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재밌게 살기로 했다

김혜진 딸기탐탐농장 대표

김혜진 씨는 경남 거창군의 농민이자 마을 활동가로, 지역에 활기를 불어넣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경남 거창군, 경칩을 앞두고 찾은 딸기 농장에는 따스한 봄기운이 가득했다. 어린아이 손바닥만 한 초록색 잎사귀 사이로, 앙증맞은 꽃송이들이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아래로는 빨갛게 익은 딸기들이 오밀조밀 매달려 ‘날 좀 보소’ 하는 듯했다. 농민이 딸기밭을 휘휘 돌며 잘 익은 것을 툭툭 따내니, 바구니에 소복이 담긴 딸기에서 봄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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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진 씨는 남편과 함께 비닐하우스 12동에서 ‘설향’ 딸기를 재배한다. 그는 “한 해 농사의 결실을 맺을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다”고 말했다.
김혜진 씨는 남편과 함께 비닐하우스 12동에서 ‘설향’ 딸기를 재배한다. 그는 “한 해 농사의 결실을 맺을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다”고 말했다.

딸기 농사에 열정을 쏟다
  딸기꽃처럼 얼굴이 하얀 김혜진 씨는 “농부 같지 않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원피스를 입고 일할 때도 많아요. 사람들이 저보고 어디서 놀다 왔냐고 물어봐요. 처음 만나는 어르신들에게 농사짓는다고 말하면 거짓말하지 말래요.”
  2025년, 올해로 농사 경력이 9년이다. 부산 출신인 그는 결혼 후 거제로 이사해 10년 넘게 살았다. 그러다가 남편이 일하던 조선소 사정이 점점 어려워지자 거창으로 귀농을 결심했다.
  “제가 도시에 살면서 흙을 한 번도 안 만져봤거든요. 그런데 겁도 없이 농사지으러 온 거예요. 처음에 땅 빌려준 농민이 자기만 믿으래요. 얼마나 든든해요. 그런데 뭘 물어도 대답이 시원치 않은 거예요. 언제 모종을 심냐고 했더니, 앞집이 심을 때 심는대요. 30년 농사지은 사람도 주먹구구식이었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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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사를 제대로 배우고 싶었던 그는 영농기술부터 가공, 유통, 마케팅 등 각종 교육에 1600시간 이상을 투자했다. 그러면서 딸기잼, 말린 딸기 등 가공식품 레시피도 직접 개발했다.
  “처음에는 의욕이 넘치잖아요. 딸기잼을 만들려고 마당에 가마솥을 걸어놓고 딸기를 끓였어요. 가스레인지를 쓰면 냄비가 잘 타거든요. 장작불 정도는 되어야 딸기 수분을 잘 날릴 수 있어요. 그걸 6시간씩 저으면서 저만의 레시피를 완성했어요. 지금은 조리법을 공장에서 그대로 재현해 딸기잼을 만들고 있어요.”
  농장 한쪽에 마련한 교육장에서는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아이들이 농장에서 딸기만 따는 게 너무 안타까워요. 학교 선생님들에게 최소 세 번은 방문해야 한다고 말해요. 딸기를 재배할 때는 어미묘에서 새끼묘를 받고, 그걸 심어서 수확하는 특별한 과정이 있거든요.”

김혜진 씨는 농장에 체험하러 온 아이들이 삽목부터 수확까지 딸기 농사의 모든 과정을 경험하길 바란다. ⓒ김혜진
김혜진 씨는 농장에 체험하러 온 아이들이 삽목부터 수확까지 딸기 농사의 모든 과정을 경험하길 바란다. ⓒ김혜진

(農)으로 품다
  2024년 1월에는 마음 맞는 농민들과 함께 사회적농업 협동조합 ‘식탁위의 작은숲’을 설립했다. 농업으로 조금 더 가치 있는 일을 해보자는 취지였다.
 “사회적농업은 사회적 약자가 농업을 통해서 세상과 연결되도록 하는 활동이거든요. 거창한 프로그램이 아니라 일상적인 경험으로 사회적 관계를 맺는 거예요.”
지난 7월에는 거창군에 있는 중증장애인 거주시설의 입주자를 임시직원으로 고용했다.
  “그 청년은 일주일에 서너 번씩 출근해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때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정식 직원으로 채용하기 전에 농장에 적응하는 단계를 거치는 거예요. 풀을 뽑거나, 청소하거나, 그때그때 농장에 필요한 일을 한두 시간씩 하고 있어요.”

딸기탐탐농장에서 임시 직원으로 일하는 전성훈 씨(왼쪽). 그는 조금씩 천천히 지역과 농장에 적응하고 있다. ⓒ김혜진

  2025년에는 정부에서 인정하는 농촌돌봄농장으로 선정되었다. 발달장애인, 고령층 등 지역의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농사, 요리, 놀이가 어우러진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할 예정이다.
  “지역으로 깊숙이 들어가야죠. 특수학교와 연계해서 학생, 학부모와 함께하는 프로그램도 진행하고 싶어요. 실습장도 만들 거예요. 대산농업연수에서 본 독일의 클라인가르텐(Kleingarten)처럼 개인이 구역별로 텃밭을 가꾸게 해도 좋을 것 같아요.”

주민이 즐거운 마을
  김혜진 씨는 거창군을 속속들이 누비는 마을 활동가이기도 하다. 2024년에는 완료지구 거점공간(주민공동이용시설) 활성화를 위하여 주민 참여 프로그램을 직접 기획하고, 운영했다.
  “거창읍에는 산책로가 잘 되어 있거든요. 거기서 반려견을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반려견을 위한 아로마테라피, 산책 매너, 행동 교정을 배우는 프로그램을 준비했죠. 교육이 끝난 뒤에는 다 같이 산책하면서 쓰레기를 줍는 ‘줍깅 캠페인’도 했어요.”

남상면 어울림마을 주민들에게 ‘숟가락 난타’를 가르치고 있는 김혜진 씨 (오른쪽). ⓒ김혜진
남상면 어울림마을 주민들에게 ‘숟가락 난타’를 가르치고 있는 김혜진 씨 (오른쪽). ⓒ김혜진

  음악에 관심이 많은 남상면 사람들을 위해서는 ‘드럼’을 주제로 잡았다.
  “남상면에는 드럼을 배우고 싶어 하는 중년 여성들이 많아요. 대구에서 강사를 초빙해서 드럼 교실을 열었어요.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에요. 프로그램 이름이 ‘북치고 돌치고’거든요. 수강생들이 마을회관으로 봉사활동을 가는 거예요. 학생이 다시 선생님이 되는 거죠. 어르신들이 드럼 박자에 맞춰서 다듬잇돌을 치도록 가르쳤어요.”
  마을 주민들은 ‘늴리리 맘보’, ‘노랫가락 차차차’ 등 대중가요에 맞춰 ‘다듬이’와 ‘숟가락’을 두드렸다.
  “어르신들이 성과공유회에서 공연도 했어요. 얼마나 재밌었는데요. 우리가 뭔가를 배우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될 수 있어서 좋았어요.”

마을 문화해설 기획자로도 활동하는 김혜진 씨는 자신이 살고 있는 ‘송변마을’을 배경으로 하는 프로그램을 기획하기도 했다. ⓒ김훈규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이야기를 입혀 ‘마을 여행’ 프로그램을 만드는 기획자가 되기도 한다. 지난가을에는 ‘신화 따라 별 헤는 밤’이라는 주제로 반나절 코스를 기획했다.
  “키워드는 ‘별’이에요. 시내에서 거창 의료계의 ‘별’을 만나고, 작은 우주인 나를 찾아가는 힐링테라피를 하고 나서, 마지막으로 밤하늘의 ‘별’을 보러 산꼭대기에 올라갔어요. 별이 쫙 펼쳐지니까 와, 탄성이 나왔어요.”
  김혜진 씨는 “정말 좋다”는 사람들의 말에 뿌듯함을 느낀다.
  “마을 어르신들이 저보고 언제 오냐고, 기다린다고 말씀하시면 너무 좋아요. 제가 도시에서 일할 때는 하나의 부품에 불과했거든요. 여기서는 저를 대체할 사람이 없어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으니까 정말 재밌어요. 재미없으면 안 했죠. 아니, 못 했죠.”
  활짝 웃는 그의 얼굴을 보니 감악산 꼭대기에서 볼 수 있는 별이 떠올랐다. 사람은 좋아하는 일을 할 때 가장 빛난다는 말이 생각나서, 나도 모르게 빙긋이 따라 웃었다.

글·사진 이진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