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짓기’는 하나의 주제로 여러 명의 필자가 집필한 에세이를 이어서 소개하는 코너로, 지난 호 강나루 씨에 이어 강수희 씨가 ‘농촌에 관한 단상,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에 관하여 적은 글을 싣습니다. [편집자 주]
글 강수희
땅바닥에 뒤통수를 대고 납작하게 드러누워서 올려다보는 하늘은 놀랍게도 드넓다. 서서 고개만 움직여 올려볼 때와는 딴판으로 다르다. 맑게 갠 하늘을 가장 좋아하지만 언제 어느 때 어느 모습이든 그렇게 탁 트인 하늘을 가만히 바라보면 그저 경이롭기만 하다. 드넓은 하늘 아래 펼쳐진 이 지구 위에서, 먼지 한 톨만큼 작디작은 나, 그리고 나를 둘러싼 이 모든 생명들이 모두 다 꿋꿋하게 자기 몫의 삶을 참 열심히도 살아가고 있구나, 하는 생소한 감각이 되살아난다. 며칠 전에도 동네 공원의 풀밭에 돗자리를 깔고 누워서 느릿느릿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며 떠올렸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이렇게 탁 트인, 자유로운, 느긋한, 마음 편한, 조화롭게 자연과 어우러지는 순간이라고…. 돌이켜 보면 무척 운이 좋게도 그런 순간들을 어려서부터 자주 접해왔고, 한동안 멀찍이 떨어졌다가도 되찾을 수 있었다.
‘자연농’을 만나고, 담기까지
도시에서 나고 자랐지만 산을 좋아하시는 아버지 덕분에 어릴 적부터 수시로 산에 다녔다. 평범한 학창시절을 거쳐 서울의 직장인으로 살아가면서 어딘가 늘 허전한 느낌이 가시지 않았다. 산속 숲 내음과 시원한 바람이 그리웠지만, 현실은 하늘 한 번 올려다볼 틈조차 없이 휩쓸리듯이 하루하루가 분주하게만 흘러갔다. ‘내가 바랐던 삶은 이런 게 아닌데….’ 하는 고민이 깊어가면서 다른 길을 찾아보자고 마음먹었고, 갑갑함이 목 끝까지 차오르던 어느 해 봄 친구들과 함께 경기 양평군 두물머리에서 주말텃밭을 시작했다. 그 텃밭의 인연이 쭉 이어져 강원 홍천군에서 ‘자연농’이라는 독특한 방식으로 농사를 짓고 계신 최성현 님을 찾아가게 되었고, 그리고 그즈음 만난 인생의 동반자 패트릭과 ‘자연농’을 다루는 다큐멘터리 영화(이하 다큐)를 만들기로 했다.
내가 그랬듯, 그리고 미국의 실리콘밸리에서 나와 꼭 닮은 생각을 품은 채 살아왔던 패트릭이 그랬듯, 각박한 도시의 삶 대신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고픈 사람들에게 ‘자연농’에 담겨 있는 생각이 도움이 되리라 여기며 덜컥 시작한 작업은 예상과 달리 꼬박 4년이 걸렸다. 2011년 시작해서 2015년 완성된 다큐 <자연농(Final Straw)>을 들고 전국 곳곳, 이어 일본과 미국, 영국 등지에서 약 100여 차례의 작은 상영회를 진행했다. 영화의 부제이기도 한 ‘자연의 지혜를 따르는 농부들의 이야기’에 많은 이들이 공감했고, 다큐 완성 후 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그 이야기는 퍼져나가고 있다. 2018년부터는 20분짜리 축약본 영상을 유튜브에 올려두었고, 원하는 누구나 마음껏 영상을 볼 수 있도록 열어놓았다. 처음 다큐 작업을 시작했던 때 품었던 희망대로, ‘자연농’에 담겨 있는 소중한 지혜가 더 널리 번져나갔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다큐 <자연농> 홈페이지 finalstraw.org
다투지 않고, 조화를 이룬다
“자연농 농부 100명이 있다면, 100가지 다 다른 자연농이 있는 셈이다”라는 한 농부의 말처럼, ‘자연농’에는 어떤 뚜렷하게 정해진 원칙이나 정답이 없다. 기후, 토질 같은 외부적 조건뿐만 아니라 농부들의 가치관, 체력, 경제 상황과 같은 세부적 조건까지 모든 경우가 다 다르고, 또 시간이 흐르면서 같은 논밭도, 같은 사람조차도 언제나 달라지기 때문이다. 다만 자연을 공경하면서, 원래 자연 안에 있는 흐름, 다시 말해 ‘순환’을 매우 중시하며, 풀과 벌레를 적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취재 초기에는 ‘이 거대한 자연농의 세계를, 경험도 부족한 우리가, 제대로 잘 담아서 전달할 수 있을까?’ 막막하기도 했다. 돌이켜 보면 너무 커다란 개념을 한꺼번에 받아들이려다 생긴 일종의 소화불량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생각이 차차 정리되면서, ‘100가지의 다 다른 자연농’에 또 하나의 다름을 더해보기로, 우리 눈으로 바라보면서 우리 식대로 이해한 자연농을, 그저 진심을 다해 기록하기로 했다.
‘자연농’ 안의 다양한 특징 중에서 우리가 특히 주목한 지점은 ‘다투지 않고, 가능한 한 힘껏 조화를 이룬다’는 부분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늘 경쟁이 당연한 사회에서 자라왔고 날 선 긴장감에 마음이 몹시 지쳐있었기에, 너그럽게 품어주는 자연 안에서 모든 존재가 함께 어우러져 살아갈 수 있다는 자연농의 철학이 더욱 마음 깊이 와닿았다. 가장 놀라웠던 건 ‘풀’을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흔히 쓰는 ‘잡초雜草’라는 그 이름부터가 얼마나 우리의 편견을 담고 있는지를 새삼 깨닫기도 했다. 자연농의 큰 스승 가와구치 요시카즈 님은 ‘잡초’라는 표현 대신 그저 ‘풀’이라고 부르면서, 작물이 제힘을 갖추지 못한 성장 초기를 제외하고는 풀을 없애지 말고 함께 자라게 두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풀은 이유가 있어서 거기 나는 것이다. 필요가 없어지면 다른 풀로 바뀌어 간다. 그것이 자연의 모습이다. 풀은 자유롭게 잎을 내고, 땅속으로 뿌리를 뻗고, 공기 중이나 땅속에서 영양을 모으고, 그 자리에서 썩어 가며 생명을 늘리는 활동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풀은 되도록 베지 않고, 가능한 한 그 자리에서 일생을 마치게 한다.”
_ 아라이 요시미, 《가와구치 요시카즈의 자연농 교실》, 정신세계사, 2017
‘자연농’을 전달하는 다양한 방식
다큐 작업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 후, 2017년 겨울부터 우리는 일본 오사카 외곽의 작은 동네에 자리를 잡았다. 골목 안 빈 집터였던 곳에 손바닥만 한 텃밭을 가꾸기 시작하면서 가와구치 님의 말씀을 직접 목격할 수 있었다. 오랫동안 비닐로 덮여 있던 그 묵은 땅에 제일 먼저 쑥이 자라기 시작하더니, 어성초, 괭이밥, 양귀비…. 점점 더 많은 종류의 풀들이 찾아왔다. 해가 갈수록 풀의 종류는 더욱 다양해졌고, 거칠고 척박하던 흙이 차차 부드러워졌고, 더 많은 벌레와 새들이 찾아들기 시작했다. 풀이 이끄는 ‘생명을 늘리는 활동’은 느린 듯 꾸준하게 쉼 없이 계속 이어져서 텃밭 4년 차인 올해는 온갖 풀들, 나무들, 꽃들로 풍성한 아름다운 작은 도심 속 공원이 되었다.
이 ‘주머니텃밭’과, ‘나뭇가지’라는 뜻의 생태 예술 공간 ‘The Branch’를 운영하면서 우리는 ‘자연농’에 담겨 있는 생각을 다양한 방식으로 전달해왔다. 예술을 전공한 패트릭은 설치, 드로잉, 영상 등 다양한 예술 작품을 제작했고, 나는 약초학을 공부한 후 허벌리스트 자격을 얻어 허브를 다루고 가르치는 일을 이어왔다. 2022년 2월에는 ‘CITY AS WEEDS’라는 제목으로 풀들이 주인공인 전시회를 열었다. 민들레, 질경이, 토끼풀, 쑥을 주제로 패트릭은 목판화, 천연염색, 드로잉 등 여러 작품을 만들었고, 나는 각 허브의 효능을 전시하고, 허브차를 만들어서 배포했다. 보통은 ‘잡초’로 여겨지지만 실은 동서양의 약초학에서 두루 소중한 재료로 잘 활용해온 이 풀들의 숨은 가치를 널리 알리고 싶었다. 나조차도 그동안 많이 다뤄본 재료가 아니어서, 조금은 기대 반 걱정 반으로 만든 이 블렌딩 허브차 ‘풀의 지혜’에서는 놀랍게도 포근하고 다정한 향기가 났다. 흙내음이 연상되는 담담한 맛은 꼭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져주는 것만 같았다.
자연과 사람을 더 가깝게
돌이켜 보면 우리가 ‘자연농’이라는 세계를 처음 만나고 알아가고 감동하며 더 널리 알리고 나누고 싶다고 마음먹었던 게 11년 전이다. 다큐, 단편 영상, 전시회, 워크숍, 허브…. 분야는 다 다르지만,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의 밑바탕에는 ‘자연과 사람을 더 가까이 연결하기, 함께 조화롭게 어우러지도록 돕기’라는 큰 주제가 있다. 그렇게 지나온 흐름과 펼쳐온 일들, 그 둘레를 살펴보면, 해가 갈수록 기후변화 및 환경오염에 대한 경각심이 널리 번져나가면서 자연농, 퍼머컬처, 친환경농업 등이 더더욱 주목받고 있음이 보인다. 앞서 예로 든 ‘풀’에 대한 시각도 차츰 바뀌고 있는 듯하다. ‘잡초’를 주제로 한 책들이 여러 권 출간되었고, 얼마 전 읽은 과학 분야의 이름난 베스트셀러에서도 내 마음을 꼭 빼닮은 구절을 만나며 한껏 반가워했다.
“어떤 사람에게 민들레는 잡초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그 똑같은 식물이 훨씬 다양한 것일 수 있다. 약초 채집가에게 민들레는 약재이고 간을 해독하고 피부를 깨끗이 하며 눈을 건강하게 하는 해법이다. 화가에게 민들레는 염료이며, 히피에게는 화관, 아이에게는 소원을 빌게 해주는 존재다. 나비에게는 생명을 유지하는 수단이며, 벌에게는 짝짓기를 하는 침대이고, 개미에게는 광활한 후각의 아틀라스에서 한 지점이 된다.”
_ 룰루 밀러,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곰출판, 2021
팬데믹 이후 국경을 자유롭게 오가기 어려워지면서, 우리의 첫 보금자리였던 오사카와의 인연은 아쉽게도 올봄을 마지막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땀 흘려 가꾼 정든 텃밭과 손때 묻은 보금자리를 떠나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또 다른 출발선 앞에 서서, 불안과 막막함이 떠오를 때마다 다시금 마음을 다잡곤 한다. 어디에서든, 어떤 상황에서든, 자연과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순간을 잘 빚어내면 된다고, 우리의 일을 통해, 그리고 삶 속에서도, 마음이 충만해지는 순간들을 힘껏 만들어가고 싶다. 그리고 그 기쁨과 행복이 내 안에만 머무르지 않고,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누릴 수 있도록 열심히 알려가고 싶다. 포근하고 향긋한 ‘풀의 지혜’ 한 잔을 마주 앉아 함께 나눌 수 있다면 좋겠다.
필자 강수희: 다큐 <자연농(Final Straw)> 감독, 책 《불안과 경쟁 없는 이곳에서》 저자.
작업 동료이자 삶의 동반자인 패트릭 라이든과 함께, 도시-자연-사람을 더 가까이 연결하기 위한 생태예술 창작그룹 ‘City as Nature(시티애즈네이처)’를 결성하여 작품 제작 및 전시, 워크숍 등의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또한 자연의 지혜를 이롭게 활용할 수 있는 허브에 깊은 관심을 두고, 일상에서 더욱 쉽게 활용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안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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