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구자인
고향이 어딥니까?
1980년대 서울의 어느 술집. 모임에서 처음 만난 사람에게 통성명하고, 서로 고향을 묻는다. “친구는 고향이 어딘가?” “나는 진주 지수인데, 자네는?” “아, 나는 서울 토박이지” “서울이 모두 자네 고향은 아니지 않은가?” “그렇기는 한데, 이사를 하도 다녀서……. 그런데 지수란 곳은 처음 듣는데, 어떤 곳인가?” 고향 이야기로 시작하여 서울로 오게 된 다양한 사연으로 이어진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서, 처음 듣는 면 이름도 알게 되었다. 대도시 출신은 고향을 큰 도시 이름으로, 시골 출신은 어느 군의 어느 면까지 소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내가 자란 부산에서는 경남에서 이주한 친구들이 많아 이런 경향이 더욱 강했다. 만약에 경남 진주시에서 만난 이들이 고향을 소개한다면 ‘진주’가 아니라 ‘○○면’까지 말했을 것이다.
이제는 이런 분위기가 아예 없어졌다.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이 수도권에 몰려 살면서 지방과 농촌은 드러내기 어려운, 부끄러운 곳이 되었다. 이제는 국민 다수가 아파트에서 거주하는 상황에서 ‘태어나고 자란’ 고향 개념은 약해졌고, 당연히 면은 더욱 생소한 ‘딴 나라’가 되었다. 게다가 도로명 주소까지 의무화되면서 면 이름을 적지 않아도 우편물은 배달되니, 농촌의 정겨운 지명들이 서서히 사라질 것이다.
현실이 이러하니 ‘균형발전’도 ‘농촌재생’도 전혀 사회적 관심을 받지 못한다. 중앙에서 정책을 결정하는 고위 공무원이나 연구자, 국회의원 등에게 지방과 농촌은 ‘먼 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내가 태어나지도 않았고, 살지도 않으며, 앞으로도 살 생각이 없으니, 그냥 ‘대상’에 불과하다. 당사자도 아니니 절박할 이유도 없다. 결국 농촌 위기는 갈수록 심화될 것인데 희망의 실마리를 찾기가 쉽지 않다. 농촌에 살고 있는 당사자 주민이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면 해답은 없다. 무엇을 근본적으로 반성하고 어떻게 새롭게 접근할 것인가?
읍·면 자치가 왜 필요할까?
풀뿌리 주민자치운동의 하나로 ‘마을만들기’에 관심을 가지고 지역정책에 관여한 지도 이제 30년이 넘어간다. 그동안 ‘일만 하면 소가 되고, 공부만 하면 도깨비가 된다’는 선현의 가르침에 따라 이론과 실천, 정책과 현장, 행정과 민간 사이를 오가며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런 실천을 통해 깨달은 것이 있고, 우리나라 농촌정책의 근본과제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목표, 방향에 대해 제안할 것이 있다.
지금까지의 이론적, 실천적 경험을 종합하면 읍·면 자치권 확보에 초점이 모아진다. 농촌정책에서 드러난 4대 핵심과제와 연결하여 읍·면 자치의 필요성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행정도 민간도 ‘정책 칸막이’를 극복하고 제도적인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 역할과 책임을 구획화하는 ‘행정 칸막이’ 문제는 아주 오랫동안 지적된 과제다. 이것이 중간지원조직과 민간단체의 칸막이를, 나아가 읍·면 단위에서의 칸막이까지 ‘확대재생산’ 하면서 문제를 더 심각하게 만든다. 순환보직제 문제도 심각한데, 지역에 살지 않는 공무원도 너무 많아지면서, 전문성도 지역 애착도 점점 떨어진다. 읍·면에 분포하는 민간단체도 주민 스스로 설립한 것은 정말 드물고, 행정 부서별로 조직된 민간단체의 지부나 지회 형태가 대부분이다. 정책 칸막이가 읍·면 단위까지 이어지니 지역 실정에 맞는 자주적인 해결책을 찾기가 더더욱 어려워진다.
둘째, 정책의 결정 과정에서 깊이 있는 공론장이 작동되어야 한다. 농촌 문제는 역사적 유래가 있고 사회구조적 요인과 연결되어 있어 단순히 농어민수당 지급이나 직불금 확대, 기본소득 도입 등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단편적인 일회성 임기응변 대응이 아니라,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모여 구조적 과제에 근본적으로 접근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도 읍·면 범위의 주민 참여가 훨씬 쉽고, 보다 구체적이고 연속적인 토론도 가능하다. 실천해야 할 민간 주체도, 공공행정의 책임성도 명확해진다.
셋째, 주민이 수립한 계획을 전제로 정책사업이 시행되어야 한다. 대부분의 지역민이 인정하듯이 현재의 각종 중장기 기본계획은 모두 용역사 ‘작품’이다. 국도비 공모사업은 ‘따오는’ 것이 중요하고, 계획 기간도 길어 담당하는 공무원은 여러 번 바뀐다. 공동학습과 토론 문화는 사라졌고, 계획은 작동하지 않은 채 행정‘사업’만 많아지는 상황이다. 그래서 주민이 실질적으로 참여하고 주도하여 읍·면 발전계획을 의무적으로 수립해야 각종 정책사업도 서로 연결될 수 있다. 주민이 이해하고 숙지하는 만큼 계획은 작동된다. 2025년 법정계획으로 수립 중인 ‘농촌공간 기본계획(농촌협약)’은 이 점을 놓치고 있는 셈이다.
넷째, 지방자치의 왜곡된 역사를 되돌아보며 주민자치의 상상력을 더 확대해야 한다. 행정도 주민도 “안 된다”, “어렵다”, “무리다”라는 말이 배어 있다. 아직도 일제 식민지와 남북 분단, 군사 독재 시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광장’에서 국민주권을 주장하는 목소리는 높지만 농촌 현장에서는 주민자치가 권리가 아니라 ‘부탁’에 그친다. 읍·면마다 주민자치회로 전환되고 있지만, “주민자치니까 주민이 결정한 것은 주민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행정에 자꾸 요구하는 것은 자치가 아니다”라는 행정 공무원의 주장도 자주 듣게 된다. 헌법 제7조 제1항에 규정된 공무원 역할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지방‘자치’단체의 공무원이 아니라 여전히 중앙정부의 대리인임을 스스로 자처하는 셈이다.
우리나라는 이미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 시기에 지방자치의 발전 경로를 모색했었다. 일제 식민지에 들어가면서 통치 수단으로 읍·면이 기능했지만, 주민들의 자치 의지는 계속 고양되어 왔다. 그래서 해방 이후의 지방자치법은 시·읍·면을 기초자치단체로 출발했고, 읍·면의 단체장과 의원을 직접선거로 선출했던 경험도 2~3회 있다. 5·16 군사정부가 들어서면서 읍·면 자치 권한이 없어져 버렸고, 65년이 흘렀다.
결국 주민들의 자치 역량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역사적, 구조적 과제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그래서 읍·면 자치를 실현하기 위한 정책적 시도조차 없는 ‘정책의 실패’에 해당한다. 농민단체들도 농업과 지역사회의 관계를 인식하지 못하고, 내가 사는 마을이 무너지고 있음에도 소득 보상 투쟁만 열심히 해온 ‘운동의 실패’이기도 하다. 읍·면 자치는 ‘실현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시도해본 적이 없는 것’이다. 행정도 민간단체도 모두 반성해야 할 지점이다.
당장 무엇을 할까?
농촌정책의 4대 핵심과제는 결국 읍·면 자치를 강화하면서 해결해야 한다. 농촌 위기 상황에 근본적으로 접근하면서 당장의 효능감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읍·면 자치는 필요하다. 현재의 행정리 마을도 여러 문제가 중첩되어 있지만, 포기하지 않고 읍·면 자치를 동시에 실천해야 ‘돌아오는 농촌, 살고 싶은 마을’도 실현될 수 있다. 읍·면 자치 측면에서 당장의 실질적인 성과 도출을 위해 다음 4대 당면과제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첫째, 주민 주도의 읍·면 발전계획 수립이 필요하다. 이런 계획이 없으니 정책 칸막이 안에서 행정이 주도하는 개별 사업만 나열식으로 집행되는 현실이다. 읍·면 주민 모두의 ‘꿈과 희망’을 담은 발전계획을 수립함으로써 5년, 10년 앞을 내다보고 계획적으로 실천하면 주민 참여의 효능감도 높아진다. 농업경제부터 교육, 문화, 복지, 환경 등 모든 분야를 포괄하면서 실행 주체도 구체적으로 논의해야 한다. 매년 2회 이상의 주민총회를 통해 의결하고 시행 결과를 평가하면서 한 걸음씩 전진할 수 있다. 필요한 예산은 행정계획에도 담아 연차별로 투자하면 된다.
둘째, 주민자치위원회에서 주민자치회로 전환하고 권한을 강화해야 한다. 주민자치회는 주민들이 스스로 설립한 조직으로, 주민들의 대표기구에 해당한다. 농촌답게 행정리 마을 주민 1인을 반드시 위원으로 포함하고, 지역농업 문제도 다루면서, 제도적으로 사라진 읍·면의회의 기능과 역할을 대신할 수 있어야 한다. 이재명 정부도 법제화를 약속했기 때문에 조만간 지방자치법에 명시되는 법정단체의 지위를 가지게 될 것이다. 주민자치회의 구성과 운영, 제도적 지위 등에 대해서는 다양한 형태가 있을 수 있는데, 지역마다 다양한 실험이 보장되도록 유연하게 열어두어야 한다. 농림축산식품부도 이제는 읍·면 주민자치회와 어떻게 협력할 것인지 구체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셋째, 모든 읍·면마다 지역 문제 해결을 위한 실행 주체로 비영리법인의 설립이 필요하다. 지역사회 갈등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설립 과정의 절차와 과정이 중요하고, 이를 통해 대표성과 전문성을 획득해야 한다. 행정리 마을과 지역사회 기관·단체가 네트워크 형식으로 참여해야 주민자치회와 역할 분담도 이루어지고 읍·면 발전계획의 튼튼한 실행 주체도 될 수 있다. 또 읍·면 소재지에 조성되는 공유재산의 관리위탁과 행정사무의 민간위탁, 그리고 각종 보조금 개혁, 지역역량강화사업 참여 등을 통해 법인 운영도 충분히 보장될 수 있다. 제도적으로 충분히 열려 있는 길이고, 행정과 수의계약도 가능하며, 이런 법인이 있어야 공공서비스 혁신과 지역 문제 해결의 앵커조직 역할도 할 수 있다.
넷째, 읍·면 행정의 정책 책임성을 강화해야 한다. 주민자치회에서 논의된 안건에 대해 읍·면 행정은 의무적으로 협의해야 하고, 또 이를 위해 주민 실생활에 필요한 권한(사무)은 시·군 행정에서 위임되어야 한다. 당연히 인력배치도 늘어야 한다. 나아가 읍·면장 주민추천제와 전문직위제 도입, 임기제 공무원 채용, 특별 예산 편성 등이 병행되어야 한다. 공무원으로서 읍·면에 근무하는 것이 가장 보람되고 재미있도록 우호적인 분위기도 조성되어야 한다. 이번 이재명 정부가 국민주권정부임을 천명하고 있으므로, 주민주권 차원에서 행정의 최전선이 되는 읍·면을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처럼 읍·면 자치의 4대 당면과제는 서로 연결되어 있고, 지역 특성에 따라 우선순위나 강도, 경로는 다양할 수 있다. 어느 것이나 풀뿌리 주민자치운동의 성과 위에 발전할 것이고, 나아가 중앙정부의 정책 기조나 지자체의 민관협치 시스템에 따라 속도는 결정될 것이다. 주민 참여를 통한 민간 주체의 성장 과정은 상향식 경로로 발전하되, 하향식의 제도적 정비를 끊임없이 요구하면서 보완하는 관점이 필요하다. 각자 지역 실정에 맞는 경로를 개척하면서 서로 협력하고 공동의 과제를 빠르게 해결할 필요가 있다.
우리 농촌의 ‘새로운 10년’을 준비하자
2025년 2월 9일, 읍·면 자치에 관심을 가지고 실천하는 풀뿌리 조직과 이를 지원하는 활동가 56명이 충남 홍성군 홍동면 마을활력소에 모였다. 집담회 형식으로 현재 상황을 진단하였고, 농촌재생의 새로운 흐름으로 읍·면 자치를 전면에 내세우며 지역사회 전반을 개혁하는 큰 흐름을 만들어보자고 결의하였다. 단체 명칭은 ‘읍·면 자치권 확보를 위한 풀뿌리 공동행동(약칭 읍·면자치공동행동)’으로 정하였다. 그리고 3월 14일에는 정식 발족식도 개최하고, 주요 활동으로 크게 네 가지를 정했다.
첫째, ‘우리 안의 차이’를 극복하고 읍·면 자치의 상상력을 더욱 확대하기 위해 1박 2일 공동학습회를 4회 개최한다. 1차는 3월에 일본 농촌자치 사례를 검토했고, 2차는 6월 말에 영국의 준자치단체인 패리쉬 의회(Parish Council)와 로컬리즘법을 검토할 예정이다. 둘째, 11월에 전국대회 형식으로 모여 그동안의 실천경험을 평가하면서 2026년 6월 지방자치 선거에서 제안할 정책협약안에 대해 토론하고 합의한다. 셋째, 국회토론회와 서명운동, 자료집 발간, 홍보 등 읍·면 자치권 확보를 위한 다양한 정책 캠페인을 전개한다. 넷째, 이런 흐름을 모아 11월까지 전국 읍·면의 10%에 해당하는 140개 읍·면 단체(개인)가 참여하는 네트워크를 조직한다.
이번 제21대 대통령선거 과정에서 그동안의 학습 성과를 모아 10대 정책과제를 제안하였다. 우리는 앞으로도 다양한 사회대개혁 흐름과 연대하면서 읍·면 자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어디까지나 풀뿌리 읍·면 조직의 성장과 네트워크가 중요하고, 2026년 6월의 지방선거를 큰 디딤돌로 만들 것이다. 2030년 6월에는 대통령선거와 지방선거가 동시에 시행될 것으로 예상되고, 이를 목표 시점으로 현장의 선진사례 만들기와 협력 네트워크 구축, 그리고 헌법과 법률 개정 등을 실천하고자 한다. 그동안 전국적으로 각개약진 하던 부문별, 지역별 실천들이 연대하는 큰 흐름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2030년에는 우리 농촌도 ‘새로운 10년’을 기대할 수 있다. 적어도 향후 5년을 내다보며 농촌재생을 위한 전략적 실천이 필요한 시점이다.
필자 구자인: 마을연구소 일소공도 소장
마을의 관점에서 지속가능한 지역사회 만들기를 꿈꾸며 연구자와 행정 공무원, 중간지원조직 활동가를 넘나들며 농촌재생 방법론을 계속 모색해 왔다. 최근에는 행정리 마을 자치와 읍·면 자치, 시군 단위 민관협치 시스템의 연결 방향에 주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