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양승룡
농업과 농촌의 현실
대한민국의 향후 5년을 책임질 새 대통령이 지난 3월, 선출됐다. 대통령 당선자는 “농업·어업·축산 정책과 그 예산을 직접 확실히 챙기겠다”고 약속했다. 이러한 약속에도 불구하고, 새 정부가 농촌과 농업, 그리고 농민의 삶을 바꿀 수 있을지 믿기 어렵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대통령 후보들의 약속이 제대로 실천되지 않았던 사례가 그만큼 많았기 때문이다. 2022년 2월 농민단체가 주관한 대선 농정 공약 발표회에서 후보들이 당선 후 공약을 지킨다는 서명식을 한 사실이 그간 농정 공약의 무게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과거 이명박 정부는 ‘돈 버는 농업’을 구호로 농업경쟁력 강화와 해외시장 개척, 농업 기업화 등을 농정 기조로 삼았고, 박근혜 정부는 ‘행복한 농어촌’을 구호로 농민소득 제고, 농촌복지 확대, 농업경쟁력 확보를 3대 핵심축으로 농정을 펼쳤지만, 9년간 농업예산은 축소되고 우리 농업은 최악의 시기를 겪었다.
그러나 뒤이어 등장한 문재인 정부 농정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농업예산은 계속 쪼그라들고, 농업과 농촌 현실은 더욱 피폐해졌다. ‘농민이 행복한 국민의 농업’을 만들겠다던 문재인 정부의 농업예산 비중은 임기 내내 하락하여 2022년에는 전체 예산의 2.8%까지 하락했다. 2020년 농가 인구도 5년 만에 25만 명, 매년 2%씩 감소하고 있다.
1995년 WTO 체제 출범 이후 역대 정권은 우리 농업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러나 숫자적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채우기에만 급급했던 농업 정책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농업소득은 끝없이 하락하고 농촌은 공동화되어 가고 있다.
농정의 결과는 소득으로 나타난다. 우리 농민들은 아무리 열심히 농사지어도 월평균 100만 원에도 미치지 못하는 농업소득에 좌절하고 있다. 이는 2022년 최저임금을 월 소득으로 환산한 191만 원의 절반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저조한 농업소득은 정부 보조금에도 불구하고 농업 쇠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1년 동안 피땀 흘려 벌어들인 소득이 낮다는 것은 농민의 자존감을 해치고 청년 농업인 유입에 결정적 장애가 된다. 농업소득을 높이기 위해 농지를 약탈적으로 경작할 수밖에 없고, 이는 생태환경이나 먹거리 안전을 위협하는 주원인이 된다. 지속 가능한 농업과 살고 싶은 농촌을 위해서는 농업소득의 반전이 농정의 최우선 과제가 되어야 한다.
새 정부의 농정 공약
차기 대통령 당선자는 대선 전 ‘튼튼한 농업, 활기찬 농촌, 잘사는 농민’을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우며 농업 직불금을 현재 2.4조 원의 2배인 5조 원으로 확충하겠다는 공약을 제시했다. 농지이양은퇴 직불금 월 50만 원 지원과 비료 가격 인상 차액 지원, 청년농 3만 명 육성을 위해 공공농지·주택을 우선 배정하고, 농촌 마을주치의제도 도입, 이동형 방문진료 확대와 농수산물 시장 디지털화 등을 내세웠다.
그러나 당선자의 농정 공약 중 가시적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직불금 규모를 확충하는 것 정도이다. 농업지원 예산 증액은 농촌 인구가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규모에 비하면 여전히 아쉽지만, 하락 추세를 멈춰 세운다는 점에서 환영할 만하다. 이마저도 농업의 경쟁력 제고나 농업소득 증가를 위한 정책과는 거리가 멀다. 공약이 실제 제도와 정책이 되기 위해서는 좀 더 세밀히 보완되고 수정되어야 한다.
우선 대통령이나 정부의 의지로 할 수 있는 정책과 시장 기능에 의존해야 하는 정책의 구분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농업예산 확대는 대통령의 의지로 가능하다. 그러나 청년농 3만 명 육성과 같은 공약은 정부가 이루고 싶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간의 경험이 말해주듯 이는 소득과 농촌 거주 여건 등 여러 사안이 충족되어야 가능한 문제인 것이다. 농업소득이 높아도 교육, 의료, 문화 등 정주 여건이 열악하면 떠나는 주민의 발길을 붙잡을 수 없다. 이는 농정으로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국가경영 철학에 바탕을 둔 전방위적 노력이 요구되는 어려운 과제이다. 지난 20년간 정부의 노력에도 이런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이유에 대한 깊은 성찰과 반성이 필요하다.
새 정부의 과제 – 농업의 공익적 가치를 최대화해야
이제 얼마 후면 새 정부가 들어선다. 농업을 회생시키기 위한 새 정부의 과제는 매우 막중하고도 지난해 보인다.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는 농업, 농촌을 위한 새로운 농정의 틀을 마련하는 것이다. 언젠가 이루어질 통일 한국의 식량 문제와 지속 가능한 농업의 미래를 위한 마스터플랜이 필요하다. 작금의 농정은 지난 30년간 WTO나 FTA 시장 개방을 할 때마다 땜질식, 임시방편식으로 덧칠하고 꿰매 합리성과 일관성이 부족하다. 이런 농정으로는 벼랑 끝에 놓인 우리 농업, 농촌을 회생시킬 수 없다.
농정의 마스터플랜은 농업의 공익적 가치를 최대화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이를 위해 농촌 정책이 농정의 최상위에 위치해야 할 것이다. 농정은 궁극적으로 농촌을 어떻게 유지, 발전시킬 것인가에 맞춰야 하고, 소득 정책이나 농업 정책은 이를 위한 실천 정책이 돼야 한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사는 농촌’이라는 인식이 국정 기조에 반영되어야 한다. 농업소득이 아무리 높아도 사람이 살지 않는 농촌은 농업의 공익적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문재인 정부에서 도입한 공익형 직불제는 여전히 불완전하고 보완해야 할 여지가 많다. 공익형 직불제의 취지에 맞게 친환경 농업이나 경관 가치 제고를 위한 선택형 직불을 확대하고 보상을 강화하여 농업의 공익적 가치를 실질적으로 높일 수 있어야 한다. 농경지 위에 전력생산시설을 설치해 추가 소득을 얻겠다는 영농형 태양광 사업도 탁상공론식의 위험한 정책이다. 넓은 농지나 마을 한가운데 듬성듬성 설치된 태양광 시설이나 풍력발전기는 농산촌의 어메니티amenity를 훼손해 농업의 공익적 가치를 크게 저하시킨다. 이는 대만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농지 가격의 하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 발전 사업에서 얻는 소득은 발전 생산성의 지속적 저하와 전기 가격의 높은 변동성으로 안정적인 수입이 되기도 어렵다고 본다. 무엇보다 이 정책은 지역사회에 갈등과 분열을 일으키고 오히려 농촌주민들의 삶의 만족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
농업의 헌법 가치화
새 정부가 약속한 정치개혁을 농업의 정체성과 의미를 확립할 수 있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국가 운영의 근간인 헌법에 농업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지속 가능한 농업을 위한 국가적 노력을 명시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독일이나 스위스 등 선진국은 농업이 국가경영의 기초라는 철학을 헌법에 명문화하고 있다. 선진국 대열에 진입한 한국도 국가가 나서 농업과 농촌이라는 기본자산을 잘 유지해야 함을 헌법정신에 담아야 한다.
농업은 농민과 농촌 유지를 위한 산업적 기반이다. 행복한 농민을 위한 살 만한 농촌이 되어야 하고, 이를 위한 소득 기반으로서의 농업의 지속 가능성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필요하다. 지난 60년간 대한민국의 경제발전 과정에서 소외되고 일방적으로 이용당해온 농업과 농촌 문제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농정을 기대한다.
※ 필자 양승룡: 고려대학교 식품자원경제학과 교수.
고려대학교 농업경제학과 입학 후 45년째 농업 문제에 천착하고 있다. 미국 퍼듀Purdue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고려대학교 식품자원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농산물 가격, 유통, 무역 현안을 주로 연구하고 있다. 「농업, 거의 모든 것의 역사」(2011), 「양승룡 교수의 희망농업 콘서트」(2016), 「농산물 유통의 길을 묻다」(2018) 등 저서와 130여 편의 연구논문이 있다. 그러나 농업 문제는 여전히 어려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