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희선 올바른농부영농조합법인 대표
가을비가 촉촉하게 내리던 일요일, 제주시 새활용센터에서 ‘올바른 농부장’이 열렸다. 실내 광장에는 빗속을 뚫고 장 보러 온 사람들로 와글와글 붐볐다. 농민들은 저마다 싱싱한 농산물을 부지런히 내어놓았다. 당근, 무, 고구마, 생강 등 잘 익은 제철 채소부터 인디언감자, 쿠카멜론, 히카마 등 이름과 생김새가 낯선 것들도 보였다. 누군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이게 뭐예요?”라고 묻자, 농민이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이름은 무엇인지, 누가 어디서 키웠는지, 어떻게 먹어야 맛있는지, 주고받는 말소리가 정답게 들렸다.
만남의 장, 축제의 장
‘올바른 농부장’은 제주 농민들이 직접 기획하고 운영하는 농부시장으로, 매월 둘째 주 일요일에는 제주시 새활용센터에서, 넷째 주 토요일에는 달진밧(밤낭골길)에서 열린다.
“농부시장은 물건만 사고파는 곳이 아니에요. 생산자와 소비자가 서로 눈을 맞추고 대화하는 만남의 장이고, 축제의 장이죠. 이런 기회가 얼마나 있겠어요. 우리 농부님들은요, 다들 놀러 오시는 거예요.”
올바른농부영농조합법인 대표인 문희선 씨가 말했다. 2019년 5월, 그는 동료 농민들과 함께 첫 장터를 열었다. 제주 로컬푸드 직매장 설립 계획이 무산되면서, 함께 교육받던 200여 농가 중 10여 농가만 남아서 시작한 농부시장이었다.
“손님이 20명은 되었으려나? 사람이 없으니까 우리끼리 놀았죠. 부침개도 부쳐 먹고, 떡볶이도 만들어 먹고요. 누가 오면 ‘이리 오세요’, ‘같이 먹어요’ 했어요.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고요. 그때 손님이 지금도 단골손님이에요. 하루 매출은 겨우 2만 원 정도였지만 정말 재미있었어요.”
그런데 장터를 적극적으로 돕던 지원단체가 사정상 갑작스레 빠지게 되면서 농민들은 비상에 걸렸다.
“농부시장을 계속할 것이냐, 말 것이냐, 다 같이 모여서 심각하게 고민했어요. 그래도 고객들과 약속했으니 끝까지 가자고 결정한 거예요. 그럼 어떡해요? 살아남아야죠. 그때부터 제가 기획을 맡았어요.”
농부시장의 놀라운 확장
2020년 1월, 그가 처음으로 기획한 농부시장은 원년 멤버인 윤동현 씨(유기촌 대표)의 밭에서 열렸다. 문희선 씨는 미리 모집한 20여 가족을 데리고 감자, 당근, 브로콜리, 비트, 콜라비 등 7가지 겨울 작물이 있는 밭으로 갔다.
“아이들뿐 아니라 엄마들도 당근이 어디에 있냐고 묻는 거예요. ‘이게 당근입니다’ 하면서 당근을 뽑아 올리니까 다들 깜짝 놀라더라고요. 당근 이파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대요. 그 사람들이 보여준 감동적인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 없어요.”
한쪽에서는 밭에서 나온 채소를 데치고 볶아 비빔밥 재료를 만들고, 그 위에 농민들에게 후원받은 고추장과 참기름을 먹음직스럽게 올렸다.
“평소에 채소를 안 먹던 아이들도 비빔밥을 엄청 맛있게 먹었어요. 엄마들이 무척 좋아했죠. 생산자와 소비자가 직접 만나고, 소비자가 생산자를 이해해야, 농부시장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게 우리의 정체성이죠.”
그렇게 농민과 소비자가 함께 텃밭을 가꾸는 ‘올바른 농부학교’를 시작했다. 2024년 2월에 새로 들어온 4기 학생 100명은 ‘농부의 사계’를 주제로 이듬해 1월까지 농사짓는다.
“다들 엄청 진지해요. 아이들 교육을 위해 오는 분도 있지만요, 진짜 농사를 배우려고 오는 분도 있어요. 그런 분들은 농부님 옆에 꼭 붙어 다녀요. 실제로 땅을 빌려서 농사도 짓고요. 그러다가 올바른 농부장 회원이 된 분도 있어요.”
올바른 농부학교에서 농사를 배우고, 서포터로 돌아와 초보자를 가르치는 ‘선순환’도 이뤄지고 있다.
“농부시장에서는 다품종소량생산 농민이 대농보다 인기가 더 많거든요. 500평(1650㎡) 밭에서 100가지 이상 농산물을 키우는 농민들도 있어요. 제주에 자리 잡고 싶어 하는 청년들이 많은데, 어쩌면 이들의 미래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2년 전에는 ‘다품종소량생산연구회’라는 청년조직을 만들어 청년들이 이에 관한 연구를 이어가도록 주도했다.
“자연을 지키고 땅을 살리고 싶어 하는 청년들이 있어서 제주가 발전할 수 있고, 농업이 지속할 수 있어요. 저도 그 친구들에게 많이 배워요.”
농민의 마음은 농민이 잘 안다
문희선 씨는 2014년부터 감귤 농사를 짓고 있는 농민이기도 하다. 남편 박종민 씨와 함께 블루베리와 메밀도 키우고 있다.
“저는 7살에 제주로 이사 왔어요. 부모님은 제가 중학교 2학년 때부터 감귤 농사를 지었죠. 빌린 땅이 점점 늘어나더니 1만 평이 넘었어요. 주말에 학교 안 가는 날은 밭에 가는 날인 거예요. 오빠랑 여동생은 툭하면 아팠거든요. 저는 아프지도 않고, 손이 무척 빨랐어요. 엄마는 제게 농사짓지 말아라, 말하면서도 계속 일을 시켰죠.(웃음)”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그는 논술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10년 동안 했다. 그러면서도 주말마다 틈틈이 부모님의 농사를 도왔다. 그런데 10년 전, 아버지가 암으로 별세하면서 본격적으로 농사에 뛰어들게 되었다.
“아빠가 병원에서도 귤 따는 꿈을 계속 꿨대요. 30년 가까이 귤 농사를 지었으니까요. 아빠가 일군 밭을 주인에게 돌려주면 아빠의 흔적이 지워지는 것 같은 거예요. 그래서 아빠가 특히 좋아했던 밭을 두 개 남겨놨어요. 그때부터 제 농사를 짓기 시작했죠.”
셋째 아들을 낳은 지 석 달도 되지 않은 때였다. 그는 아이를 방에 재워놓고 베란다에서 부지런히 귤을 포장했다.
“처음에는 고객 한 명 한 명에게 손편지를 써서 보냈어요. 맛있게 드시고 건강히 지내시라고요. 그런데 내 귤이 건강해야 그 말을 당당하게 할 수 있잖아요. 그래서 친환경농사로 전환하게 되었어요.”
농민의 마음은 농민이 잘 안다. 그가 번거로운 서류 작업부터 현장에서 몸 쓰는 일 하나하나까지 나서서 하는 이유는, 농민의 정성과 노력을 소비자에게 전달하고 싶은 바람 때문이다. 그는 보수를 받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똑 부러지게 말했다.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까요. 제가 월급을 받으면 직원이 되는 거예요. 저는 농사짓는 사람이잖아요. 농부시장 덕분에 감귤, 블루베리도 잘 팔리니까 상부상조예요.”
희망을 ‘연결’하다
장터 끝자락이 되자, 한숨 돌린 농민들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농부시장은 어떤 의미일까. 첫 농부시장부터 빠짐없이 참여했다는 박은주 씨(유기촌 대표)는 ‘소비자와 만나는 기쁨’이라고 말했다.
“저희는 평생 직거래만 했어요. 친환경농사를 지으니까 직거래가 살길이기도 하고요. 소비자를 직접 만나서 다양한 정보를 드릴 수 있어서 좋아요. 당근 이파리도 먹을 수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잘 몰라요. 볶거나 무쳐서 먹어도 되고, 줄기가 억세면 채수로 써도 된다고 알려줘요.”
제주로 귀농한 지 4년 차인 김슬기 씨(제주생명밥상 대표)는 ‘동료에게 받는 위로’라고 했다.
“지난번에 지구별가게 대표님이 제 귤을 보고 ‘이게 진짜 럭셔리란다’ 말씀하시는 거예요. 이렇게 못생겨도 건강하게 키운 게 명품이라고요. 진짜 감사하더라고요. 또 비건책방 대표님이 하늘에서 가장 빛나는 건 인공위성이고, 조금 깜빡이고 흔들리는 게 별이라고 해주셨어요. 친환경농사를 지으며 흔들리는 내 마음이 자연스럽고 당연하구나 싶었어요.”
문희선 씨는 농민과 소비자, 농민과 농민의 만남이 농업·농촌을 지탱하는 큰 힘이 되어준다고 생각한다.
“농민들이 농부시장을 통해 자존감을 얻는다고 할 때 뿌듯하죠. 농민들이 스스로 얼마나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지 느끼고, 그걸 소비자가 알아줘야 지속 가능한 농업이 될 수 있잖아요.”
그는 스스로 “연결하는 일을 가장 잘한다”라고 자부했다. 2024년 대산농업연수에 다녀온 뒤에는 프랑스 소농들이 서로 협력하여 농사짓는 모습을 떠올려, 제주에서 후계농이 없는 농민과 땅을 구하지 못하는 청년을 이어줬다.
“제가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는 없겠죠. 그래도 가까운 사람들을 챙기며 행복한 순간을 누릴 수 있잖아요. 그리고 그 과정에서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한 사람이 아닐까요?”
문희선 씨가 눈에 초승달을 그리며 선하게 웃었다. 그 웃음에 많은 이들이 겹쳐 보였다. 그리고 그들의 ‘희망’을 연결하는 그는 정말 행복해 보였다.
글·사진 이진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