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입맛은 언제 어떻게 바뀌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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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직접 촬영한, 120여 년 전에 프랑스 파리에서 발행된 사진엽서.

 주영하

120여 년 전 사진 한 장
120여 년 전에 프랑스 파리에서 발행된 사진엽서에는 2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조선 남성이 대청마루에 앉아 식사를 하는 모습이 담겼다. 이 남성이 쓰고 있는 갓의 둘레인 양태가 좁은 것으로 보아, 1894년(고종 31년) 갑오경장 이후에 촬영된 사진으로 보인다. 그의 앞에 놓인 식탁은 조선시대 사대부 남성이 식사 때 사용했던 개다리소반이다.
  소반 위에는 밥이 수북한 사발과 국이 담긴 백자 대접이 놓였다. 밥사발과 국대접 앞에는 속이 깊은 그릇 세 개와 크고 작은 접시 세 개가 보인다. 사진의 해상도가 높지 않아서 그릇에 무슨 음식이 담겼는지 알기는 어렵다. 그래도 추정해보면, 사진의 왼쪽 접시에는 나물, 오른쪽 접시에는 콩자반처럼 보이는 음식이 담긴 듯하다.
  속이 깊은 그릇은 요사이 가정에서 보기 어려운 ‘보시기’라는 그릇이다. 부엌에서 소반에 음식을 차린 다음, 대청마루나 사랑방까지 옮기려면 젖은 반찬을 속이 깊은 ‘보시기’에 담지 않으면 국물이 밖으로 흘러넘칠 수 있다. 그래서 조선시대 왕실과 사대부 가정에서는 국물이 있는 음식을 ‘보시기’에 담았다. 1930년대 이후 남성이 소반에서 ‘혼밥’하는 모습이 가부장적이라는 비판을 받으면서 ‘보시기’도 식탁 위에서 자취를 감추어 갔다.
  다시 시선을 사진의 사발에 담긴 밥으로 옮겨보자. 하얀 쌀밥이 아니고 잡곡밥으로 보인다. 사진 속 남성이 입은 두루마기로 보아, 계절은 6월 아니면 10월 즈음으로 여겨진다. 만약 6월이라면 보리를 수확한 때이다. 보리밥은 조선의 임금 중 가장 장수한 영조도 여름이면 즐겨 먹었던 밥이다. 만약 10월이라면 벼 수확을 마친 때다. 그런데 밥의 색은 흰색이 아니다. 19세기 말 조선 사람들이 먹었던 쌀은 지금의 기준으로 말하면 현미였다. 10분도 이상의 백미를 도정하는 기술을 갖추지 못한 탓도 있었지만 당시 사람들은 현미밥을 즐겨 먹었다.
  밥의 양은 지금과 달리 엄청 많다. 이렇게 많은 밥을 맛있게 먹으려면 국과 함께 국물이 있는 젖은 반찬과 짠맛의 마른반찬이 있어야 한다. 곡물로 지은 밥은 간이 되어 있지 않다. 그러니 밥을 입에 넣고 씹으면서 동시에 반찬을 입 속에 넣어야 음식의 간이 알맞게 되어 먹기에 좋다. 입속에서 비빔밥을 만들어 먹는 셈이다. 그런데 잡곡밥은 백미에 비해 거칠다. 그래서 밥과 반찬이 있는 입속에 다시 국물 한 숟가락을 넣으면 더욱 먹기에 좋다. ‘현미밥+반찬+국’ 혹은 ‘잡곡밥+반찬+국’의 조합이 바로 천년을 넘게 지속해온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밥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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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백미밥으로의 취향 변화를 이끈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일본의 한반도 침략과 식민화이다.

백미밥에 빠지다
하지만 요사이 한국인은 ‘백미밥+반찬+국’의 조합을 좋아한다. 한국인은 언제부터 백미밥을 좋아하기 시작했을까? 1920년대 이후 부유층 가정에서 백미밥을 즐겨 먹었다. 현미밥 혹은 잡곡밥에서 백미밥으로의 취향 변화를 이끈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일본의 한반도 침략과 식민화이다.
  1869년 메이지유신을 통해 잽싸게 서양식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은 1876년 2월 강화도조약을 통해 조선 침략의 야욕을 드러냈다. 강화도조약 이후 수많은 일본인이 한반도에 들어왔고, 그들 중에는 조선의 쌀에 주목한 상인들이 있었다. 일본열도는 벼농사를 짓기에 적합한 아열대 기후대에 속한다. 하지만 일본 국내에서 생산한 쌀만으로는 도시와 농산어촌의 국민에게 제공하기에 충분치 않았다. 메이지 정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선에 앞서 식민지로 삼은 대만에서 쌀을 들여왔다. 하지만 타이완의 쌀은 인디카 품종이라서 일본인으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했다.
  그런데 조선의 벼 중에 자신들이 즐겨 먹는 자포니카 품종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일본인 상인들은 인천에 도매 가게를 열고 서해안에 접한 논을 다니면서 비싼 값을 주고 ‘조선미朝鮮米’를 사들였다. 조선의 농민들은 몇 배의 값을 쳐주는 일본 상인의 유혹에 쉽게 넘어갔고, 국내는 쌀 부족으로 난리가 났다. 하지만 일본 오사카 미곡 시장에서 조선미는 크게 환영받지 못했다. 그 이유는 조선에서 도정한 쌀에 섞여 있는 붉은 색의 쌀인 적미赤米 때문이었다. 일본인은 적미를 불행의 징표로 인식했고, 적미가 섞인 조선미 구매를 꺼렸다. 그러자 일본 미곡 상인들은 조선에서 벼를 가져가 일본에서 도정을 시도했다. 하지만 적미가 계속 섞여 있었으므로 판매가 쉽지 않았다.
  결국, 일본의 거대 미곡 상인들은 일본 품종의 벼를 조선의 논에 직접 심는 대안을 찾아냈다. 그들은 아예 조선의 논을 사서 조선인 농민을 노동자로 고용한 농장에 일본 품종의 벼를 심었다. 조선인 대지주 중에서도 값을 많이 받을 수 있는 일본 품종의 벼를 심었다. 도정 방식도 일본인이 좋아하는 10분도가 채택되었다.
  일본인은 오랫동안 10분도 이상의 백미로 지은 밥을 신사의 신령에게 제물로 올렸고, 가정에서도 백미로만 밥을 지었다. 단단한 쌀겨 부분을 깎아낸 백미에는 비타민 B1이 들어 있지 않다. 일 년 내내 백미만 먹은 에도시대 천왕과 쇼군將軍은 한 명도 빠짐없이 각기병에 걸려 고생했다. 이에 반해 현미밥이나 잡곡밥을 주로 먹었던 조선시대 임금은 한 명도 각기병에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일본인은 백미밥을 일본의 상징으로 인식했다. 1920년대 후반이 되면서 백미밥을 주식으로 먹는 조선 가정이 늘어났다. 이렇게 일본식 백미밥이 조선의 현미밥이나 잡곡밥을 대체해갔다.
  해방 이후 백미밥은 ‘한국인의 밥심’으로 인식되었다. 1950년대 중반 이후 정부 주도의 혼식 운동이 펼쳐지면서 잡곡밥은 부활하는 듯했지만, 백미에 길든 한국인의 입맛은 과거로 돌아가지 않았다. 1970년대 초반 어쩔 수 없이 ‘쌀+보리’ 혹은 ‘쌀+잡곡’의 밥을 지어도 백미의 맛을 얻기 위해 압력솥으로 밥을 지었다. 1970년대 중반, 정부에서 다수확의 인디카 계통 벼인 통일벼 재배를 적극적으로 권장했고, 쌀 생산량이 급속하게 늘어났다. 또 압축성장의 결과로 1970년대 중반부터 식단의 육식화가 급속하게 진행되면서 쌀밥 소비량이 급속하게 줄어들었다. 1978년 이후 한국은 쌀 자급자족 국가가 되었다. 하지만 쌀 증산을 위한 녹색혁명은 보리·콩·조와 같은 잡곡의 생산량을 급격하게 줄어들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K-푸드는 한식 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한국의 음 식점 메뉴와 공장제 식품을 두루 일컫는 용어다.
K-푸드는 한식 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한국의 음식점 메뉴와 공장제 식품을 두루 일컫는 용어다.

K-푸드는 분식 정책의 결과?
21세기에 들어와서 한국 경제는 세계 10대 대국의 수준에 들어갔다. 1990년대 후반부터 중국과 일본에서 일어난 대중음악·드라마·영화의 한류 붐은 제3세계를 거쳐 북미에서도 대세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한류 붐은 한국의 가공식품이 세계 각국에서 인기를 끌도록 해준 기반이었다. 초코파이는 중국과 러시아에서 최고로 인기 있는 한국산 가공식품이다. 각종 인스턴트라면은 세계 각국에서 최고의 매출 실적을 쌓고 있다. 한국 기업이 만든 만두와 두부는 북미 시장에서 중국 제품을 뛰어넘는 판매량을 거두는 중이다.
  해외에서 인기를 끄는 한국 식품을 ‘K-컬처’라는 용어에 맞추어 ‘K-푸드’라고 부른다. K-푸드는 한식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한국의 음식점 메뉴와 공장제 식품을 두루 일컫는 용어다. 최근 BTS를 비롯한 K-팝이 미국에서 열광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미국 식품 시장에서 K-푸드 판매도 늘어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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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K-푸드에는 1960년대 중반부터 정부가 강력하게 시행한 분식 장려운동의 그림자가 숨어 있다. 당시만 해도 외국에서 수입한 밀을 미세하게 제분하는 기술이 부족했던 국내 식품업체는 한식의 국물에 주목했다. 인스턴트라면 제조업체의 연구원들은 유명한 한식 음식점에 가서 재료 배합을 조사하고, 스프 베이스를 만들어냈다. 당시 식품업체가 개발한 소고기라면·해장국라면·된장라면·육개장라면 등은 한국인이 즐겨 먹는 국을 응용한 식품이다. 많은 가정에서는 인스턴트라면을 국처럼 끓여 국수를 먹고 나서 식은 밥을 국물에 말아 국밥처럼 먹었다.
  인스턴트라면은 1958년 일본의 닛신식품이 최초로 시장에 내놓은 제품이다. 닛신식품의 ‘치킨라멘’은 국수를 반죽할 때 아예 소스를 넣어 스프가 별도로 제공되지 않는 라면이다. 1963년에 처음 시장에 나온 삼양라면은 닛신식품의 치킨라멘 기술이 너무 비싸서 구입하지 못하고, 스프를 별도로 제공하는 다른 업체의 기술을 받아들였다. 이것이 다양한 국물 맛을 내는 한국 인스턴트라면의 탄생을 만든 사건이다. 1990년대 이후 국내업체의 제분 기술이 세계 최고의 수준에 오르면서 한국산 인스턴트라면은 품질 좋은 국수와 너무나 다양한 맛을 내는 스프의 조합으로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 소비자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겉모습은 한식이지만 재료를 살펴보면 국내산과 외국산의 합체인 경우가 적지 않다. 삼겹살의 돼지고기 역시 국제적 사료 공급 사슬에서 자 유롭지 않다.
겉모습은 한식이지만 재료를 살펴보면 국내산과 외국산의 합체인 경우가 적지 않다. 삼겹살의 돼지고기 역시 국제적 사료 공급 사슬에서 자유롭지 않다.

겉과 속이 다른 한국인의 식성
오늘날 한국인 대다수는 ‘밥+반찬+국’이 입속에서 섞여 내는 맛을 가장 맛있다고 생각한다. ‘밥+반찬’의 조합인 비빔밥과 ‘밥+국’이 합쳐진 국밥이 여전히 인기를 누리고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겉모습은 한식이지만 재료를 살펴보면 국내산과 외국산의 합체인 경우가 적지 않다. 이 모두 분업화된 국제적 식품 생산 체제가 만들어낸 결과이다.
  한국인이 즐겨 먹는 프라이드치킨의 닭고기 대부분은 외국에서 수입한 사료로 키운 것이다. 삼겹살의 돼지고기 역시 국제적 사료 공급 사슬에서 자유롭지 않다. 튀김용 식용유는 미국산 콩에서 뽑아낸 것이다. 저가 음식점의 식탁에 차려진 김치는 중국산일 가능성이 크다. 심지어 배추는 국내산이지만, 고춧가루와 같은 양념이나 젓갈의 원산지는 확인이 필요하다. 농민의 술에서 국민의 술로 자리 잡은 막걸리나 희석식 소주의 원료도 국내산이 아닐 가능성이 더 크다. 이 모두 세계 식품체제 아래에서 국내산과 외국산 사이의 가격 불균형이 빚어낸 결과다.
  한국인은 1970년에 1인당 연간 약 14kg의 밀을 먹었는데, 2021년에 거의 두 배가 넘는 33kg을 먹고 있다. 이에 반해 쌀 소비량은 136kg에서 57kg으로 줄어들었다. 이제 수입 밀로 만든 음식이 한국인의 주곡主穀이 될 날이 머지않았다. 많은 한국인이 잔치국수나 인스턴트라면, 심지어 우동이나 짜장면·짬뽕, 만두를 먹을 때도 김치를 반찬으로 먹는다. 밀가루 음식을 먹으면서도 몸으로는 ‘밥+반찬+국’의 조합으로 인지한다.
  하루에 두 끼 이상을 한식으로 해결해도 국내 농어민의 주머니를 두둑하게 만들어 주지 못한다. 만약 ‘한식 세계화’가 괄목할 정도로 꽃을 피워도 국내 농민과 어민은 오히려 어깨를 더 움츠릴 수밖에 없다. 이것이 겉과 속이 다른 21세기 한식과 K-푸드의 한계다.

주영하필자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교수.
1987년 이후 역사학·문화인류학·민속학의 시선으로 동아시아 음식의 역사와 문화를 문헌조사와 현지조사를 겸해서 연구하고 여러 책을 출판했다. 최근 음식의 사회운동을 주제로 현장의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