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진 원혜덕
‘이어짓기’는 하나의 주제로 여러 명의 필자가 집필한 에세이를 이어서 소개하는 코너로, 원혜덕 씨가 새로운 주제인 ‘다채롭게 즐기는 농(農)’에 관하여 쓴 글을 싣습니다. [편집자주]
무엇을 말하고자 할 때 나는 먼저 그 근본을 들여다본다.
농(農)을 영위하며 갖는 다채로운 즐거움의 근간은 무엇일까. 자신이 하는 일이 농업과 관련하여 어느 위치에 있는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직접 농사를 짓는 경우도 있고 농업과 관련된 일을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나는 농사를 지어서 농장을 꾸려 가고 있으므로 농사짓는 일이 그 중심에 있다. 농사일 자체가 모든 것의 기본이 된다. 그렇기에 농사일이 우선 즐거워야 한다.
농사일의 힘듦과 즐거움
내가 유기농업을 알게 된 것은 49년 전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농약과 화학비료 없이는 농사지을 수 없다고 다들 믿고 있을 때였다. 내가 자란 부천에 있는 우리 집에는 마당에 큰 사탕단풍 나무 두 그루가 있었다. 여름이면 그 두 나무 사이 아래에서 점심을 먹었다. 아버지1)가 공동체로 꾸려가던 우리 집이었기에 식구가 많았다. 나무 아래 큰 멍석을 두 개 펴고 식구들이 둘러앉아 밥을 먹을 수 있는 큰 나무였다.
여름이 와서 그 나무들에 푸른 잎이 무성해지면 어느새 송충이가 나타나서 순식간에 나뭇잎을 다 갉아 먹는다. 가끔 나무에서 떨어져서 땅바닥을 기어다니는 것을 보기도 했다. 송충이들이 나뭇잎을 다 갉아 먹기 전에 아버지는 큰 통에 물을 담아 농약을 풀어 등에 짊어지고 분무기로 뿌렸다. 키가 큰 사탕단풍 나무를 올려다보고 있으면, 뿌연 물줄기가 하늘로 뻗치다가 아래로 떨어졌다. 아버지는 그 농약물을 흠뻑 맞았고, 우리는 그 물을 맞지 않으려고 멀찌감치 떨어져서 쳐다보곤 했다. 해롭다는 생각은 아버지도, 우리도 하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던 아버지가 유기농업을 알게 되었고, 우리나라 최초로 유기농업을 시작했다. 1976년 이른 봄이었다.
그때 알게 된 유기농업은 인간과 환경에 해로운 농약과 제초제, 그리고 화학비료를 쓰지 않는다는 것이 중심 내용이었다. 쉬운 일은 결코 아니다. 그 후 정부가 법으로 정한 유기농업의 기준도 같다. 그때 나는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공동체 식구였던 (미래의) 나의 남편은 유기농업을 알게 되자 아버지와 함께 바로 유기농업을 시작했다. 아버지는 젊은 사람이 의욕을 갖고 적극적으로 나서자 당시 도시로 변해가던 부천을 떠나 오지였던 양주 시골로 농장을 옮기기로 결정했다. 새로 농장으로 자리 잡은 양주는 오지에 가까운 농촌이었다. 30년을 농사짓고 살던 양주 농장에 지금은 신도시가 들어섰다. 신도시가 생길 무렵 남편과 나는 지금 살고 있는 포천 농장으로 터전을 옮겼다. 옮겼다기보다는 공동체에서 독립하여 우리의 농장을 시작한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유기농업은 농약이나 제초제, 화학비료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진정한 유기농업은 농장을 하나의 유기체로 보고 재생과 순환이 가능한 형태로 꾸려간다. 살아있는 유기체와 마찬가지로 농장 안에서 모든 활동이 이루어져야 한다. 밭에 쓰는 퇴비도 농장에서 만들어내고, 농장 안에서 나오는 부산물도 외부에 내다 버리지 않고 여기저기 쓰는데, 이렇게 하려면 많은 노력이 든다. 퇴비를 얻기 위해 가축도 길러야 한다. 소와 염소, 닭 등을 기르고 그것들로부터 분뇨를 얻어 퇴비를 만든다. 이 일은 대부분 남편이 하지만 그다음에 작물을 심고 기르는 일은 나도 함께 한다.
밭에 뿌린 씨가 땅을 뚫고 나오는 것을 보면 경이롭다. 밀씨에 싹이 터서 땅 위로 솟아 나오거나 까만 점 같은 당근씨가 바늘보다도 가는 싹을 땅 위로 밀어 올리는 모습을 보면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작물이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는 것을 보는 기쁨도 크다.
봄이 되면 동물들이 새끼를 낳는다. 갓 태어난 새 생명을 마주하는 일, 그 어린 것들이 무럭무럭 자라는 것을 보면 마음이 한없이 따뜻해진다. 붕붕 날아다니면서 꿀을 가득 진 벌이 제 집으로 기어들어 가는 것을 보는 것도 재미있다. 남편은 벌통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드나드는 벌을 한없이 바라보기도 한다. 작물을 수확할 때의 흐뭇함은 기를 때의 수고를 다 덮고도 남는다.
농사일의 힘듦과 즐거움은 동전(손바닥)의 앞뒤와도 같아서 어느 한쪽 없이 다른 한쪽이 존재할 수는 없다. 생업인 농사에 이렇듯 여러 가지 즐거움이 있다는 것은 특별한 선물과 같다.
1) 풀무원농장 설립자 원경선 원장. [편집자 주]
농장을 찾아오는 사람들
농사짓는 일 말고도 우리에게는 또 다른 일이 있다. 농장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맞이하는 일이다. 이른 봄에 시작하여 늦가을에 가을걷이를 마칠 때까지 농사일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가운데 손님을 맞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농장을 찾아오는 사람들도 특별한 마음을 갖고 오는 것임을 나는 안다. 우리가 농사지은 쌀로 현미밥을 짓고, 농사지은 콩으로 쑨 메주로 만든 된장으로 국을 끓이고, 그 국에는 철마다 나오는 채소를 듬뿍 넣고, 신선한 푸성귀를 뜯어 상에 올리고 나서 손님들이 맛있게 먹는 것을 보는 즐거움도 크다. “손님이 오지 않는 집은 천사도 오지 않는다”라는 서양 속담에서 보듯이 집에 오는 손님을 맞는 일은 수고보다 더 큰 기쁨이 있다.
농장에 다녀간 사람들은 어른들과 아이들로 나눠진다.
우선 어른들 이야기부터 하자면, 그들은 우리 농장의 일상을 함께 느끼고 싶어서 찾아온다. 2024년 다녀간 이들 중에 두 팀을 기억한다. 4월에 다녀간 ‘흥부기행단’과 11월에 다녀간 ‘시민언론 민들레’다. 두 팀 다 농장에 와서 하룻밤을 자고 갔다. 우리가 농사일에 바빠서 하룻밤 머무는 것을 다 승낙하지 못하는데, 이들은 원하는 대로 하룻밤 자고 가라고 했다. 둘 다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모임이다.
흥부기행단은 지금 우리의 삶을 위협하는 환경 재해, 평화의 위기, 경제적 양극화 등을 해결하기 위해서 흥부의 이타주의가 꼭 필요하다며 ‘이기’가 아닌 ‘이타’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시민언론 민들레는 독립언론을 통해 세상을 바꾸고 싶어 하는 사람 들의 모임이다. 이들은 우리 농장에서 출범 2주년 워크숍을 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떠나면서 이런 환대는 정말 오랜만이라고 말했다. 그 사람만이 아니라 찾아오는 사람들이 다 그리 말한다. 특별히 한 것도 없는데 왜 그리 말하는가 생각하니, 자연 속에서 농사짓는 농장에 머무는 자체가 큰 환대로 느껴졌을 것이리라 싶다. 자연과 더불어 살며 먹을거리를 생산해내는 농장은 사람의 마음을 편하고 따뜻하게 하는 그 무언가가 있는 것이 틀림없다. 이렇듯 사람들을 맞이하고 생각을 나누는 일이 어찌 즐겁지 아니하랴.
미래세대와 나누는 생명의 소중함
그다음은 학생들이다. 우리 농장에 와서 농사 실습을 하는 학교로는 우선 충남 홍성군에 있는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가 있다. 이 학교에서는 내가 어릴 적부터 학생들이 아버지 농장으로 농사 실습을 왔다. 그 인연이 그루터기가 되어 우리에게 이어졌다. 이 학교 학생들은 2학년 봄에 2주간 와서 농사 실습을 한다. 학교에서 농사 실습을 많이 하고 있지만, 2주간 같이 일하고 나면 일하는 법도 제대로 배웠고 농업이 보람 있는 일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노라고 말한다.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와 더불어 우리 농장에 와서 농사 실습을 하는 학교는 발도르프학교 학생들이다. 우리는 생명역동농업(Bio Dynamic Agriculture)을 20년 전에 받아들여 실행하고 있다. 가장 우수한 농산물을 길러낼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시작한 농법인데 대안학교인 발도르프학교와 뿌리가 같다. 생명역동농업을 창시한 루돌프 슈타이너가 발도르프교육도 시작했기 때문이다.
발도르프학교 과정에는 농업이 필수로 들어있다. 이 학교 아이들이 우리 농장에 농사 실습을 하러 온다. 초등학생들도 하루 다녀가지만, 중학교 3학년이 되면 우리 농장에 와서 2주일 동안 농사일을 한다. 이 학생들이 오는 6월은 이른 봄에 심은 작물이 한창 자라나는 더운 때다. 날이 덥기도 하고 농작물을 조심스레 다뤄야 하니, 일하다가 슬쩍 달아나는 아이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참고 맡겨진 일을 해낸다.
작물을 거의 길러보지 않은 아이들이 제대로 일을 할 수는 없다. 그래도 일에 집중하다 보면 일하는 요령을 터득하고 끈기가 생겨서, 한 단락 일을 마치고 나면 힘든 일을 해낸 뿌듯함을 보인다. 아이들은 농장에 머물면서 개, 닭, 염소, 소들을 질리지도 않고 한없이 바라보거나 쓰다듬으며 같이 논다. 아이들은 자연 속에서 일도 해보고 자연을 느낄 기회가 있어야 한다. 이 아이들의 생각과 마음이 성장하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은 우리가 농사짓지 않으면 경험할 수 없는 일이다.
어느 해인가 발도르프학교 중학교 1학년들이 와서 3일간 머문 적이 있다. 별자리를 공부하는 학년이라 밤에 별을 보겠다고 왔지만, 데리고 온 담임교사는 아이들이 농사일도 많이 해보았으면 했다. 마지막 날, 남편은 풀을 베어 아이들과 함께 경운기에 싣고 소 집으로 데리고 갔다. 아이들은 소 집 안에 들어가서 직접 풀을 주고 싶다고 했다. 남편이 소 집 문을 열어주니 아이들은 풀을 한 아름씩 안고 들어가 소들 앞에 놓아주었다. 소 집을 나오기 싫어했다. 소들이 풀을 먹는 것을 바라보거나 소 주변을 빙빙 돌면서 신기해했다. 소가 다 뿔이 다르게 생겼다느니, 어떤 소는 자기 앞에 있는 풀은 놔두고 다른 녀석의 풀을 뺏어 먹는다고 내게 이르기도 했다.
이 아이들은 덩치가 커다란 소를 보고 예쁘다고 했다. 그러다 문득 한 아이가 놀라 물었다. “이 소가 우리가 먹는 소고기예요?” “그럼” 했더니 깜짝 놀라며 “이렇게 예쁜 소를 우리가 먹어요?” 했다. 다른 아이들도 놀란 기색을 보였다. 자기가 먹는 소고기가 눈앞에 살아있는 사랑스러운 소라는 것에 충격을 받은 듯했다. 조금 미안했다. 이 아이들은 사람이 살아가려면 다른 생명을 먹어야 한다는 엄중함을 결국 깨달았을 것이다. 생명의 소중함, 그 생명의 희생 위에 인간이 살 수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아이들은 집에 돌아가 부모에게 자기의 느낌을 이야기했고, 부모로부터 그 말을 들은 담임교사가 내게 전해주었다.
남편과 내가 함께 짓는 농사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고, 그 안에서 즐거움과 보람을 느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와 더불어 생각이 같은 사람들을 우리 농장에 맞아들여 함께하는 시간들 또한 기쁨과 유대감을 준다. 이에서 무엇을 더 바라랴.
필자 원혜덕: 평화나무농장 농부
부천에서 여고 교사로 일하다가 결혼 후 포천에서 남편 김준권 대표(제25회 대산농촌상 수상자)와 함께 평화나무농장을 꾸려가고 있다. 유기농업의 최고봉으로 일컬어지는 생명역동농법으로 농사짓고 있으며, SNS를 통해 CSA(Community Supported Agriculture)로 소비자와 협력하고 연대하고 있다. 평화나무농장을 젊은 사람들의 교육장으로 열어놓은 일 또한 보람을 느끼고 있다. 《한겨레》와 《한국농정신문》 칼럼의 고정필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