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짓기’는 하나의 주제로 여러 명의 필자가 집필한 에세이를 이어서 소개하는 코너로, 지난 호 구점숙 씨에 이어 강나루 씨가 ‘농촌에 관한 단상,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에 관하여 적은 글을 싣습니다. [편집자 주]
글·사진 강나루
보다 나은 일상을 위한 에너지는 무엇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일까. 생명력이 깃든 정신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나는 자주 생각한다. 자연스러운 삶에 대한 바람이 다른 무엇보다 커졌을 때 생활 터전을 섬으로 옮겨왔다. 채집의 계절에는 오름(산)으로 바당(바다)으로 야생고사리와 꿩마농(야생달래) 등을 만나러 다니고, 텃밭 살림에 가까워지고자 자연농을 실천하는 농부님을 소개받아 손을 돕는 농사 모임에 매주 빠짐없이 함께하면서 제주도 텃밭의 사계절을 익혔다. 나에게 자연은 잠시 멈추어 세상을 사유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촉매제 같다. 도시에서의 삶에 고민이 많았던 시절에 다큐멘터리 <자연농>과의 만남은 막연했던 생각의 정리를 도와줬고, 이후 자연농이라는 방식은 지향하는 인생철학이 되었다. 그렇게 나는 농촌과 도시 그 어디쯤인 제주에 정착을 했고, 사람의 인연이 참 신기하게도 이어져서 제주도에서 에너지를 연구하는 배우자를 만나 가정을 꾸리게 되었다.
집에서 짓는 요리를 좋아해 자연에서 온 계절의 재료로 소박하게 마주하는 한 끼는 우리 가족의 확실한 행복이다. 그래서 제주에서 자급을 위한 텃밭을 조금씩 일구다가, 또 어떤 해에는 나락 한 알 속에 담긴 우주가 궁금하여 또래들과 오름 자락에 모여 그야말로 야생에서 토종 밭벼 농사에 도전해 보기도 했다. 토종씨앗이라는 것은 나에게 언제나 커다란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그 씨앗들이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자랄지, 무슨 맛이 나는 어떤 열매가 달리게 될지, 씨앗이 품고 있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늘 궁금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전국여성농민회(이하 전여농) 제주도연합의 ‘토종추수한마당’에 가게 되었다. 그곳엔 다양한 토종씨앗 나눔뿐 아니라 토종 농산물을 가공한 ‘언니네텃밭’ 먹거리 판매와 토종콩두부 체험, Non-GMO 마늘고추장과 토종옥수수팝콘, 토종모빌 등 토종씨앗에 대한 내용으로 풍성했다. 하지만 꽤나 한산한 모습을 보며 어딘지 속상한 마음이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여성농민이 아녀도 농農의 가치를 공감하는 사람들이 다 함께 축제처럼 즐길 수 있지 않을까? 자연을 사랑하는 나와 같은 더 많은 이들의 씨앗 잔치가 된다면 좋을 텐데! 나는 그런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자연과 함께 토종텃밭을 일구다
그 때문일까. 토종씨앗을 위하여 뭐라도 힘을 보태고 싶다는 마음이 싹텄고, 그렇게 일종의 사명감을 품고 여성농민회의 일원이 되었다. 토종씨앗, 그 이후의 이야기가 담긴 다채로운 토종작물들을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데 작은 보탬이라도 되고 싶어서 그야말로 자급의 규모를 넘어선 토종텃밭을 가꾸기 시작했고, 주변 소농 언니들의 도움으로 씨앗 뿌릴 수 있는 밭은 계속 연결되었다. 그렇게 나는 마치 텃밭 유목민처럼 다양한 모양새의 땅을 토종텃밭으로 일궈갔다.
제주도 흙은 지역에 따라 차이가 큰데 땅의 성질에 맞는 작물을 심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다양한 토종씨앗을 직접 재배해 보니 그 작물을 심어 가꾸는 인간과의 궁합도 되게 중요하게 느껴진다. 나는 한 살이라도 젊을 때 하나의 씨앗이라도 더 심어 가꿔봐야 알 수 있다고 욕심을 내었다. 육체적으로 고된 건 말로 다 할 수 없었지만 자연과 씨앗이 품은 그 에너지를 온몸으로 담아내는 나의 정신은 온전한 기쁨으로 매일 벅차올랐다. 그렇게 나는 ‘제주도 토종씨앗 증식포전¹’까지 맡게 되면서 더욱 책임감을 갖고 점차 수십여 종류의 재래종 씨앗을 가꾸게 되었고, 그 작물들로 부지런히 요리하면서 골갱이(호미) 하나를 손에 들고 500평 되는 토종텃밭을 돌보았다. 의욕으로 앞섰던 나에겐 엄청난 규모였지만 농사로 치면 아주 작은 밭인 데다가 워낙 다양한 품종들이 있다 보니 그 어떤 과정에서도 기계의 힘을 빌려올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물론 어설프지만 농사도 자연농의 방식을 따르고 싶은 마음이 컸고, 더군다나 토종씨앗은 제초제나 화학농약을 사용하지 않고 생태적인 방식으로 가꿀 수 있다. 그저 정성과 품을 더 들이면 된다. 나는 비닐 멀칭도 하지 않고 주변 밭에서 구할 수 있는 보릿짚을 포대로 주워다 덮어주면서 작물의 성장에 효과적인 멀칭의 역할을 도와줬고, 집에서 가져온 음식 찌꺼기와 밭에서 나온 부산물 등은 쌀겨와 섞고 미생물과 시간의 도움을 받아서 퇴비로 만들어 줬다. 그렇게 늘 밭에서 온전한 나의 노동력을 쏟아 바치고, 집에서는 채종할 씨앗들과 함께 콩 골라내기라도 해야 하니 사실 바쁘기로는 도시보다 더할 만큼 쉴 틈이 없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어쩌면 내게는 실험과도 같았던 그때, 오늘도 참 좋았다고 나는 행복하다고 혼자서도 자주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했다. 그리고 그 경험의 순간들은 나의 삶을 꾸려가는 정신이자, 보다 나은 일상을 위한 영감으로 오롯이 남아있다.
‘지속 가능한 씨앗’으로 이어가는 미래
오래 이어져 온 토종씨앗에는 그 작물을 둘러싸고 식생활, 요리, 풍속, 토착 지식 등 다양한 문화적 기억이 포함될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사회문화적인 전통은 그 씨앗을 지켜온 사람들의 역사에서 비롯될 수 있는 것이다. 제주농업기술원의 지원으로 전여농 제주도연합에서 책 「삼춘들의 씨앗 주머니 속 이야기」를 출간했는데 나는 심층인터뷰어로서 어르신들을 뵙고 두루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것은 종자로서 유전자원을 지켜내는 중요성뿐 아니라 우리 일상에 보이지 않는 가치를 이어가고, 그것이 사라지지 않도록 기억하고 기록하는 매우 중요하고 의미 있는 작업이라는 것을 더 크게 깨달았다.
“시어머니께 배운 것이 제사 지낼 때 묵, 콩나물, 고사리는 자기 정성으로 지어야 한다는 거라… 우리 집안은 ‘8월배’로 콩나물도 하고 메주도 하는데 그게 제일 맛있는 콩이라 이어서 농사지었지.”
실제 씨앗 취재 중 만난 삼춘²들은 대부분 일흔, 여든을 넘겼는데 만나는 분들의 씨앗 이야기마다 자신의 역사는 물론이거니와 그 씨앗을 물려주신 당신의 씨앗과 집안 이야기를 빠뜨리지 않으셨다. 본래 토종씨앗은 다수확 품종보다 더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다. 수확량은 적고, 표준화되지 않는 작물인 데다가 재배도 전통적인 방식으로 하기 때문에 경제성을 고려한 생산 방식보다는 자급자족적 살림을 주목적으로 텃밭을 일구는 이들에 의하여 생활로서 보전되어져 왔다. 토종씨앗으로 재배한 작물은 저마다의 다양성과 고유한 특성이 그 작물로 만든 음식과 함께 대를 이어오기도 하고, 지역에 따라서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기도 해서 하나의 씨앗이 서너 개 이상의 이름을 갖고 있기도 하다. 그런 내용만으로도 토종씨앗은 풍부한 연구의 장으로서 우리가 이어가야 할 의미와 가치를 담은 폭넓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이제는 농촌의 공동체 문화마저 붕괴되어 가면서 토종씨앗은 마을의 공유자원으로 교류되기보다는 한 개인의 역할이 되어가고 있다. 그것은 곧 씨앗을 지켜온 사람들 생의 마침에 그 씨앗도 함께 지워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토종씨앗이 사라지는 것에 대하여 경각심을 갖는 사람들이 점차 늘고 있다고는 하지만 자본 중심의 농업 환경에서 종자권을 상실한 농부들은 씨앗 받는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 그래도 토종씨앗은 미래 종자의 귀중한 유전자원이 되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토종씨앗을 발굴하고 보존하려는 노력을 국가와 지자체에서도 멈추지 않을 것 같아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나는 우리 땅에 토착화되어 오래 이어져 온 다양한 재래종 씨앗들을 종자 산업의 영역인 종자 연구소나 저장소만이 아닌 ‘지속 가능한 씨앗(Sustainable Seeds)’으로서 우리의 일상에서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토종씨앗과 일상 에너지를 잇는 ‘씨앗매개자’
토종씨앗에 대한 다양한 경험의 밀도가 높아질수록 그것은 단순한 먹을거리 이상의 그 무엇이라는 의식이 강하게 남는다. 요즘은 토종텃밭을 일군다고 예전처럼 자신을 몰아붙이고, 체력을 온전히 쏟지는 못해도 토종씨앗을 지키기 위한 의지로 ‘언니네텃밭’ 공동체와 제주도 ‘자연 그대로 농민장터’에서 생산과 소비의 실천적 활동을 꾸준히 지속해 오고 있다. 동시에 지금 나의 현실에서 토종씨앗을 잇는 매개자의 역할은 무엇일까 늘 궁리한다. 토종씨앗에 대한 애정으로 창직을 한 셈이다. 그 계기로 지난 1월에는 ‘씨앗매개자’로서 ‘토종 식재료 워크숍’을 통해 ‘나루 씨네 가정요리’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그중 ‘씨앗감각-What’s my treasure?(나의 보물은 무엇일까?)’는 여러 종류의 토종콩에 대한 미각 경험을 시각화하는 작업이다. 이러한 활동의 결과로 워크숍 참여자는 마치 원석 같은 자유로운 형태로 각자의 ‘비정형 맛 도형’을 그려 보게 되는데 이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맛과 향의 일시적 감각을 더욱 적극적인 시각 영역의 안으로 들여와서 참여자에게 각인될 수 있도록 돕는다. 말하자면 흔히 ‘할머니들의 보물’이라 불리는 막연하고 거리감이 느껴졌던 토종씨앗에서 자신의 보물이 될 수 있는 어떤 것을 만들어냄으로 보다 실체적인 경험에 도달할 수 있도록 씨앗매개자가 돕는 것이다.
토종씨앗으로 가꿔온 나의 그 모든 순간에서 받은 영감과 다양한 실천적 현장 경험들을 이제는 모두의 일상으로 잇거나 때로 예술적 방식을 빌려서 표현한다. 나는 메타적 시점에서 의식을 둘러싼 인간의 모든 행위는 예술로 귀결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생태적인 인간의 사유 감각은 시대의 사회 변화를 가능케 하는 동력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토종씨앗에서 비롯될 수 있는 생명력과 삶의 에너지를 표출하는 담론으로써 일상의 씨앗들을 제안한다. 자연은 우리 각자에게 맞는 삶의 속도를 조절하고, 인생의 방향을 점검해 볼 수 있도록 누구에게나 기회를 준다. 그 자연 생명의 근본인 씨앗, 선조들의 지혜와 민족 생활의 기운이 깃든 다채로운 토종씨앗으로 비물질적 가치에 더 넓고 깊은 생태 문화적 유대감이 형성되기를 바란다. 시대 흐름에 정복되지 않는 그 씨앗들이 미래 세대의 대안적 비전으로 촉발되기를 기대한다. 결국 그것은 토종씨앗으로 이어갈 수 있는 우리들의 오래된 미래이자 지구에 지속 가능한 삶의 방식이 될 것이다.
1) 여러 해 동안 반복적 씨앗 채종을 통해 토종씨앗을 증식하고, 일정량 확보된 토종씨앗을 안정적으로 공급하고 확산하기 위한 목적으로 운영하는 밭.
2) 제주 방언으로 남녀를 가리지 않고 자기보다 연장자 전체에 쓸 수 있는 호칭.
※ 필자 강나루: 씨앗매개자.
생명 에너지를 탐구하는 네 번의 개인전과 다수의 기획전에 참여했으며, 토종씨앗을 이어가는 예술가 강나루의 에세이 「일상의 씨앗들」을 크라우드 펀딩으로 출간했다. 현재 전여농 제주도연합 조천읍지회 사무국장과 언니네텃밭 장터사무장을 맡아 지역의 공동체 활동에 힘을 보태고 있다. jejunalu@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