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느른>의 오느른 PD가 오늘을 살아가는 방법
글·사진 최별
구독자 32만2000명,
영상 누적 조회수 3600만 회.
어쩌다 4500만 원짜리 폐가를 사서 시작된 도시 여자의 시골 라이프 채널 <오느른>의 최종 성적이다.(2022년 6월 24일 기준)
첫 출발은 충동적이었다. MBC PD였던 내가 남들은 모두 아파트를 사려고 동동거리던 때에 한 번 가본 적도 없던 전북 김제시의 4500만 원짜리 폐가를 사면서부터였다. 콘텐츠를 하려고 집을 산 건 아니었다. 미쳐가는 서울 집값에 질려 시골집 검색을 취미 삼은 지 3년 차던 2019년, 유튜브 알고리즘이 정상작동 해 <4500만 원에 299평>이라는 영상 썸네일을 나에게 노출시켰을 뿐.
‘평화로움’에 열광하는 사람들
도시의 엘리트 직장인이 ‘시발비용(홧김비용)’으로 4500만 원을 써버린 것에 대한 호응은 엄청났다. 유튜브 채널 <오느른>을 개설한 지 3개월째인 2019년 9월, 어느새 나는 대한민국 급성장 1위 유튜버, 인기 인플루언서가 되어 있었다.
이것은 무엇을 보여주는가. 첫째는 대부분이 성공한 삶이라고 생각하는 ‘인서울’ 대기업 직장인의 삶에 대한 회의감이 2040 경제인구의 절대적인 관심사라는 것이고, 둘째는 그 대안으로 은퇴 후 귀농, 귀촌이 아닌 삶의 적극적인 대안으로의 귀농, 귀촌이 트렌드가 되었다는 것이다.
<오느른>에서의 나의 부캐릭터, 오느른 PD는 특별히 하는 게 없다. 반년 동안 집이 고쳐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팔랑이는 콩이파리를 보고 멍을 때리거나, 옆집 부부가 고추 농사를 지을 때 관상용 고추 화분을 만든 게 다였다. 이 심심한 영상들을 보고 무려 우주 대스타 펭수와 전 세계적인 예술가들(작곡가 유키 구라모토, 피아니스트 선우예권, 바이올리니스트 양인모 등)에게서 러브콜이 왔다.
“대한민국에 이런 평화로운 곳이 있다는 것에 놀랐습니다. 그곳에 가고 싶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우리를 ‘농촌의 평화로움’에 열광하게 만들었을까. 그 이유를 나에게 거꾸로 물어보았다. 당시 서른둘, 서울에서 생존에 성공한 30대 초반이던 ‘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한국의 정상적인 주입식 교육을 받고, 수능을 치러 ‘인 서울’ 대학까지 가게 되면서 나는 그래도 평균 이상의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자부했다. 넉넉한 가정환경은 아니지만, 개천에서 용 나듯 열심히 생활하여 결국에는 하고 싶은 직업을 쟁취했고, 그 보상으로 성공한 30대가 되었구나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게 열심히 달려온 끝의 현실은 무엇인가.
꿈을 이룬 내가 만난 것은 정체가 무엇인지 모르겠는 ‘회사’였고, 좋아하는 일을 해도 썩 즐겁지는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그마저도 멈추게 만드는 처음 겪어보는 재앙, ‘코로나19’가 터졌다. 나는 2019년, 모든 국민을 패닉으로 몰아넣었던 그 전염병이 나를 포함해 맹목적인 삶을 살고 있던 사람들에게 새삼스럽게도, ‘삶의 의미’를 떠올리게 했다고 생각한다.
남들 살 듯이 열심히 살다 보면, 이상적이지는 않아도 10년 뒤, 20년 뒤 노력에 대한 조그만 보상이 있을 거라 막연히 기대했던 우리 현대인들은 당장 내일 나도 병에 걸려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그 불안감은 수십 년째 ‘도시로, 도시로’를 외치며 나아가던 사람들을 멈추고 되돌아보게 만든 것이다.
‘좁은 땅덩어리에 다닥다닥 붙어 살며 경쟁하는 이 도시, 이곳에서의 삶이 과연 맞는가? 과연 이 선택지 밖에는 답이 없는가? 불확실의 시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소소한 행복이 있는 삶
그때, <오느른>은 이런 대안도 있다며, 별것 없지만 소소한 행복이 있는 농촌에서의 삶을 사람들에게 제안했고, 많은 현대인들은 공감한다며, 때로는 대리만족한다며 유튜브 영상에 호응했다. 마침 하늘길이 막히자 해외여행이 아니면 여행이 아니라고 생각하던 사람들이 ‘로컬’, 관광지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농촌 마을의 삶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2020년 6월, 유튜브 채널을 개설한 지 1년여 만에 내 돈 들여 고친 집이 아닌, MBC가 돈 들여 마련한 ‘오느른 오,피스 카페’라는 새로운 오프라인 공간에서 구독자들을 직접 만나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250km가 떨어진, 버스라고는 한 시간에 한 번 오는 시내버스가 다인 이곳까지 사람들이 오면 얼마나 올까 싶었지만 매달 전국 각지에서 600여 명이 방문하며 영상에 대한 반응이 과장이 아니었음이 밝혀졌다. 시사교양 PD로서의 감이 작동했던 것은 이때부터였다. 어쩌면 나의 사소한 일탈로부터 시작된 이 삶이 우리 모두의 대안이 될 수도 있겠구나, 라고.
그렇게 카페도 열어 운영하고, 다양한 마을 재생 사업을 제안하는 등 농촌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면서 분투해온 김제에서의 2년간의 시골살이가 허무하게 끝났다. 미디어 시장의 급격한 환경 변화로 회사로부터 PD 본업복귀를 명받았기 때문이다. 2019년 4월 4500만 원짜리 폐가를 덜컥 구입해서 2022년 6월까지. 연차로는 3년 차, 2번의 사계절을 꼬박 채워 이곳, 전북 김제시의 100년 넘은 개량한옥에서 지냈다. 하루라도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으면 티가 나는 시골집, 이곳을 떠나있어야 한다고 하니 사랑하는 애인을 놓고 가는 마음이다.
그래서 유튜브 채널 <오느른>이 어떠한 삶의 대안의 플랫폼이 되었냐고 묻는다면 가능성만 제시했을 뿐, 결국 나는 현실 세계의 속도를 쫓아가지 못해 결론을 내지 못하고 도시의 삶으로 돌아가는 셈이다. 나의 삶을 통해 결국 그 누군가의 삶을 바꾸거나,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경지에는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여전히 ‘러스틱 라이프(Rustic Life, 시골의 소박한 삶)’는 삶의 한 방향으로 제시될 뿐. 그리고 나 역시 지난 2년의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기 위해 콘텐츠로서 <오느른> 채널을 마무리하는 대신, 실제 내 삶에는 새로운 삶의 방향을 그려 넣기로 했다.
꾸역꾸역 주말마다 서울에서 250km를 달려 이곳의 시골 생활을 유지하겠다고, 오늘부터 그 유명한 로망, ‘오도이촌(五都二村, 닷새는 도시에서 이틀은 농촌에서 생활하는 라이프 스타일)’이 나의 삶이라고. 나는 아예 농촌을 떠나 도시에서 또 치열함만 남는 삶을 살기보다는 조금 다르게 살아보겠다고 말이다.
다시 마주한 도시의 모순
오랜만에 서울 마포구 상암동 방송국으로 출근했다. 어쩌다 시작된 얼렁뚱땅 시골살이 <오느른> 유튜브를 연재 시작한 지 2년 만의 정상 출근. 내가 본업을 잠시 멈추고 시골살이 적응에 온 힘을 다 하던 사이, 서울의 미디어 산업은 꽤나 변했고, 꽤나 여전했다. 글로벌 OTT 시장이 확대됨에 따라 전과는 달라진 방송국의 역할과 위상을 고민하는 한편, 사람의 평균적인 발전 속도보다 빠르게 변하는 미디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모두가 고군분투 중인 것은 여전하다.
2년 만에 다시 만난 서울에서의 바쁨은 세상이 빙빙 도는 느낌이다. 정신없이 각종 회의에 끌려다니는 내 옆으로 또 다른 각종 회의에 끌려다니는 도시인들의 움직임이 꼭 제각각 회오리치는 급류에서 버티는 모양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래도 격한 신체노동은 없다. 시골 가면 건강해지고 피부도 좋아질 것 같았지만, 사계절 내리쬐는 햇살에 텃밭 일을 하며 숨을 곳 없어 까맣게 그을린 내 얼굴은 일주일 새 꽤나 하얘진 것 같아 마음에 드는 것도 같다.
가장 적응하기 어려운 것은 2년 전에는 전혀 생각도 못 했던 것인데 점심시간, 일하다 사 먹는 밥이다. 1만 원이 훌쩍 넘는 값에 시골 마을에서는 줘도 안 먹을 음식을 꾸역꾸역 입에 넣는다. 식당마다 사진은 그럴듯한데 내 앞에 놓이는 음식은 그저 보잘것없다. 순간 농촌에서의 먹는 생활이 어찌나 호사스러웠는지 떠올린다. 방치되다시피한 내 집 텃밭에도 나가기만 하면 바로 먹을 제철 식거리가 하나, 둘 정도는 있었으며 동네 하나로마트에선 수입 고기는 들여다 놓지도 않았었다. 옆집 어머님들의 정리 잘 된 텃밭에 가보면 주변에는 항상 ‘이건 못 먹는다, 쇠었다’ 하며 내다버린 멀쩡한 상추와 나물들, 작물들이 널려있었다. 한때는 그걸 가져다 팔까 생각한 적도 있었으니 말 다했다. 그나마 일이 바빠 외식을 할 때에도 어느 식당이든 백반집만큼 제철 반찬 두세 가지는 당연하고, 식당마다 제집에서 만든 김치를 내놓는 것이 식당 하는 사람의 예의라 여겨지던 마을이었다.
허투루 나가는 것 같은 점심값 1만3000원이 아까워서인지, 내 앞에 놓인 중국산 김치 세 조각이 서러워서인지 모르겠지만 눈물이 핑 돈다. 시골 사람들이 좋은 건 다 먹고, 도시 사람들에겐 줘도 안 먹는 것들을 내다 판다는 말이 어쩌면 사실이었나 싶다. 아니다. 2년 전 시골살이를 경험하기 전의 나를 떠올려보자면, 그게 좋은 건 줄 몰랐었다. 늦봄부터 가을까지,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주렁주렁 달리던 가지가 그렇게 맛있는 것인 줄 나는 몰랐다. 매 끼니 채소를 챙겨 먹어야 한다는데 샐러드 가게 말고는 채소 챙겨 먹을 곳이 없는 도시에서 도대체 남들은 어떻게 채소를 챙겨 먹는다는 건지 항상 의문이었던 나다. 그리고, 그나마의 점심 시간이 나를 위한 행복한 시간으로 느껴져 하루 종일 오늘 점심은 뭘 먹을까, 어떤 기름진 음식을 먹어서 이 허기진 느낌을 지워버릴까를 생각하던 나다.
그렇다. 짧으면 짧다 할 수 있는 2년 동안의 시골살이는 ‘나’라는 사람을 많이도 바꾸어 놓았다. 2년 전 과거 도시 생활에 지친 나에게서 출발한 시골살이는 실컷 다양한 경험의 풍요로움을 즐기게 해놓고, 현재, 외면할 수 없는 도시 모순을 직면케 한다.
오늘부터 ‘오도이촌’
저녁 8시, 오랜만에 출근한 나를 맞이하는 회사 동료들과의 저녁 식사 후, 늦지도 이르지도 않은 퇴근을 한다. 평소였으면 시골집에서 영상 편집을 시작할 시간이다. 휴대폰을 들어 현재 가용 가능한 돈으로는 이 도시에 어느 손바닥만한 집을 구할 수 있나 검색에 빠져들다가…. 됐다 싶다. 내일은 토요일, 일찌감치 두 마리의 강아지와, 동거인과 함께 시골의 나의 집으로 떠나는 날이다. 알 수 없는 피곤함과 우울감에 젖은 마음에 깊은 위로가 퍼진다. 내일은 다 져버린 꽃들을 뽑아내고, 낫으로 풀을 베어버려야지. 그러다 배가 고프면 잘 자란 가지를 구워 간단히 간장가지덮밥이나 해 먹으면 되겠다. 그 사이 강아지들은 온 마을이 제집인 양 뛰어놀다 지치면 집에 돌아와 문을 긁어대겠지. 두꺼비와 싸우지 못하게 중간중간 잘 살펴야지. 날씨가 좋았으면 좋겠다. 아니면 시원하게 비가 내려도 좋겠다 생각하며 잠이 드는 밤이다.
오늘부터 오도이촌. 그 수고스러운 살이를 기꺼이 하는 이유는 아직 어찌 살지 결정하지 못한 반 도시, 반 농촌인인 나에게 유예 시간을 주며 ‘어떻게 사는 삶이 좋은 삶인가’를 오래오래 고민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저 포기하고 한쪽에 맞춰 순응하여 살아가기보다, 나만의 방법을 찾기 위한 시간이다.
어떻게 먹고살 것인가. 도시에서 노동자로 돈을 벌어, 꽤 많은 돈을 버는 데도 희한하게 결핍이 계속되는 삶을 살 것인가. 내가 나 먹을 것을 직접 일궈 부족해도 요상하게 풍요로운 삶을 살 것인가. 아직 나의 방향은 정해지지 않았기에, 말이 좋아 도시 로망 ‘오도이촌’ 이지, 실제로는 어느 것도 결정하지 못한 유예 상황 ‘오도이촌’을 오늘부터 시작한다.
필자 최별: MBC 디지털크리에이티브 스튜디오 제작 PD.
2020년 전북 김제시의 4500만 원짜리 폐가를 사서 시골살이를 하는 <오느른> 유튜브 연재 중이다.(2020. 6.~2022. 6. / 구독자 32만 명) 한국외대 정치외교학을 전공하고, 2012년부터 프리랜서 다큐멘터리 피디로 활동하다, 2016년 MBC 시사교양본부 경력직 공채로 입사했다. <오느른>으로 2021년 제33회 피디연합회 주관 한국 피디 대상 디지털 콘텐츠 부문을 수상했다. 주요 저서로는 《오느른(오늘을 사는 어른들)》(2021, 바림)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