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윤석원
‘화합和合’의 사전적 의미는 ‘화목하게 어울린다’이다. 좋은 말이지만 이를 행동으로 옮기기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다. 나를 중심으로 생각해 보아도 나와 아내, 자식, 일가친척, 친구, 직장동료, 이웃 등과 ‘화목하게 어울린다’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어렵다고 하여 아예 포기하고 살 수도 없어서 인간들이 한평생, 순간순간 노력할 수밖에 없는 과제라는 생각이 든다.
농촌에서의 화합을 떠올리면, 우선 농촌주민들 상호 간의 화합이 있을 수 있다. 특히 최근 귀농·귀촌인들이 증가하면서 농촌에서는 새로 들어오는 주민들과 기존의 주민들이 서로 어울려 사는 것이 당면과제인 듯하다. 특별히 농촌주민들 간의 화합이 중요한 사회적 과제가 되는 것은 기본적으로 농촌이 좁은 공간에서 소수의 주민들이 매일 얼굴을 맞대고 살아가야 한다는 당위에서 시작된다. 우리가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주민 간 화합을 그렇게 강조하지는 않는다. 넓은 공간에서 다수의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굳이 갈등하며 살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화목하게 살아야만 하는 것이 아닌 환경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마을이나 리 단위에서 산다고 하더라도 전혀 이웃과 별개로 사는 사람도 꽤 많다. 이들에게는 아예 주민들과의 화합이라는 개념 자체가 적용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하여 이웃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그렇게 사는 것 자체를 나무랄 수 없다. 그러나 작은 지역 공동체로서 농촌주민들 간의 화합은 어렵더라도 가야 할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도시에서는 내 아파트 앞집과 위, 아랫집에 누가 사는 줄도 모르고 사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수십 년간의 물질과 개인주의 위주의 급속한 경제성장 과정에서 주민들 간의 진정한 화합이라는 명제는 사라진 지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 가치를 이어가는 것이 절대 선이라면 농촌주민들이라도 실천하며 살아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무슨 거창한 구호나 관념의 나열보다는 쉬운 것부터 실천하면 어떨까 한다. 먼저 내 땅의 경계에 담을 쌓지 말아야 한다.
한 지역에서 오랫동안 농사지으며 살아 온 농촌주민들이 가장 많이 지적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도시에서 살다 온 사람들이 농촌에 들어와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자기 땅 경계를 측량하여 담부터 쌓으려 한다는 것이다. 사실 지금은 마을 안길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현황도로이지만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안길은 옛날 새마을 사업 등을 통하여 주민들이 각각 자기 땅을 내놓아 만들어진 길이기 때문이다. 그런 역사가 있는 안길을 이용하면서 자기 땅이라고 경계를 찾아 담을 쌓으면 처음부터 동네 사람들과는 거리감이 생긴다는 것이다.
만일 기존 주민들이 내 땅의 경계를 찾아 담을 쌓으려 한다면 동네 안길이 없어지거나 마비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와서 그렇게 할 수도 없고, 그래서는 안 되기 때문에 현실을 인정하며 살고 있는데, 도시에서 온 사람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내 땅에 경계망을 치는 게 뭐가 잘못되었느냐’고 항변한다고 한다. 외부인들은 그 마을의 역사적 관계성을 이해해야 한다. 처음부터 경계를 찾아 담을 칠 것이 아니라 일단 그냥 놔두는 것이 좋다. 세월이 좀 흐른 후에 기존 주민들과 소통하면서 경계를 표시해도 늦지 않다.
그리고 귀농·귀촌인들은 수십 년 동안 살아온 주민들의 삶의 방식과 관습 등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하리라 본다. 내 생각과 행동이 나의 기준으로는 옳다고 여겨지더라도, 먼저 원주민들의 방식을 존중하는 자세가 필요할 것 같다. ‘로마에서는 로마법을 따라야 한다’는 명언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한편, 현지 주민들은 귀농·귀촌인들을 도시로 나갔던 내 자식이나 친척이 다시 돌아왔다고 생각하고 보듬어 주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다수의 국민들이 아예 관심조차 없는데도 농촌이 좋다고 온 사람들이니 당연히 품어야 한다.
다 함께 ‘화목하게 어울린다’는 뜻의 ‘화합’을 농촌에서만이라도 소중한 시대적 가치로 키워나가고 지켜나가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이렇게 말하는 나 자신도 잘 지키지 못하고 있음을 고백한다. 그래서 나는 농촌 공동체를 이끌어 나가는 리더들과 모든 주민들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 윤석원: 중앙대학교 명예교수, 양양로뎀농원 농부
중앙대 산업과학대 학장, 한국농업정책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는 《쌀은 주권이다》(2016, 콩나물시루), 《농업문명의 전환》(2011, 교우사), 《농산물 시장 개방의 정치경제론》(2008, 한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