키운 국가대표 씨감자”
권혁기 대표는 “우리는 씨감자 품질에 자신 있다”고 말했다.
  “식용감자를 씨감자로 둔갑시켜서 파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지역에서는 정품 씨감자를 구하지 못해서 문제였고, 우리는 팔 곳이 마땅치 않아서 힘들었지요. 정부 보급종은 국립종자원을 통해 전국의 농업기술센터, 면사무소 등에 일괄적으로 공급이 되기 때문에 영업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지만, 개인 씨감자는 생산부터 유통까지 온전히 농민의 몫이거든요.”
  10여 년 전, 부인 조희주 씨는 남편과 함께 씨감자 70박스를 화물차에 싣고 무작정 경남으로 향했던 날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해발고도 700~800m에서 망실재배로 생산하는 무병씨감자.
해발고도 700~800m에서 망실재배로 생산하는 무병씨감자.

  “저희를 촌에서 온 사람 취급하면서 씨감자를 헐값에 가져갔어요. 사기 당한 거죠. 우리 부부는 감자 한 상자를 얼마에 팔아야 하는지도 몰랐어요. 손님이 깎아달라고 하면 그대로 깎아주고, 불쌍한 사람은 그냥 주기도 했어요. 얼마나 장사를 못 했으면, 아는 스님이 ‘법적으로 30%는 마진을 남겨도 된다’고 일러주기도 했어요.”
  권혁기 대표는 “그래도 이제는 진짜 고객만 남았다”며 웃었다. 정품 씨감자를 꾸준히 공급하며 쌓은 신뢰 덕분이다. 다양한 판매 전략을 세운 덕분에 농가뿐 아니라 일반 소비자의 수요도 늘었다.
  “텃밭 농민을 위한 ‘소포장 씨감자’를 팔아요. 4kg 한 봉지에 쪄먹는 감자 1종, 반찬용 감자 1종, 컬러감자 2종을 넣으니 반응이 아주 좋아요. 식용감자 같은 경우에 지난해 7월부터 GS리테일과 협약을 맺어서 365일 납품하고 있어요. 소비자에게는 3kg 단위로 나가는데, 품종별 추천 조리법을 넣어서 판매하려고 준비하고 있어요.”

‘씨감자 200년’의 꿈
“제 꿈은 ‘씨감자 200년’이에요. 저와 아이들이 100년을 채우고, 후손들이 이어받아 200년 넘게 씨감자 농사를 짓는 거죠.”
  왕산종묘는 가족 기업이다. 권혁기 대표의 딸 세휘 씨는 병해충과 조직배양을 담당하고, 아들 태연 씨는 식용감자 판매를 맡고 있다. 권 대표는 자녀에게 사업을 물려주고, 인생의 새로운 장을 펼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캡션
권혁기 대표와 딸 세휘 씨.

  “제가 감자 마이스터(농림축산식품부 지정), 감자 명인(농촌진흥청 지정)이 되고 농업계 최고의 상인 대산농촌문화상까지 받았어요. 감자 생산자 중에 이렇게 거창한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제가 유일해요. 이제는 나눠야죠. 재능 기부를 통해서 식량 작물을 기르는 농민들을 도우려고 해요.” 
  권혁기 대표는 씨감자를 키우는 농부로 40년을 살았다. 
  “다른 일을 해보자는 유혹도 많이 받았어요. 그래도 저는 감자를 가장 잘 알고, 제일 좋아해요. 이제는 현장 경험도 많이 쌓이고, 기술과 지식도 어느 정도 갖추게 되었고요. 물론 감자를 재배하기 좋은 환경에 사는 이유도 커요. 우리 지역에서 우리나라 씨감자 전체 공급량의 40% 정도가 나니까요.”
  권혁기 대표는 “주어진 조건에서 최선을 다하며 좋아하는 일에 몰두하다 보니, 어느새 이 자리에 와 있게 되었다”고 덧붙였다.

  이날, 오랜만에 찾아온 하지 장맛비에 감자밭이 촉촉하게 젖었다. 권혁기 대표는 “비가 내리지 않으면 큰일 날 뻔했는데, 덕분에 목축임을 했다”고 말했다. 춥고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감자지만, 흙을 깨우고 작물에 스며드는 빗방울의 역할이 중요하다. “감자 덕분에 너무 행복하다”며 환히 웃는 그가, 다른 농민들이 쑥쑥 클 수 있도록 돕는 단비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한다. 

글·사진 이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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