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오내원
피할 수 없는 흐름, 무역자유화
코로나19의 확산과 미국·중국 무역 갈등의 격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의 영향으로 보호무역주의가 팽배하면서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 세계 최대의 메가 FTA인 RCEP(역내 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에 우리나라가 가입한 것은 이러한 파고를 극복하는 새로운 성장 동력이 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무역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의 입장에서 안정적인 무역과 투자 질서가 확립되는 것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정부는 2022년 4월에 또 다른 메가 FTA인 CPTPP(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 가입을 신청할 예정이라고 발표하여 FTA 중심의 경제 네트워크 확산 의지를 표명하였다.
메가 FTA가 우리 경제에 기회요인이 될 수 있다는 낙관적 기대 속에서도 국제경쟁력이 약한 산업, 특히 농업 부문은 수입증대로 인한 피해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과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등 회원국 중에 농업강국이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전의 양국 간 FTA와 달리 메가 FTA는 관세의 대폭 인하와 철폐를 통한 완전한 무역자유화를 지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환경, 동식물검역 표준화, 노동권과 고용 관행, 지적재산권 등에 관한 높은 수준의 규범을 가지고 있어 무역뿐만 아니라 국내 농업정책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2월에 발효된 RCEP은 아세안(ASEAN, 동남아시아국가연합) 10개국과 한국, 중국, 일본, 호주, 뉴질랜드 등 총 15개국이 참여하고 있다. 정부는 RCEP 가입에 따른 농업 부문 피해가 연평균 77억 원으로 그렇게 크지 않을 것이라 전망하고 있다.¹ 민감 품목인 쌀, 고추, 마늘, 양파 등을 개방에서 제외하였고, 처음 FTA를 맺게 되는 일본에 대해서도 농산물 개방 폭이 크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세안 국가의 열대과일과 중국의 녹용, 일본의 주류와 절화류가 추가로 개방되어 품목별로는 심각한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 이 외에도 누적 원산지 제도가 도입되어 농식품의 중간 투입재로 사용되는 국산 농산물이 협정국의 값싼 농산물로 교체되는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
가입 신청 예정인 CPTPP는 농업에 훨씬 큰 피해를 가져올 것으로 보인다. CPTPP는 미국의 이탈 후 일본이 주도하여 체결한 자유무역협정으로, 새로 가입하기 위해서는 기존 회원국과의 개별 협상을 통해 전체 회원국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특히 호주와 뉴질랜드, 캐나다가 쇠고기와 낙농품에 대해 추가 개방을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 뿐만 아니라 동식물 검역에서 질병이 발생한 ‘국가’나 ‘지역’이 아닌 좁은 범위의 ‘구획(농장)’ 단위로 수입규제 조치를 적용해야 하므로(SPS 조항), 수입확대로 인한 피해뿐만 아니라 국민 건강상의 문제도 일으킬 수 있다.
농업 부문 관련자들은 피해를 우려해 메가 FTA 가입을 반대해왔지만, 정부는 무역자유화 협상을 계속할 것으로 보인다. 자동차, 반도체 등 주력 수출산업의 경쟁국이 맺은 FTA에 참여하지 않으면 수출경쟁력이 떨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메가 FTA 가입 시 발생이 예상되는 국내 농업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협상 대책과 국내 대책을 마련하는 데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본고에서는 협상 대책은 다루지 않고 국내 대책 방향에 집중하고자 한다.
지속 가능성의 핵심 요소 – 경영 안정, 생산성 향상, 공익적 기능 제고
정부의 FTA 국내 대책은 농가에 대한 직접피해 보전과 경쟁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구조정책으로 구분되는데, 지금까지는 농업인의 소득을 보전하고 최소한의 농업경쟁력을 유지하는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두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지속적인 개방 확대로 농업인의 피해는 점점 커지고 있는 반면, 농업 인력의 고령화로 구조개선을 통한 생산성 향상은 어려워지고 있다. 현행 정책의 효과를 평가하고 국내외 여건 변화를 감안한 새로운 정책 수단의 모색이 필요한 때다.
구체적인 정책 과제를 논의하기 전에 변화하는 미래 속에서 지향해야 할 농업의 비전과 농정의 역할을 간략하게 살펴보자. 근래에는 농업의 비전을 ‘지속 가능한 농업’으로 보는 견해가 많은데, 지속 가능성의 핵심 요소는 농업인의 소득과 경영 안정, 생산성 향상, 공익적 기능 제고라고 할 수 있다. 과거에는 소득과 생산성을 주로 고려하였다면, 갈수록 농업의 공익적 기능이 중요하게 인식되고 있다. 이들 세 요소의 가치 지향이 서로 충돌하는 측면이 없지 않지만 서로 연계되어 농업의 지속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예를 들어 환경보전과 연계한 직접지불제는 공익적 기능을 창출하는 것이 주목적이지만, 농업인의 추가 활동을 유도하여 소득을 높이게 된다. 생산물은 시장에서 직접지불금 만큼 가격경쟁력을 높일 수 있고 장기적으로는 유능한 인력을 흡수할 수 있는 산업 여건을 조성하게 된다. 이처럼 개별 정책의 목적은 하나이지만, 사회가 추구하는 가치를 어떻게 담을 것인가에 따라 구체적인 실행방안은 다르게 설계할 수 있다.
공익직접지불제 확대하고 경영불안정 대책 세워야
FTA 국내 대책의 핵심인 피해보전직불은 협정 체결국에서 수입이 증가하여 해당 품목의 가격이 하락하였을 때 그 일부를 보전해주는 제도이다. 지원의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FTA 체결이 누적되어 다수 품목의 개방이 확대되면서 전체 농업의 수익성이 악화되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따라서 직접 수입이 증가한 품목에 대한 한시적 피해보전직불이 아니라 전체 농업경영 안정을 위한 정책에 대한 요구가 커지고 있다. 더구나 코로나19에 따른 일부 품목의 소비 단절과 외국인노동자 공급 감소, 빈발한 이상기후에 따른 생산 변동, 국제 정치 상황에 따른 농산물과 에너지 수급 혼란 등 농업경영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 다양해지고 있어, 불안정 원인별 대책보다는 농업경영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정책 전환을 준비해야 할 시점이다.
쌀 농업소득 보전을 중심으로 해 온 직접지불제는 2020년에 경종작물 전체를 대상으로 한 공익직접지불제로 개편되었지만 아쉬운 점이 적지 않다. 확보한 예산이 2.4조 원으로 5년간 동결된 것도 당초 기대에 못 미치지만,² 직접지불제 확대에 반드시 필요한 사회적 공감대 형성을 위한 장치가 부족한 것이 더 큰 문제다. 기후위기에 대응하고 생태환경을 개선하며, 안전한 식품을 공급할 수 있는 여러 형태의 탄소저감농업, 정밀농업, 유기농업, 무항생제축산, 경축순환농업을 지원하는 선택형 직접지불제를 적극적으로 발굴하여야 한다. 새로운 농법의 도입은 전문적 기술 개발도 중요하지만, 지역의 활동가와 리더를 중심으로 마을 단위의 계획을 세우고 공동으로 실천하는 방식이 효과적이라 생각된다. 환경보전과 같은 공익기능은 지역 수준에서 어느 정도 집적되어야 효과가 발생하며, 고령농을 포함한 다수의 참여를 쉽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농업인들이 가장 심각한 경영 애로로 꼽는 가격변동에 대한 대책도 강구될 필요가 있다. 시장격리와 같은 정부의 직접 개입은 시장을 왜곡할 수 있으므로 쌀을 제외하고는 이를 최소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렇다고 농업인의 주도적인 협동과 수급조절을 통해 가격을 안정시키기에는 생산자단체나 의무자조금의 역량이 충분하지 못하므로 별도의 보완 대책이 필요하다.
가격하락에 대한 사후 대책으로 그동안 농업인소득안정계정, 농업수입收入보장보험, 품목별가격변동직불제 등이 논의됐지만 각 방안에 장단점이 있어 결론을 내지 못하였다. 필자의 견해로는 일정 규모 이상이거나 전문화된 농가는 품목별 농업수입보험에 가입하여 위험을 해소하도록 하고, 대다수의 중소규모 농가를 대상으로는 소득안정직불제를 도입하는 방안을 제안한다. 소득안정직불제는 경영체별로 1~4개의 주요 품목을 선정하여 총소득이 크게 감소할 경우 지원하는 제도이다. 단, 개별 경영체의 실제 소득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전체 또는 지역별로 평균 가격과 단수, 경영비의 변화를 적용하여 농업소득 변동을 추산하는 방식으로 정책 집행에 필요한 통계기반을 갖추기가 비교적 용이한 장점이 있다.³
혁신적인 기술과 인력이 필요하다
1990년대 이후 우리 농정의 주요 화두는 구조개선을 통한 생산성 향상과 경쟁력 제고였고, 신기술 적용과 규모 확대를 위한 투자지원이 핵심 수단이 되었다. 소수 전업농가의 규모 확대는 영세소농의 퇴출을 촉진하는 것을 의미하여 가족농 보호와 농촌사회 유지라는 다른 가치와 충돌하곤 했다. 그렇지만 농업도 발전하는 기술을 농산물 생산과 유통에 접목시켜 생산성을 향상시켜야 지속가능한 산업으로 유지될 수 있다는 사실을 외면할 수는 없다.
농업이 발전하려면 사회적 수요에 대응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진 혁신적인 젊은 인력이 필요하다. 우리나라도 청년농업인을 확보하기 위한 여러 사업을 시행해 왔지만 영농자금 부족, 농지와 주택 확보 곤란, 영농기술 미흡, 기본생활비 부족 등의 사유로 다수가 다시 농촌을 떠나고 있다. 다른 조건은 충족하더라도 한두 분야에서 극복하기 어려운 난관을 만나면 정착에 실패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개별 농업인별로 맞춤형 통합 지원이 절실하다. 통합적 지원에서 가장 큰 어려움은 농지의 확보다. 청년농을 비롯한 신규 진입자는 농지 정보의 획득이 어렵고, 농지 소유자는 기존 농업인에게 임대하려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농지거래 정보의 수집·공유를 강화하는 한편 농지의 효율적 이용에 적절한 청년농업인에게 매입과 임차의 우선권을 주는 농지 관련 법·제도 정비가 필요하다. 이와 함께 취업과 영농교육을 병행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춘 교육농장 등 농업법인 취업을 통한 인력 양성도 효과적인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생산성 향상을 위한 새로운 농업기술의 개발과 보급에 정부는 많은 재정을 투입하고 있는데, 다음 사항을 유의하여 정책을 보완할 필요가 있다. 첫째, 농업기술 발전은 노동생산성과 토지생산성을 올리는 외에도 식품안전성의 제고, 환경오염과 탄소배출 저감, 자원 절약 등 새로운 목표를 지향해야 한다. 둘째, 앞으로 농업기술은 빅데이터에 기반한 스마트화가 중심이 되어 발전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 스마트팜은 시설원예와 축산에 집중되어 있는데 다수 농가가 경영하는 노지농업으로도 확대하여야 한다. 또한 생산뿐만 아니라 유통과 소비의 정보를 신속히 수집하여 생산에 반영하는 체계적 수급 관리를 함으로써 전체 농산업의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 셋째, 많은 농업인들은 고령이고 소규모여서 신기술에 스스로 적응하기가 어려우므로 현장의 필요에 맞춘 교육·훈련과 자문 서비스를 강화해야 할 것이다.
1) 그렇지만 이 액수는 이미 체결된 아세안, 호주, 중국 등과의 개별 FTA에서 양허한 조건을 넘는 추가 개방으로 인한 피해만을 계산한 것으로 농민단체에서는 과소 추계되었다며 반발하고 있다.
2) 정부의 당초 직접지불제 예산 목표는 농림축산식품부 예산의 30%였는데 이를 2022년 예산에 적용하면 약 5조 원이 된다. 지난 25년간 농업소득이 1000만 원대 초반에 머무르고 물가를 반영한 실질소득은 40% 정도 감소한 것을 감안하면, 호당 230만 원 수준인 현재의 직접지불금은 개방 피해를 보전하기에 크게 부족하다.
3) 이는 미국이 2014년 농업법에서 도입한 농업위험보상제도(ARC: Agricultural Risk Coverage)와 비슷한 방식이다.
※ 필자 오내원: 전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농가경제 분석과 경영안정 정책을 주로 연구하였다. 최근 농촌사회의 변화 속에서 직접지불제의 진화에 관심을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