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진 원혜덕
지금부터 47년 전인 1976년에 나의 아버지1)는 오랫동안 살던 부천에서 양주로 터전을 옮겨 유기농업을 시작하셨다. 넓은 농장에 여러 가지 채소를 길렀는데 팔 곳이 없었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고 해도 유기농산물은 일반 시장에 진입하기가 어려운데 그때는 유기농업이라는 말을 아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양주 농장이 경제적으로 자립할 때까지 부천 농장에 있는 축산을 유지하기로 하고, 양주 농장에 필요한 생활비와 농사비를 조달받았다. 당시 부천에서 대학에 다니고 있던 나도 아침 일찍 닭 사료와 물을 주고 달걀을 걷어놓고는 학교에 갔다.
그 몇 년 후에, 보다 못한 오빠가 운전을 배워 1t 트럭을 샀다.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앞에 가게를 얻어놓고 매일 아침 부천 집에서 양주 농장까지 와서 채소를 싣고 가서 팔았다. 오빠는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두 번이나 갔다 왔고 대학에서 세 번이나 제적된 상태라서 취직할 데도 없고 시간도 많았다. 아버지의 일을 도우려고 그 일을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자기도 먹고살 만한 일이 되리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오빠가 시작한 조그만 풀무원 식품 가게는 후에 큰 회사로 발전하였으니 오빠의 예상이 맞은 셈이다. 그런 연유로 아버지가 유기농업을 하기 위해 시작하신 풀무원 농장과 오빠가 시작한 풀무원 회사를 같은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어쨌든 압구정동에 있던 그 가게가 농촌과 도시의 직거래의 시작이라고 말해도 좋을지 모르겠다.
부천에서 양주로 농장을 옮길 때 부천에서 이삿짐을 싸가지고 양주로 간 사람은 후에 나의 남편이 되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모교인 여고에서 교사로 일하던 나는 결혼 후에 학교를 그만두고 아버지와 남편이 하는 농사에 합류했다.
1) 원경선 풀무원 농장 설립자.
생명역동농업과 CSA, 새로운 세상을 보다
우리 부부는 20년 전에 아버지가 꾸려가시던 풀무원 공동체에서 독립하여 지금의 포천에 농장 터전을 마련했다. 그때부터 우리 부부가 독립적으로 생활을 꾸려나가야 했다. 옮기기 전 어느 날 미국에서 온 한 농부를 만났다. 직접 농사를 짓는 그는 들에서 일하느라 얼굴이 검게 그을려 있었고 손은 투박했다. 그 농부를 우리나라에 데리고 온 사람은 위스콘신 주에 있는 생명역동농업연구소에서 일하는 월터 골드스타인 박사였다. 골드스타인은 그 몇 해 전인 1995년에 우리나라 농업 관련 단체의 초청을 받아 내한했다가 우리 농장에 1주일 정도 머문 적이 있다. 그때 그로부터 우리는 이름과 이론만 알고 있던 생명역동농업(Bio Dynamic)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다. 생명역동농업은 1924년, 그러니까 99년 전 독일에서 시작된 유기농업의 한 갈래로 작물에 미치는 태양과 지구, 우주적 리듬의 영향을 농사에 적용하는 농법이다. 지금은 유럽 대륙은 물론 미국, 캐나다, 남미와 호주 등 전 세계로 전파되어 있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2005년부터 우리 농장은 생명역동농업으로 농사를 짓고 있다.
어쨌든, 20년 전 우리 농장을 방문한 농부는 처음 듣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는 농사지은 채소를 시장에 내지 않고 도시 소비자들에게 직접 판매한다고 했다. 농장 가까이 사는 사람들은 1주일에 한 번씩 농장에 와서 직접 농작물을 가져가고, 조금 더 떨어져 있지만, 차로 운반이 가능한 거리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트럭으로 배달해 주는데, 각 가정에 배달하는 것이 아니라 미리 정해놓은 장소 다섯 곳에 내려놓으면, 소비자들이 와서 자기 이름이 적힌 채소 상자를 가져가는 방식이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놀라웠다. 시장을 통하지 않고 생산자와 소비자가 직거래하는 방식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고, 더구나 생산자는 편리하고 소비자는 불편한 구조라니.
그 이야기가 다시 생각난 것은 2017년, 대산해외농업연수에 참가했을 때였다. ‘상생·협력으로 지속 가능한 농업’이 주제였던 만큼 호주와 뉴질랜드의 유기농가와 유기농업과 관련된 기관을 여러 곳 방문하였는데, 지역 소비자와 적극적으로 소통하며 직거래하는 조나이 유기양돈농장과 안젤리카 유기농장이 인상적이었다. 그때 CSA란 말을 처음 들었다. CSA는 Community Supported Agriculture의 머리글자를 따온 것으로 ‘공동체, 혹은 지역사회가 지원하는 농업’이란 뜻이다. 조나이 유기양돈농장은 이미 CSA로 자리를 잡아 회원이 되려고 기다리는 대기자가 많이 있다고 했다. 생명역동농법으로 농사짓는 안젤리카 농장은 40여 종의 채소를 길러 그동안 파머스마켓, 식당 등에 판매하고 있으며, 그 전해부터 일부를 CSA로 판매한다고 했다. 앞으로 CSA 판매를 두 배 이상 늘릴 계획이라고 했다. 그들의 판매 방식이 전에 만난 미국에서 온 농부와 같았다.
진심이 소비자에게 전해지는 CSA를 배우다
지난가을에 국제 생명역동농업 연합 데메터 사무총장인 크리스토프가 한국에서 열린 국제 유기농 박람회에 초청받아 왔다가 돌아가기 전에 본부의 소개를 받고 우리 농장을 방문했다. 생명역동농법으로 농사짓는 모든 나라의 사람이 세계 공통으로 사용하는 인증 마크가 데메터Demeter다. 그는 하룻밤을 자고 이튿날 들깨 거두는 일도 같이했는데 독일 슈투트가르트에 있는 자신의 농장에 관해 이야기하다가 CSA로 판매한다는 말을 했다. 내가 관심을 가졌더니 과정과 상황을 자세히 이야기해주었다. 요약하면, 2013년에 농장을 방문한 40명 소비자와 CSA를 시작했다. 회원은 해마다 늘어 2022년에는 600명이 되었다. 매주 금요일 회원들에게 주문을 받고 월, 화요일에 수확해서 나눠 준다. 시내에 사는 회원들은 바구니를 들고 직접 농장 가게로 가지러 오고, 차로 왕복 세 시간 거리 안에 있는 회원들에게는 목요일과 금요일로 나누어 배달해 준다. 주문한 채소를 저울과 함께 미리 정한 장소 세 곳에 갖다 놓고 벽에 주문서를 붙여놓으면, 회원들은 자기가 주문한 것을 저울로 달아서 가져 간다고 했다.
그의 초청을 받아 지난 2월 우리 부부는 스위스 바젤에서 열린 생명역동농업 컨퍼런스에 참가했다. 4일간의 일정이 끝나고 독일 슈투트가르트에 있는 그의 농장에 초대를 받았다. 농장은 시내 외곽에 있고, 농장 사무실 옆에서 젖소 12마리를 기르고 있었다. 그는 착유 시설과 가공시설도 보여주었다. 그는 파이프라인을 가리키며 착유한 우유가 스트레스를 받지 않도록 펌프를 사용하지 않고 파이프를 통해 자연스럽게 가공장으로 흘러가도록 설치했다고 설명해주었다. 그 전날 그가 안내한 다른 농장에 갔을 때 소를 도축할 때 소가 느낄 충격을 최소한으로 하려고 연구하여 새롭게 시설을 갖춘 것을 보고 감탄했는데, 생명체라 하기 어려운 우유조차 스트레스를 받지 않게 하려는 것을 보고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마음이 소비자에게 전해져서 그들의 CSA가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한다.
농장개척은 땅심을 키우는 것
우리가 포천에 농장을 마련하고 나서 처음 10년간 남편이 조그만 흙집을 짓고 혼자서 농장을 개척했다. 개척이라고 하면 대단한 일처럼 들리지만 유기물을 지속적으로 많이 넣어 땅심을 기르는 일이었다. 오랫동안 복숭아를 화학비료로만 기르던 땅이라 척박했다. 거름기가 많이 필요한 채소는 제대로 자라지 못했다. 양주 농장에서 트럭으로 거름을 날라 그 밭에 뿌렸더니 여러 해가 지나자 땅이 점차 기운을 되찾았다. 땅심이 생기는 것은 작물이 자라는 상태를 보면 안다. 남편이 생명역동농업 증폭제를 계속 뿌려준 것도 토양이 빨리 비옥해지는 데 많이 도움이 되었다.
12년 전에 포천에 집을 짓고 나도 양주에서 완전히 이사 왔다. 소를 비롯한 가축을 키울 축사도 짓고 토마토주스를 만들 작업장도 지었다. 농지는 나의 형제들의 도움을 받아 샀지만 건물을 짓는 비용은 대출을 받았다. 토마토를 노지에서 기르다가 이태 연속 장마에 다 망가진 후에는 비가림 하우스도 지어야 했다. 자급은 가능했지만 농장과 생활을 꾸려나갈 비용은 조금밖에 나오지 않았다. 유기농으로 기른 작물은 볼품이 없어서 시장에서는 거들떠도 보지 않는다. 어느 해 나름 파농사가 잘 되어 묶어 도매시장에 싣고 갔는데 남들보다 단을 크게 묶었는데도 파가 굵지 않고 길지도 않다고 반값 이하로 쳐주는 것을 받은 적이 있다. 풋고추가 잘 달린 해 농협 경매에 갖다 맡겼는데 값이라고 할 수도 없는 금액을 받아주었다. 우리가 여러 가지 작물을 조금씩 길러 양이 많지 않은 것도 판매해서 수입을 얻기가 어려운 이유였다.
아무래도 안 되겠기에 유기농 식품 회사인 ‘올가’ 문을 두드렸다. 우리같이 작은 규모와 시설로는 받아줄 것 같지 않아 아버지께 말해달라고 부탁하여 겨우 허락을 받았다. 토마토주스를 만들어 올가에 판매하면서 조금씩 현금이 들어왔다. 점차 올가에 납품하는 양이 늘어났지만 그래도 꽤 큰 농장을 제대로 꾸려나가기는 어려웠다. 그 수입으로는 건물 짓느라고 대출한 원금의 이자도 나오지 않았다. 몇 년이 지나자 농지를 일부 매각할 마음을 먹고 구체적으로 알아보기까지 했다.
SNS에 남긴 농장의 일상, 신뢰로 이어지다
그런 가운데 페이스북에 우리의 농산물 판매를 시작했다. 올가에 보내고 남는 토마토주스를 판매할 수 있을까 하고 시작한 것이다. SNS를 알려준 지인은 내가 컴퓨터에 서툴러서 못 한다고 하자 소파에 앉아서 휴대전화로 할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가 만들어준 계정으로 들어가 보았더니 기대했던 장터가 아니었다.
계정을 만들어놓고 한동안 내버려두다가 시간이 날 때 가끔 우리가 농사짓는 이야기를 써서 올렸다.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어본 적이 없으니까 글만 올렸다. 40년이 넘도록 유기농업이라는 한길을 걸어온 남편이 가축을 돌보고, 거름을 만들고,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김매고 거두는 모습은 남들에게도 보기 좋았던 것 같다. 나중에는 사진도 찍어서 함께 올렸다. 1년 정도 지나고 나니 이 사람들에게 우리가 만드는 토마토주스를 팔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그러나 막상 실행에 옮기기는 쉽지 않았다. 여름에 토마토를 2~3일마다 수확하여 주스를 만들면 여름이 끝날 무렵에는 작업장 한쪽이 토마토주스 상자로 가득 찼다. 추석이 다가왔을 때 용기를 내어 혹시 추석 선물로 토마토주스를 쓰실 분들은 주문해 주세요, 하고 올렸더니 이틀 만에 토마토주스가 절반 넘게 나갔다. 나머지는 그 후 조금씩 주문이 들어와서 그다음 해 봄이 되기 전에 다 나갔다. 그다음 해는 산양유 요거트와 통밀빵, 그다음 해는 통곡물선식과 들기름, 양파, 이렇게 해마다 우리가 농사지어 만든 물품들을 두어 가지씩 올렸는데 모두 바로바로 판매되었다. 그것을 보면서 마음에 깊이 들어온 자각이 있다. 우리가 농사를 제대로 지으면 소비자는 무조건 적인 신뢰를 보내는구나, 하는.
진실된 농민과 의식 있는 소비자가 손을 잡는 일
그 후 다시 몇 년 후에 더 큰 용기를 내어 CSA(회원제)를 시작했다. 소비자들이 우리가 생산하는 물건과 우리가 운영하는 농장에 대해 신뢰와 애정을 갖고 있다는 확신이 없으면 시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동안의 판매 방식에서 한 발짝 나간 것이라고도 생각되었으나 그냥 한 발짝이 아니라 도약에 가까운 한 발짝이었기에 용기가 필요했다. 우리가 그런 자격이 있나 하는 마음도 컸다.
이렇게 회원제로 하려면 우선 필요한 것이 생산자의 마음가짐과 정성이 아닌가 한다. 농사라고 하는 일 자체가 힘든 것이긴 하지만 사람과 자연에 이로운 방법으로 농사를 지어야 한다. 농약과 화학비료, 제초제를 뿌려서 기른 농산물을 먹어달라고 하는 것은 도리가 아닐 것이다. 관행으로 농사지은 농산물을 굳이 회원제로 가입하여 받으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다음 단계로 필요한 것이 소비자의 ‘의식’이다. 좋은 농산물을 생산했다고 해서 모든 소비자가 회원제를 선택하지는 않는다. 소비자가 필요할 때마다 구입하는 것도 아니고 1년을 계획에 따라 미리 주문해 놓는다는 것은 번거롭기도 하고 이익이 되는 일도 아니다. 도중에 내 마음이나 상황이 바뀔 수 있는 경우까지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거기에 더해서 농산품은 공산품과는 달리 자연재해를 당해서 원하는 물품이 안 나올 수도 있다. 가뭄으로, 폭염으로, 또는 폭우로 농사를 망칠 수도 있다. 다음 해로 넘기거나 다른 물품으로 대체하는 등의 방법이 있긴 하지만 기대한 물품을 제때에 받을 수 없다. 이 모든 조건이 소비자에게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회원이 된다는 것은 그들이 바라보는 농장이 잘 꾸려질 수 있도록 돕고 나아가서 자연과 환경을 살리는 농업방식에 동의하고 함께 간다는 의식과 인식이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소비자가 자신과 가족의 건강을 위한 기본 외에 농부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마음이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비자를 제2의 생산자, 또는 공동생산자라고도 부른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그 말을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었는데 회원제를 시작하면서 그 말이 우리 회원들에게 그대로 해당한다는 느낌이 분명해졌다. 농촌이 없으면 도시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은 진리이지만 실제로는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만큼 열린 시선을 가지고 농촌과 농업에 신뢰와 애정과 책임감을 가진 도시의 소비자가 고마운 것이다. 농촌과 도시의 연대라고 표현하지만 도시의 소비자가 농촌의 생산자에게 손을 내밀지 않으면 가능한 일이 아니다.
이제까지 나의 이야기를 하였다. 요즘 농부시장이 여러 곳에 세워지고 활발하게 운영되는 것을 본다.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친환경으로 재배했고 거기에 소규모인 경우는 판로가 거의 없었다. 사람과 자연에 이로운 방식으로 농사를 짓고 물건을 생산했다고 해도 판매할 곳이 없으면 농사를 계속할 수가 없다. 진실한 생산자가 도시에 사는 의식 있는 소비자를 만나는 시장이 자꾸 생겨난다는 것은 반갑고 고마운 일이다. 기존에 있는 생협, 농부시장, 그리고 우리 농장과 같은 CSA, 어느 방법이든지 농촌의 생산자와 도시의 소비자가 서로 손을 잡고 나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긴 시간을 거쳐 왔지만 이제 자리를 잡은 사람으로서의 책임감이기도 하다.
필자 원혜덕: 평화나무농장 농부
부천에서 여고 교사로 일하다가 결혼 후에는 포천에서 남편(김준권)과 함께 평화나무농장을 꾸려가고 있다. 유기농업의 최고봉으로 일컬어지는 생명역동농법으로 농사를 짓고 있으며 CSA(Community Supported Agriculture)로 소비자와 협력하고 연대하고 있다. 평화나무농장을 젊은 사람들의 교육장으로 열어놓으며 또한 보람을 느끼고 있다.