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자마을에 ‘오반장’이 있다

오진영 농업회사법인 오미록 / 유자발전소 대표

전남 완도군, 청용리 유자마을에서 유자 농사를 짓는 오진영 씨.
전남 완도군, 청용리 유자마을에서 유자 농사를 짓는 오진영 씨.

  전남 완도군에 다다르자, 차창 밖으로 뜨문뜨문 보이던 남쪽 바다가 한순간에 펼쳐졌다. 육지와 섬을 잇는 고금대교를 건너, 섬 안쪽 길을 따라 ‘청용리 유자마을’에 도착하니, 초겨울이 맞나 싶을 정도로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눈 닿는 데마다 사철 푸른 유자나무가 그득하고, 바닷바람 맞고 단단하게 자란 유자가 넉넉히 달려 있었다.

유자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열매들. 완도에서는 연간 3000t가량의 유자가 생산된다.
유자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열매들. 완도에서는 연간 3000t가량의 유자가 생산된다.
유자를 수확하는 오진영 씨. 그의 손에는 유자의 억센 가시가 남긴 상처가 있다.
유자를 수확하는 오진영 씨. 그의 손에는 유자의 억센 가시가 남긴 상처가 있다.

완도 유자, 누가 어떻게 키웠을까
  “유자 수확 철이라 어제까지 바쁘게 일하고 이제야 한숨 돌렸어요.”
  오진영 씨는 부모님의 유자 농사를 이어받아 생산, 가공, 유통을 책임지고 있는 청년농민이다. 그를 따라 유자밭을 천천히 걷다 보니, 노랗게 익은 유자 특유의 새콤달콤한 향이 은은하게 맴돌았다.
  “완도는 우리나라에서 유자 생산량이 두 번째로 많은 지역이에요. 그중에서도 우리 마을이 가장 많이 생산하고 있고요. 전체 70가구 중에서 50가구 이상이 유자나무를 키우고 있어요.”
  누군가 처음 시작한 유자 농사가 온 마을에 퍼졌다. 그는 부모님과 마을 어른들이 유자를 생산하고 가공하여 집안 살림을 꾸리고 자식들 대학까지 보내던 모습을 선명히 기억한다.
  “어렸을 때 아버지 따라 첫 배를 타고 광주에 있는 백화점에 유자청을 납품하러 다니기도 했어요. 유자청은 집에서 만들었는데, 그 시절에는 유자 써는 기계가 없으니까 마을 분들이 다 오셔서 일일이 손질하고는 했어요. 그게 벌써 30년 전 이야기네요.”

오진영 씨(맨 오른쪽)와 그의 스승이자 동료인 마을 어르신들과 함께. ⓒ오진영
오진영 씨(맨 오른쪽)와 그의 스승이자 동료인 마을 어르신들과 함께. ⓒ오진영

스승이자 동료가 된 어르신들
  대학에 입학하면서 고향을 떠나게 된 오진영 씨는 서울에서 10년 넘게 직장을 다니다가, 부모님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2009년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유자 농사는 자연스럽게 물려받게 되었다.
  “농사는 아버지 살아계실 때 배웠어요. 물론 어머니도, 동네 어르신들도 잘 알려주시고요. 제게는 농사 스승님과 같은 분도 있어요. 사실 제 나름대로 공부해보겠다고 농업인대학에 다닌 적도 있는데요. 그때 배운 것도 도움은 되지만, 어르신들의 경험치를 무시할 수 없어요. 꽃이 필 때는 무얼 하고, 열매가 달렸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다 아시거든요.”
  ‘유자에 청춘을 바친’ 주민들의 2022년 기준 평균 연령 68세. “나도 유자에 청춘을 걸겠다”는 후배를 위해서, 선배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아낌없이 나누었다.
  “유자를 가공할 때면 어르신들이 오셔서 이것저것 다 알려주세요. 유자는 언제 가장 맛있고, 어떻게 손질해야 하는지요. 저도 이제 겉모양만 봐도 알아요. 서리맞고 쪼글쪼글해진 것들이 당도가 더 높다는 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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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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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진영
어르신들과 함께 만드는 유자청. 유자청에는 유자와 백설탕만 들어간다.
어르신들과 함께 만드는 유자청. 유자청에는 유자와 백설탕만 들어간다.

지역을 담아낸 유자차 한 잔
  2018년 청년창업농으로 선정되고 가공 사업을 시작하기 전까지, 오진영 씨는 농사를 지으면서도 생활비를 벌기 위해 다른 일을 겸해야 했다. 단기로 고등학교에서 학습 보조교사 업무를 한 적도 있고, 전복 종묘와 관련된 협회에서 사무장 역할을 7년 넘게 맡기도 했다.
  “완도산 유자의 90% 이상이 다른 지역으로 가고 있어요. 가공시설이 부족하기 때문이에요. 그렇게 유자를 생과로 팔면 생산비조차 건지지 못할 때도 많아요. 안 되겠다, 내가 어르신들이랑 함께 유자를 가공해서 수익을 내야겠다, 생각하게 됐죠.”
  그렇게 만든 유자청은 온라인을 통해 판매하고, 도시에서 열리는 플리마켓에서 직접 선보이기도 한다. 그는 “알지 못하는 성분은 넣지도 않고 넣을 줄도 모른다”며 솔직하고 털털하게 소비자들에게 다가갔다.
  “제가 만들고도 처음에는 긴가민가했거든요. 시장에서는 소비자들의 반응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으니까 좋아요. 유자발전소를 진심으로 아껴주는 ‘찐팬’을 만나기도 해요. 제가 이분들을 ‘유블리’라고 부르는데, 랜선 영업사원처럼 여기저기 홍보해 주는 고마운 분들이에요.”
  어떤 고객의 소개로 한 카페에 유자청을 보내게 되었고, 그 인연으로 현재 60여 군데의 카페에 유자청을 납품하게 된 사연도 전했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서로를 믿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오진영
오진영 씨(맨 왼쪽)와 청용리 유자마을 사람들. ⓒ오진영

더 나아질, 우리 마을을 위하여
  오진영 씨는 마을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역할을 스스로 찾아 나섰다. 어르신들이 농약을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특강을 준비하고, 누구나 마음 편히 길을 건널 수 있게끔 과속 카메라 설치를 요청하기도 했다.
  “마을에서 ‘홍반장’처럼 움직이려고 해요. 사실 이분들이 있어서 제가 여기서 잘 지낼 수 있는 거잖아요. 이분들이 없으면 나는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 마을이 20년 후에도 지속 가능할까, 그런 고민이 들어요.”
  그는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이들이 완도의 매력에 빠질 수 있을지 궁리하고 있다. 2022년 대산농업연수로 유럽에 다녀온 후로는 마을 정비에 조금 더 신경을 쓰면서, 완도형 ‘클라인가르텐(Kleingarten, 작은 정원)’을 조성하기 위해 땅을 알아보고 있다. 또한, 지역에 있는 유자를 활용한 다양한 체험을 진행하기 위하여 가공시설 옆에 체험장을 세우고 있다.
  “유자로 할 수 있는 것들이 무궁무진해요. 사람들이 놀러 와서 유자로 먹을거리를 만들 수 있게 준비하고 있고요. 유자밭 곳곳에 있는 포토존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산책 코스도 기획하고 있어요. 지역 자원을 통해 젊은 청년들이 함께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싶어요.”
  “우리 마을에도 미래가 있고, 희망이 있다”면서 굳세고 야무진 표정을 짓는 그를 보니, 앞으로의 청용리가 지금보다 훨씬 더 다채롭고 떠들썩할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사진 이진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