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의 봄

글·사진 하상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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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초, 제주의 바람엔 찬 기운이 여전했다. 역력한 겨울의 틈 사이로 다음 계절을 짐작게 하는 징후들이 배어나고 있었다. 이맘때 섬 동쪽 성산읍의 들녘엔 월동무가 지천이다. 수확이 늦은 무와 때 이른 유채가 혼재하는 때다. 노련한 농부는 알고 있다. 검정 돌담 너머로 드문드문 유채꽃이 피어 고개를 내밀 때쯤, 무의 알이 차오른다는 것을. 겨울을 거친 제주의 무에는 혹독한 시간을 견뎌낸 존재들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오래 버틴 만큼 더 단단하고, 더 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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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감류晩柑類는 ‘늦은 귤’이라는 이름처럼 늦겨울까지 수확이 이어진다. 그중에서도 천혜향은 수확 시기가 가장 늦다. “꽃 피는 시기가 다 다르듯, 과일도 고유한 수확 시기가 있는 거예요. 조생(감귤), 노지(감귤), 한라봉, 레드향 어느 하나 익는 때가 같은 것이 없어요. 자연의 순리 아닐까요?” 성산읍 수산리 농부 오창현 씨의 설명이다. 토요일 아침 그의 천혜향 비닐하우스엔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10여 명의 대가족이 함께 모여 수확의 기쁨을 나누고 있었다. 가위로 꼭지를 자를 때마다 ‘똑’ 소리가 났다. 저마다 입가에 상큼한 미소가 번졌다. 겨울과 봄의 경계에서 만나는 천혜향은 특별한 산미가 일품이다. 한 알 입에 넣을 때마다 자연스레 눈이 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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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파종을 앞둔 농부의 시선은 다시 씨앗으로 향한다. 그들은 한 알의 씨앗에서 대지 위로 넓게 펼쳐질 작물의 푸르름을 본다. ‘지난해 받아둔 씨앗이 올해 다시 흙으로 돌아가 열매를 맺으며 순환 고리를 완성한다. 생명이 있는 모든 먹거리는 한 알 씨앗에서 시작된다.’ 이 단순하고 오래된 지혜를 알고 나면 토종씨앗에서 봄날의 농촌 풍경을 상상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서리태, 결명자, 쥐이빨옥수수, 푸른독새기콩, 두불콩, 우도땅콩. 토종씨앗들을 온실 속 면포 위에 흩뿌리고 그 모습을 기록했다. 이 씨앗들이 농민과 자연을 만나 빚어낼 풍경을 떠올리는 건, 보는 이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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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상윤※ 필자 하상윤: 세계일보 사진부 기자.
대산농업전문언론장학생 출신으로 2015년 겨울부터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보고, 듣고, 나누는 일에 집중하고 있다. 제55회 한국보도사진전에서 제주의 난개발을 다룬 기획물 ‘잘려나간 제주의 생명…개발이 행복을 가져다줄까’로 최우수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